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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흥 국민보도연맹원이 수장된 득량만
 장흥 국민보도연맹원이 수장된 득량만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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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는 안 갈라요." "뭔 소리요?" "지는 가기 싫구만이라." "어허. 뿌리 읎는 나무가 어디 있소. 해방이 됐으니 당연히 고향으로 돌아가야지."

조성섭은 아내의 말에 쐐기를 박았다. "아휴" 한숨을 쉰 이면순(당시 32세)은 귀국 준비를 위해 짐을 쌌다.

그녀는 6년 전 남편을 찾아 관부연락선에 몸을 실었다. 일본 시모노세키에 있던 남편을 만나기 위해 부산에서 배를 타는 데는 특별한 용기가 필요했다. 이면순은 그 나이가 되도록 전라도 장흥 땅을 벗어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1939년 시골 여성 이면순은 다섯 살짜리 딸 조봉임을 앞세우고, 두 살짜리 아들 조계룡을 업고 관부연락선을 탔다. 양손에는 옷보따리를 들고, 머리에도 생필품을 담은 보따리를 이어 자라목이 되었다.

그렇게 일본에 와서 남편을 만나 생활한 지가 6년이 지났다. 그런데 해방이 돼 조선으로 귀국한다니 심경이 복잡했다. 해방은 두말할 필요 없이 반가웠지만, 일본에서 경제적 기반을 잡은 그녀로서는 귀국이 주저되었다. 하지만 남편의 뜻을 꺾을 수는 없었다.

누비옷에 지폐 구겨 넣어

당시 소년 조계룡의 눈에는 엄마와 아버지의 행동이 이상하기만 했다. "엄마, 아버지, 시방 뭐하세요." "애들은 알 것 없다."

소년은 그 '알 것 없다'는 소리에 더 궁금해졌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다다미 아래에서 빳빳한 지폐를 꺼내더니 손으로 마구 구기는 것이 아닌가! 벌써 한 시간 넘게 그러고 있으니 8살 소년의 눈에는 이상할 수밖에....

신기한 듯 빤히 쳐다보는 아들이 거슬렸는지 이면순은 "야, 봉임아! 동생들 데리고 나가 사탕이나 사줘라"고 돈을 건넸다. "와~"하며 조무래기들은 순식간에 방을 빠져 나갔다.

아이들이 방을 나가자 이면순은 계룡(당시 8세)과 태일(당시 5세)의 누비옷을 뜯어 거기에다 구겨진 지폐를 집어 넣었다. 옷이 볼록했다. 남편 조성섭은 양손으로 옷을 꾹 눌렀다. 그렇게 조성섭·이면순 부부는 일본에서 6년간 번 돈을 두 아들의 누비옷에 집어넣었다.

조성섭 가족이 다시 관부연락선을 타고 부산에 도착했을 때는 1945년 11월이었다. 이면순은 아이들 누비옷에 집어넣은 돈이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돈이 있는지도 모른 채 천방지축으로 뛰어다니기만 했다. 부산역 광장 여기저기서 외쳐대는 "엿 사려" "떡 사시오" "나무 들여 가세요"라는 노점상들 구경에 정신이 없었다.

그러다가 딸 봉임(당시 11세)의 "엄마, 태일이가 없어졌어요"라는 소리에 이면순은 기겁을 했다. "뭐시야?" 가족이 두 패로 나뉘어 태일이를 찾기 시작했다. 그런데 태일이는 남포동시장(자갈치사장의 전신)의 생선가게에서 물고기들과 눈을 맞추고 있었다.

태일을 꾸짖으려던 이면순은 깜짝 놀랐다. 아들이 입고 있어야 할 누비옷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 옷 어떻게 했어?" "모, 모, 모르겠는데요..." 엄마의 성난 얼굴을 본 태일은 순간 말을 더듬었다. 태일은 신나게 뛰어다니다가 덥다며 옷을 벗어던진 것이다. 시장을 한 바퀴 돌고 나서야 잡화점에 있는 태일이의 옷을 발견했다. 그런데 가게 할머니가 옷을 쉽게 돌려주지 않아 이면순은 시장 할머니에게 약간의 돈을 쥐어 주어야 했다. 

소고깃국 먹던 일본 시절

조성섭·이면순 부부는 일본에서 어떻게 돈을 모았을까? 조성섭은 일본으로 건너가 막노동을 시작했다. 그러다 일본 관리자의 눈에 띄어 중간 관리자가 되었다. 이후에는 도로의 터널 공사를 하청받았고 공사의 오야지(중간 관리자)를 맡았다.

그렇게 일본에서 자리를 잡은 그는 조선에 있던 아내를 불렀다. 이면순은 일본으로 건너와 함바(건설 현장의 식당)를 운영했다. 부부는 아이들을 학교에도 보내면서 돈 모으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엄마 따라 일본에 가서 초등학교 1년을 다닌 조계룡(1938년생)은 당시의 풍요로운 생활을 7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억한다. "소고기를 먹는데 고기가 질겨서 뱉었어요." 일제강점기 말에 소고기가 질리다니, 얼핏 이해가 가지 않는다. 

당시 일본인들은 소를 잡으면 고기만 먹고, 내장과 뼈는 버렸다. 그러면 조선인 인부들이 땅속에 묻힌 소의 내장과 뼈를 파내어 이면순에게 국을 끓여 달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이면순 가족과 인부들은 내장과 뼈에 붙어 있는 소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 

이들 부부는 일본에서 악착같이 번 돈으로 고향 땅 전남 장흥군 용산면에서 땅을 샀다. 조금씩 사 모아 100마지기(2만 평, 66,000㎡)가 되었다. 용산면에서 내로라하는 부자가 된 것이다.

보도연맹원 남편은 물고기밥

남부러울 것 없던 조성섭에게 불행의 여신이 찾아왔다. 어쩌다 놀음에 손을 대기 시작했는데 상당수 재산을 날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조성섭은 좌익활동을 시작했고 남로당 장흥군 용산면 책임자가 되었다. 1949년 초 어느 날 장흥군 용산지서 경찰들이 집에 들이닥쳤다. "조성섭 나와!" 경찰들은 군화를 신은 채로 안방에 들어와 조성섭을 연행했다. 마을의 한 유지가 '조성섭이 좌익활동을 했다'고 밀고한 것이다.

경찰들은 조성섭을 용산면 남상천 앞으로 끌고 가 집단 구타했다. 몇 시간에 걸친 구타로 조성섭은 초주검이 되었다. 서 순경이 "그만 가자"고 했지만, 김 순경이 "죽여 버리자"고 했다. 다행히 서 순경이 만류해 경찰들은 돌아갔다.

이웃 마을 사람의 연락을 받은 이면순은 친척에게 도움을 청해 반죽음이 된 남편을 데려왔다. 조성섭은 산송장이나 다름이 없었다. 특히 오른쪽 발목 뼈가 부러져 운신을 할 수 없었다. 당시 구리쇠를 갈아 마시면 낫는다라는 말에 조성섭은 줄에 간 구리쇠 가루를 아침저녁으로 1년 동안 마셨다. 덕분인지 발목뼈는 붙었고 그는 1년 만에 작대기를 짚고 마을을 돌아다닐 수 있었다.

1년 만에 운신을 한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국민보도연맹' 가입서에 도장을 찍는 일이었다. 용산지서 지서장이 '국가시책'이라며 강요해, 어쩔 수 없이 가입했다. 그런데 6.25가 발발하자 보도연맹원 명부는 '살생부'가 되었다.

장흥군 용산면 풍길리 집으로 찾아온 경찰들은 조성섭을 연행해 갔다. 용산지서 유치장에서 하룻밤을 지낸 그는 장흥경찰서로 이송되었다. 장흥경찰서로 남편의 옷과 밥을 가져간 아내 이면순은 집으로 와 펑펑 울었다. 경찰서 유치장에 초췌한 모습으로 있을 남편을 생각하니 밤새 한숨도 못 잤다.

다음 날 그녀가 장흥경찰서에서 가니 놀라운 일이 벌어져 있었다. 남편을 포함한 보도연맹원들이 모두 없어진 것이다. 경찰들은 그들의 행적을 일절 알려주지 않았다. 다만 인근 주민들이 "수문리 앞바다(득량만)로 갔다"고 했을 뿐이다.

큰아들 계룡과 20여 일을 수문리 앞바다를 포함한 장흥군 해안 일대를 뒤졌으나 허사였다. '보도연맹원들을 수장시켰다'는 이야기만 들었을 뿐이다. 남편이 물고기 밥이 된 것이다.

소금 만들어 팔고 동생들은 머슴살이

졸지에 남편을 잃고 4남 2녀의 생계를 책임지게 된 이면순은 눈앞이 캄캄했다. 일본에서 번 돈으로 산 100마지기는 남편의 도박으로 남의 땅이 된 지 오래였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썰물에 게, 꼬막, 바지락을 잡아다 내다 팔았다. 장남 조계룡은 초등학교 졸업 후부터 생계 전선에 뛰어들었다. 그가 쟁기질을 할 때면 키가 작아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계룡은 할아버지가 하라는 대로 소를 몰아 쟁기질을 했다.

소금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기도 했다. 밀물에 쓸려 온 바닷물을 논에 가두어 햇볕에 건조했다. 소금을 골고루 건조하기 위해 뒤집는 일을 반복했다. 그렇게 한 후에 가마솥에 끌이면 정제된 소금이 만들어졌다. 이 소금을 가마니에 담아 지게에 지고 장흥 읍내 시장에 내다 팔았다. 용산면 풍길리에서 장흥읍까지는 20리(8㎞)나 되었다. 시장에 한 번 갔다 오면 파김치가 되었다. 그의 나이 14~15세 때 일이었다.

그래도 일곱 식구 입에 풀칠을 하기는 쉽지 않았다. 결국 가족들이 뿔뿔이 헤어졌고 조계룡의 동생 조태일과 조광용은 남의 집 고공살이(머슴)를 했다. 이면순은 면사무소에서 수숫가루를 얻어왔는데 다름 아닌 미국에서 보낸 원조물자였다. 면사무소에서 공짜로 배급해 준다는 말에 부리나케 가 받아왔다.

배급받아 온 수숫가루로 죽을 끓여 먹었다. 다음 날 아침에 식은 죽을 다시 끓이기 위해 솥뚜껑을 연 조계룡은 기겁했다. 죽 한가운데서 벌레가 기어 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배고픔에 장사가 없는 법이다. 계룡은 벌레를 버리고 죽을 끓여 동생들과 나눠 먹었다. 1950년대 초반 배고팠던 대한민국의 현실이었다.

남은 것은 아버지의 명예회복
 
 증언자 조계룡
 증언자 조계룡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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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이 없던 조계룡은 18세에 무작정 상경했다. 껌팔이 소년에게 "나도 할 수 있냐"고 해 껌을 2주간 팔러 다녔다. 그래서는 돈이 안 된다고 생각한 그는 SP판을 팔기 시작했다. SP판은 LP판 이전의 레코드판이었다. 양손에 각각 50장씩의 판을 들고 불광동, 영천고개, 서대문형무소, 청량리 등지의 다방과 스탠드바를 돌아다녔다.

"총각. 판 한 번 틀어봐" 그렇게 판을 다 틀고서도 안 사주는 곳이 많았다. 그때부터 조계룡은 평생을 야생초처럼 살았다. 양담배 팔이, 쌀가게 점원, 조선일보사 트럭 운전수에 이어 시외버스 기사도 했다. 광주에서는 승용차 11대로 렌터카사업도 했는데 1989년 귀향했다.

조계룡(83세, 장흥군 용산면 풍길리)은 뒤늦게 과거사법을 알았다. 2005년 제정된 과거사법의 존재를 몰랐던 것이다.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는 것이 평생의 꿈이었던 그는 2015년부터 장흥유족회장을 맡았다. 미신고자 유족들을 찾아내고, 국회에서 과거사법 개정이 이루어지는 데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는 요즈음 제2기 진실화해위원회에 제출할 진실규명신청서를 준비기에 바쁘다. 그의 어깨에 장흥유족들의 염원이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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