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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별세하기 직전의 나철 선생.
 1916년 별세하기 직전의 나철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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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날 새벽 2시 반에 모든 의식이 끝났다.

대종교를 중광한 대종사 나철의 최후의 모습을 살펴본다. 

나철은 사당 뜰을 거닐다가 시자(侍者)들을 불러 당부하였다.

"이 땅은 우리 한배께서 한울에 오르신 곳이라 예로부터 사당을 세우고 신상을 모시어서 향화가 4천 년간 끊이지 아니하고 이어왔는데 불행하게도 이 몇 해 동안에 제사를 폐하고 수호(守護) 조차 없이하여 사당과 제실이 무너지고 비바람에 견디지 못하게 되었으니 슬프다! 존귀한 삼성사가 이지경에 이르렀으니 그 자손된 자 어찌 감히 안전하기를 바라리오? 내가 대종교를 받든지 8년에 이제야 비로소 이땅에서 단의(檀儀)를 받들게 되니 지극한 원을 마치얻도다."

하시니 그 말씀이 정답고 화기가 얼굴에 가득하였다.

말씀을 마친 대종사는 사당 옆 언덕에 올라서 북쪽과 남쪽을 향해 망배한 후 곧 수도실로 들어가시어 "자금일 삼오 3시위시 3일간 절식수도 절물개 차문(自今日 上午 三時爲始 三日間 絶食修道 切勿開 此門)"의 21자를 써서 문중 방(榜)에 붙이고 안으로 방문을 잠근 뒤에는 먹 가는 소리 밖에 들리지 않았다. 지금부터 3일간 절식을 하면서 기도를 할터이니 일체 문을 열지 말라는 뜻이었다.

시자들은 전에도 절식수도하는 일이 자주 있었으므로 전례로 알고 모두 숲 사이로 또는 개울가로 산책하다가 날이 저물어서 돌아왔다. 이날 당직이 엄주천ㆍ안영중 두 사람인데 저녁 10시경에 수도실에 나아가서 그때까지 종이 떠는 소리와 먹가는 소리가 들렸다. 

익 16일 상오 5시경 겹친 피로에서 깨어난 시자들은 늦잠잔 것을 걱정들 하면서 수도실에 나아가니 고요하고 아무 동정이 없거늘 의아하게 생각하고 "선생님" 하고 네 번이나 불렀으나 응답이 없는지라 불안한 예감에 급히 문을 떼고 들어가보니 대종사께서 미소를 띄운 얼굴로 손ㆍ발을 펴시고 반듯하게 누우시어 조천(朝天)하신지 이미 오랬고 책상에는 여러 개의 봉한 글월과 봉하지 않은 유서 두 장이 있었다.

이날 대종사의 조천 연락을 듣고 안악주재 일본헌병대장이 검시차로 의사를 동반하고 왔었는데 검시를 마친 그 의사가 말하기를 "사인이 없는 사망이라 가위 성사(聖死)라 하겠고 범인(凡人)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라"고 하면서 경의를 표하고 갔다. (주석 8)

 
나철 선생이 딸에게 남긴 유서(전남 보성 발교읍 '나철 선생 기념관' 게시 사진)
 나철 선생이 딸에게 남긴 유서(전남 보성 발교읍 "나철 선생 기념관" 게시 사진)
ⓒ 나철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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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철은 54세이던 1916년 8월 15일(음) 구월산 삼성사에서 대종교 고유의 제천의식인 단의식(檀儀式)을 거행하고 유서를 통해 교통(敎統)을 김교헌에게 전수하고 순명(殉命)하였다. 대종교를 중광한지 8년만이다. 이 기간 국내외에 신도가 30만에 이르렀지만, 일제의 말살정책에 맞서 순명한 것이다. 그의 죽음은 순명이고 순교이고 순국에 속한다.

그는 순교에 앞서 「순명 33조」와 무원(無園) 김교헌에게 교통을 이어받으라는 「무원종사에게 보낸 유서」, 비밀리에 교도들에게 주는 「밀유(密諭)」, 「공경히 교인들에게 고하는 글」, 「장사 지내는 일에 대한 경계말씀」, 그리고 「조선총독 데라우찌에게 주는 글」과 「일본 총리 오쿠가마에게 주는 글」등을 유서로 남겼다. 
  
눈 쌓인 대종교 3대종사 묘소. 왼쪽부터 서일, 나철, 김교헌 대종사
 눈 쌓인 대종교 3대종사 묘소. 왼쪽부터 서일, 나철, 김교헌 대종사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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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순명 3조(殉命三條)」이다. 

   순명 3조(殉命三條)

1. 나는 죄가 무겁고 덕이 없어서 능히 한배님의 큰 도를 빛내지 못하며 능히 한겨레의 망하게 됨을 건지지 못하고 도리어 오늘의 없수임을 받는지라. 이에 한오리 목숨을 끊음은 대종교를 위하여 죽는 것이다.

2. 내가 대종교를 받든지 여덟 해에 빌고 원하는 대로 한얼의 사랑과 도움을 여러 번 입어서 장차 뭇 사람을 구원할 듯 하더니 마침내 정성이 적어서 갸륵하신 은혜를 만에 하나도 갚지 못할지라 이에 한오리 목숨을 끊음은 한배님을 위하여 죽는 것이다.

3. 내가 이제 온천하에 많은 동포가 가달길에서 떨어지는 이들의 죄를 대신으로 받을지라 이에 한오리 목숨을 끊음은 천하를 위하여 죽는 것이다. (주석 9)

 
평화공원을 내려다 보고있는 '독립운동의 아버지 홍암 나철 동상'
▲ 평화공원을 내려다 보고있는 "독립운동의 아버지 홍암 나철 동상" 평화공원을 내려다 보고있는 "독립운동의 아버지 홍암 나철 동상"
ⓒ 장래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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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김교헌에게 뒤를 이어 대종교의 책임을 맡아달라는 유서다.

무원종사(茂園宗師)에게 보낸 유서

보화당(普和堂) 보시오. 아사달 한배님 오르신 곳에 들여와서 이 세상을 위하여 이 백성을 위하여 한번 죽기를 판단하니 죽음은 진실로 영광이로되 다만 다시 만나서 즐거워함을 얻지 못하고 천고(千古)의 이별을 지으니 보통 인정으로서 헤아리면 혹시 섭섭할듯하나 죽음에 다달아서 한번 생각 하건데 선생의 지신 짐이 매우 무겁고 크오니 오직 힘써 밤을 더 하시와 이 세상에 복이 되며 이 백성을 다행하게 하소서. 

몇가지 서류는 아래 적은 대로 거두시오. 큰 길의 편하게 닦음을 길게 기리며 널리 베푸시고 크게 건지심을 정성껏 비나이다. (주석 10)


주석
8> 앞의 책, 200~202쪽.
9> 강수원, 앞의 책, 235쪽.
10> 앞의 책, 234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민족의 선각 홍암 나철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국난기와 국망기에 온몸을 바쳐 구국과 독립을 위해 나섰는데, 역사가 제대로 평가하지 않고 국민에게 잊혀진다면 어찌 건강한 사회라 할 것이며, 그것은 누구의 책임일까?
태그:#나철, #나철평전, #홍암, #홍암나철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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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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