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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별세하기 직전의 나철 선생.
 1916년 별세하기 직전의 나철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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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철 대종사는 죽음에 임하여 대종교의 입문이 곧 '불령선인'으로 찍혀서 고난이 따르는 핍박속에서도 단군정신을 이어받아 조국광복운동에 나선 국내외의 도인들에 당부의 말씀을 남겼다.

밀유(密諭) : 끼치신 말씀

아! 우리 종문(倧門)의 뒤를 이을 이들은 항상 공경하여 한얼을 받들며 반드시 사량으로 인간을 구원하고 교를 널리 펴서 한님의 공덕을 빛낼 것이며 그 업을 쫓아서 사람의 벼리를 떨칠 것이오.

마음을 놓아서 아무나 속이지 말며 기운을 불려서 함부로 떠들지 말고 나쁜 생각으로 정치에 덤비지 말며 못된 버릇으로 법률에 범하지 말고 겁냄과 원망을 품지 말며 음탕과 미흑(迷惑)에 가까이 말고 교문을 방자하여 일을 저질지 말며 교도들을 믿고서 공론(公論)에 다투지 말고 다른 교인을 별달리 보지 말며 외국 사람을 따로 말하지 말고 권세 있다고 아첨하지 말며 구차한 것을 없우이 말고 안정으로써 몸을 닦으며 청직(淸直)으로써 뜻을 가지고 원도로써 죄를 뉘우치며 근검(勤儉)으로써 살림을 늘리고 자손에게 충효를 가르치며 형제끼리 돈목(敦睦)하게 도와주고, 

안으로는 인지(仁智)를 닦으며 밖으로는 신의로 사귀고 진실한 정성은 일찍 팔관(八關)의 제계(濟戒)가 있으며 두터운 풍속은 또한 구서(九誓)의 예식을 전하였고 삼법(三法)을 힘써 행하여 먼저 욕심물결의 가라앉음을 도모하며 한뜻을 확실히 세워 스스로 깨닫는 문이 열림을 얻게 하라. 이와같이 하면 한울에서 복이 나릴 것이오 만일 어기우면 한얼께서 벌을 받을 것이니 조심하고 힘쓸지어다. (주석 11)

 
나철 선생이 딸에게 남긴 유서(전남 보성 발교읍 '나철 선생 기념관' 게시 사진)
 나철 선생이 딸에게 남긴 유서(전남 보성 발교읍 "나철 선생 기념관" 게시 사진)
ⓒ 나철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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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경히 우리 교문의 형제자매에게 고하는 글(恭告敎徒文)

공경히 우리 교문의 형제자매에게 고하노라.

아! 애통하도다! 우리 동포는 뉘가 한님단군의 거룩하시게 길러주신 영특한 인간들이 아니리오. 그러나 모두가 근본을 잊으며 근원을 저버리고서 사특한 길을 달리고 참함에 아득하며 가달길에 잠기어서 죄바다로 떨어지매 마치 촛불에 닿는 약한 나비와 우물에 빠지는 어린아기와 같거든 하물며 구더기가 수파람을 내고 도깨비가 뛰노니 한울 땅의 정기 빛이 어두우며 배암(뱀)이 먹고 도야지(돼지)가 뛰어 가니 사람겨레의 피고기가 번지르 하도다. 

나라 땅은 유리조각 같이 부서지고 티끌 모래는 바람 비에 날렸도다. 날이 저물고 길이 궁한데 인간의 갈길은 어디메뇨? 아! 슬프도다. 이것이 누구의 허물인고 비록 그러나 우리 한배검 단군께서 특별히 크신 사랑의 은혜를 드리우사 차마 어린아이의 우물에 빠짐을 언덕에서만 보지 못하시고 한 가닥 이 백성의 살아 갈길을 거듭 열어 주시니 곧 우리 대종교문이 이것이다. 

다행히 이 교문에 들어오는 이는 공중에 떠서 두루미를 타는 것 같고 이 교문에 나아가지 않는 이는 돌을 지고 바다에 빠짐과 같을지라. 모두 한 가지인 우리 형제자매들이여! 화가 변하여 복이 됨도 오직 내마음에 있고 즐거움을 버리고 괴로움에 떨어지는 것도 또한 내 마음에 있는지라 옛사람이 일렀으되 화(禍)와 복(福)은 문이 없고 오직 사람이 부르는 바라 함은 실로 오늘을 준비한 말이로다. 

나는 죄가 무겁고 덕이 없어서 우리 교문을 맡은 지 여덟해 동안에 능히 큰 도의 빛난 빛을 널리 펴지 못하며 능히 이 세상의 아득한 길을 크게 건너지 못하고 이렇듯 오늘의 빠짐이 있으니 도리어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겠고 또한 여러분 형제자매의 독실하게 믿지 않은 허물이라 이를 것이다.

내가 이제 온전히 형제자매의 허물을 대신하고 한오리의 목숨을 끊어서 위로는 한배검께 사례하며 아래로는 모든 동포에게 사례하노니 내가 간 뒤에 대종교의 일은 오직 여러분 형제자매의 힘으로써 이 세상에 행복 될 것을 바랍니다. 늘 건강들 하시고 힘 많이 써주시오. (주석 12)


나철은 단군교를 중광하여 한 교단의 교주가 되고서도 종교적인 과도한 위상이나 위세를 보이지 않았다. 구한말 이래 수많은 종파가 생기고, 개중에는 자칭 천자 또는 현신이라 부르면서 혹세무민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는 달랐다. 대단히 검소하고 서민적이었다. 자신의 장례에 대한 유언에서도 그 정신이 드러난다.

장사지내는 일에 대한 경계말씀

1) 지금 한국땅에 이몸을 묻을 곳이 없으니 반드시 회장으로써 깨끗하게 할 것.
2) 염습에는 명주, 비단을 쓰지말고 다만 삼베, 무명(평일에 입음과 같은 것)으로써 몸을 쌓고 시체를 거둠에는 관곽을 쓰지 말고 부들은 갈대의 자리로 묶을 것.
3) '상여'를 쓰지 말고 지게로 옮길 것.
4) '부고'를 돌리지 말고 조상을 받지 말 것이며 장사할 때에 손님을 청하지 말 것.
5) '명정'은 다만 성명만 쓸 것.
6) 만일 제사를 지내거든 고기 술을 쓰지 말고 밥 한 그릇 반찬 한그릇(평일에 먹음과 같은 것)으로 차릴 것.
7) 교문의 형제자매들은 상장(喪章)을 붙이지 말 것.
   
    단제강세 4373년 병진 8월 15일
    대종교 도사교 나철(羅喆)
    대종교중 첨위 인체

(부) 밀계일조(密誡一條)

유해의 재는 반드시 한밝뫼 아래(총본사에서 가까운 땅)에 묻을 것. (주석 13)

           
주석 
11> 앞의 책, 
12> 앞의 책, 236~237쪽.
13> 앞의 책, 237~239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민족의 선각 홍암 나철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국난기와 국망기에 온몸을 바쳐 구국과 독립을 위해 나섰는데, 역사가 제대로 평가하지 않고 국민에게 잊혀진다면 어찌 건강한 사회라 할 것이며, 그것은 누구의 책임일까?
태그:#나철, #나철평전, #홍암, #홍암나철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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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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