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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문리 앞바다(득량만). 장흥군 보도연맹원들이 수장당한 곳
 수문리 앞바다(득량만). 장흥군 보도연맹원들이 수장당한 곳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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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룡이 아버지! 계룡이 아버지 어디 있소? 살아 있으면 대답 쫌 하시오."

1950년 7월. 전남 장흥군 득량만에 대고 목이 터져라 소리치는 이면순(당시 37세)의 외침은 허공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때 바다 한가운데에 희끄무레한 것이 보였다.

"계룡아! 쩌기 보이는 거시 뭐다냐? 사람 아니냐?" 어머니 뒤에 서있던 조계룡(당시 13세)이 바다를 보니 그곳에는 갈치잡이 배만이 외로이 떠있었다. 소년은 어머니에게 대답할 힘도 없었다. 아니 하루에도 수십 번 물어보는 어머니의 말에 신물이 나 대꾸하기도 싫었던 것이다.

하지만 소년은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어무이요. 쩌거는 갈치잡이 배라요." 아들의 대답에 이면순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어머니의 축 늘어진 어깨에 소년은 어머니가 한없이 불쌍해졌다.

남편을 잃은 이면순은 당시 임신 3개월이었다. 머리카락은 풀어 헤쳐졌고, 눈동자는 초점을 잃은 지 오래였다. 그러다가도 바다에서 이상한 물체만 보이면 눈동자가 빛났고 아들 조계룡에게 물어봤다. 그러기를 20일째였다.

당시 장흥군 안양면 수문리 앞바다(득량만)에서 시작된 이면순·조계룡 모자의 흔적 찾기는 서촌, 남포, 관산면 죽청리, 고마리, 장한도, 회진면, 대덕면 노녁도 등 장흥군 해안가로 이어졌다. 그렇게 이면순이 남편 조성섭(당시 35세)의 시신을 찾아 20일 동안 바닷가 일대를 돌아다녔지만 허사였다. 

밭일하다 끌려간 남편, 시신 한번 못 봐

1950년 7월 말부터 8월 말까지 전남 장흥군 해안가에는 이면순·조계룡 모자처럼 가족의 시신을 찾는 이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3, 4가족이 배 한 척을 빌려 한 달 가까이 다니기도 했다.

이 대열에는 정예남(당시 30세)도 있었다. 장흥군 용산면 상금리에서 오순도순 살았던 정예남 가족에게 한국전쟁이 터진 직후 불행이 찾아왔다. 아내 정예남과 함께 밭두렁을 다듬던 백웅선(당시 37세)에게 불청객이 찾아왔다.

"백웅선씨, 지서에 잠시 갑시다." "무슨 일인데요?" "별일 아닙니다. 잠깐이면 됩니다."

용산지서 경찰의 말에 백웅선은 손바닥에 묻은 흙만 털고 일복을 입은 채로 경찰을 따라갔다. 하지만 저녁 때가 되어도 남편이 귀가하지 않자 걱정이 된 정예남은 지서로 갔다. 남편은 유치장에 갇혀 있었다. "이게 웬일이래요?" "너무 걱정 말고 갈아입을 옷이나 가져 오시오." 당시는 한여름이라 매일 갈아입을 옷과 식사를 지서로 날라야 했다.

그날도 아침 일찍 부리나케 정예남은 용산지서에 갔다. 하지만 용산지서 유치장은 텅 비어 있었다. 경찰은 "장흥경찰서로 갔다"고 차갑게 말했다. 정예남이 장흥경찰서로 갔지만 이미 남편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다. 경찰서 인근 주민들은 "보도연맹원들을 굴비 엮듯이 묶어 수문리 앞바다로 갔다"라고 했다.

예남이 불길한 마음에 수문리 앞바다(득량만)로 뛰어갔지만, 거기에도 남편은 보이지 않았다. 득량만에는 자신처럼 가족을 찾아 모여든 사람들이 수십여명이었다. 보도연맹원 가족의 애타는 모습을 보다 못한 인근 주민들은 "경찰들이 보도연맹원들을 바다에 던져 부렀소"라고 알려주었다. 그 말을 들은 가족들은 곡을 터뜨렸다. 1950년 7월 21일의 일이었다.

다른 유족들처럼 정예남도 시신을 보기 전에는 남편의 죽음을 믿을 수 없었다. 그날부터 남편 흔적 찾기가 시작됐다. 예남은 태어난 지 6개월밖에 되지 않은 자식(백정하)를 등에 업고 한 달여를 바닷가에서 살았다. 밀물과 썰물 때 시신이 떠오른다는 말에 하루에 두 번 바다에 눈동자를 고정시켰다. 나머지 시간에는 해안가 일대를 샅샅이 뒤졌다. 혹여 시신이 떠밀려 오지 않을까 해서다.

한 달 동안 해멨지만 결국 남편 백웅선의 시신은 찾을 수 없었다. 이후로 정예남은 60여 년 동안 입에 갈치를 한번도 대지 않았다. '바다에 사람이 빠져 죽으면 갈치 떼가 제일 먼저 시신을 뜯어 먹는다'는 이야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친정인 전남 보성군 회천면에 갈 때도 수문리로 가지 않았다. 지름길인 수문리로 가면 훨씬 빨리 갈 수 있는데도, 남편이 생각나 멀리 돌아갔다.

"김일성을 절대 반대한다" "절대 반대한다"

1950년 3월 8일 장흥경찰서 앞은 보도연맹원과 장흥군민 들로 인산인해였다. 이날 열린 장흥국민보도연맹 결성식에는 1천여 보도연맹원과 각 관공서, 사회단체, 중학교 상급생 등이 참석했다.(진실화해위원회, 『2009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국민의례, 애국선열에 대한 묵념, 보도연맹 전라남도 간사장 등의 인사말 순으로 진행된 결성식의 마지막 순서는 보도연맹 주요 강령 제창이었다. "맹원(보도연맹원)들은 모두 기립하시오. 제가 선창하면 마지막을 제창하시오." 사회자의 발언에 참석한 보도연맹원들은 상기된 표정을 지었다.

"대한민국을 절대 지지한다" "절대 지지한다"
"김일성을 절대 반대한다" "절대 반대한다"
"남·북로당을 절대 반대한다" "절대 반대한다"


보도연맹 강령의 선창과 제창이 끝나자 참석자 모두 박수를 치고 행사는 막을 내렸다. 이어서 시가행진도 했다. 행사에 참석한 백웅선은 장흥보통학교를 나와 일제강점기에는 원항어선을 타고 일본 오사카와 부산, 중국 등지를 다닌 '마도로스'였다. 해방 후에는 고향에서 농사로 소일하던 그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사회변혁을 꿈꾸었다. 1947년부터 마을 백○○ 사랑방에서 몇 차례 '나라 돌아가는 상황'을 이야기하며 어울린 게 '포고령 위반' 죄가 되었다.
 
 득량만에서 학살된 백웅선(앞줄 오른쪽)
 득량만에서 학살된 백웅선(앞줄 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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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광주지방법원 장흥지원에서 징역 10개월을 선고받은 그는 1950년 초 만기 석방되었다. 형무소에서 막 나온 백웅선은 마을 사람의 인사를 받고 화들짝 놀랐다. "아이고, 해숙이 아버지, 아들 난 것 축하혀요." "예?" 옥중의 백웅선은 아내가 임신한 줄 몰랐다. 징역을 살고 나오니 아들이 태어나 있었다.

백웅선·정예남 부부 사이에는 이미 1남1녀의 자식이 있었지만 셋째의 탄생은 그들에게 축복이었다. 이름은 '백정하'라고 지었다. 그렇게 행복할 것 같던 그들에게 불행이 닥쳐왔다. 바로 국민보도연맹 창설이었다.

아니, 보도연맹이 창설될 때만 해도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전향하면 김일성과 공산당으로부터 보호해 준다'라는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그런데 6.25가 발발하자 이승만 정권은 국민보도연맹을 '잠재적 적'으로 간주하고 가입돼있던 이들을 집단학살했다. 전국 곳곳에서 보도연맹원들이 죽어 나갔으며 전남 장흥군도 예외는 아니었다.
   
 증언자 백정하(백웅선의 아들)
 증언자 백정하(백웅선의 아들)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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넥타이와 혁대 보고 시신 신원 확인

6.25 발발 직후 장흥경찰서는 관내 보도연맹원들을 예비검속해 각 지서 유치장에 구금하라고 관할 지서에 명령했다.

전남 장흥군 용산면 괴산리 차동에 살던 오기봉은 강진농고를 나와 사회활동을 하다가 보도연맹에 가입했다. 오기봉의 큰 형 오일봉은 자기 집 주변 대나무밭에 방공호를 팠는데 경찰의 검거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동생 삼형제(오승봉·기봉·경봉)가 좌익에 연루되어 툭하면 경찰의 호출을 받는 신세였기 때문이다.

보도연맹원 예비검속이 실시되자 방공호에 숨어 있던 오기봉은 화장실에 가려고 굴 밖으로 나왔다가 매복한 경찰에 검거되었다. 장흥경찰서로 이송된 오기봉은 며칠 후 2인 1조로 묶여 트럭에 태워졌다. 저세상으로 가는 길이었다. 경찰은 보도연맹원들이 도망가지 못하게 2인 1조로 묶었다.
 
탕수배기 앞에 선 유족들 장흥 보도연맹원들이 1차로 학살된 곳
▲ 탕수배기 앞에 선 유족들 장흥 보도연맹원들이 1차로 학살된 곳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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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내에서 출발한 트럭이 장흥군 안양면 해창저수지 인근 야산(탕수배기)을 지날 때였다. "앗! 저 놈들 죽여라." '탕탕탕' 길 모퉁이에서 탈출을 시도한 보도연맹원 9명은 그 자리에서 모두 죽임을 당했다. 오기봉도 즉사했다. 이 탈출로 트럭 네 귀퉁이에서 총을 들고 있던 경찰은 얼굴이 시뻘개졌다. 인솔자에게 따귀를 맞고 호되게 혼났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도착할 때까지 대가리 드는 놈은 죽을 줄 알아!"라는 경찰의 협박이 이어졌다. 트럭은 다시 움직여 장흥군 안양면 수문리 앞바다에 도착했다. 경찰들이 보도연맹원들을 배에 실어 수장시키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행히 탕수배기에서 죽은 이들의 시신은 모두 수습할 수 있었다. 오기봉도 마찬가지였다. 오기봉은 그의 애인이 사준 넥타이와 혁대 때문에 신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진실규명 필요한 장흥군 보도연맹사건

6.25 때 오일봉 집안에서는 오기봉만 학살된 게 아니었다. 그의 형 오승봉과 동생 오경봉도 학살당했다. 6.25 직후 보도연맹원 예비검속이 실시되자 큰형 오일봉이 막냇동생 오경봉에게 "외가가 있는 거문도로 피신하라"고 했다. 오경봉은 여수 거문도로 몸을 피했지만 장흥경찰서의 연락을 받은 여수경찰서 삼산지서 경찰들이 그를 연행했고 고흥 관내 무인도에서 학살했다.

강진농고를 나와 아내와 함께 강진세무서에 다녔던 오승봉은 6.25 직후 예비검속되었고 행방불명 처리됐다. 언제 어디서 학살되었는지조차 모른다. 오일봉의 딸 오명애(1946년생, 전남 장흥군 안양면 사촌리)는 "작은아버지 오승봉은 어디서 죽었는지조차 몰라 더욱 안타깝다"고 했다.

전남 장흥군에서는 보도연맹원이 몇 명이나 죽었을까? 전남일보사가 펴낸 <광복 30년>에서는 탕수배기와 득량만에서 30여 명이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반면 유족회는 45명이 죽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제1기 진실화해위원회는 '장흥보도연맹사건' 피해자로 단 2명만을 진실규명 결정했다. 신청인 1명과 미신청인 1명이다. 그런데 진실화해위원회가 장흥군에 의뢰해 시행한 '기초사실조사(2008년)'에서는 장흥군 보도연맹사건 희생자를 22명으로 기록했다. 여기에는 시신을 수습한 4명도 포함돼 있었다. 

하지만 진실화해위원회는 이 조사가 '진실규명에 필요한 절차를 밟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정하지 않았다. 장흥유족회 조계룡(83세, 전남 장흥군 용산면 풍길리) 회장은 "장흥군 보도연맹원이 일천 명이었다는데, 학살당한 이가 수십 명이라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제2기 진실화해위원회가 장흥군 보도연맹 사건을 철저히 조사해 피해 규모를 확인하고 희생자를 명예회복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2020년 12월 10일 출범한 '제2기 진실화해위원회'의 어깨가 무겁다. 특히 장흥군 보도연맹사건처럼 피해자 유족이 적은 경우는 더욱 그렇다. 70년 전 득량만에서 영문도 모른 채 바닷속에 던져져 물고기 밥으로 희생된 이들의 흔적은 최대한 확인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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