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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 청사 전경. 1926년 경복궁 내에 준공된 조선총독부 신청사의 모습이다. 

(본 저작물은 '서울역사박물관'이 공공누리 제1유형으로 개방한 것을 이용했으며, 해당 저작물은 museum.seoul.go.kr에서 무료로 다운받으실 수 있습니다.)
 조선총독부 청사 전경. 1926년 경복궁 내에 준공된 조선총독부 신청사의 모습이다. (본 저작물은 "서울역사박물관"이 공공누리 제1유형으로 개방한 것을 이용했으며, 해당 저작물은 museum.seoul.go.kr에서 무료로 다운받으실 수 있습니다.)
ⓒ 서울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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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독부는 나철이 만주에서 활동하고 있을 때 1915년 8월 15일 총독부령 제83호로 이른바 '포교규칙'을 발표하고 국내 종교에 대한 통제를 더욱 강화하였다.

유교ㆍ불교ㆍ기독교만을 공인 종교로 인정하고 대종교와 천도교 등 민족종교는 종교가 아닌 '유사 종교단체'로 분리시켰다. 그리고 악명 높은 경무국에서 직접 관리하도록 조처하였다. 대종교를 독립운동단체로 규정하고, 경무국의 관리체제로 묶은 것이다. 

나철이 국내를 빠져나가 만주에서 활동한 사실이 드러나 총독부가 국내에 남아 있는 남도교구 등을 말살하고자 짜낸 술책이었다. 또한 갖은 탄압에도 불구하고 불과 수년 만에 대종교는 국내외 교도 30만 명을 헤아리는 세력의 확장이 그만큼 두려웠던 것이다. 

총독부 측은 고의적으로 일반 유사종단으로 보아오던 군소 신앙단체는 모두 서류를 접수하고 오직 대종교만은 신교가 아니라는 이유로 신청서류를 각하할 뿐 아니라 교내외 활동을 못하게함은 물론 심지어 대종사(나철)의 수도행까지 저지하는 한편 구속한다고 협박해왔다. (주석 1)

국내의 소식을 접한 나철은 1915년 1월 14일(음) 서울로 돌아왔다. 그리고 12월 21일 '신교포교 규칙'에 준한 신청서를 총독부에 제출케하였다. 여타 종교들처럼 종교단체로 인정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총독부는 다른 모든 종교단체의 신청을 접수하면서 대종교만은 접수를 거부하였다. 대종교를 끝내 종교단체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일종의 선전포고였다. 

대종교의 포교운동이 국내에서 그 본거지를 옮겨 만주ㆍ중국ㆍ노령 등지에서 30만 교도를 옹하고 독립운동과 함께 눈부시게 전개됨을 본 일정(日政)은 대경실색하여 이에 대(對) 대종교 정책에 고심하던 끝에 마침내는 폐교처분할 것을 결정하고 이를 합법화하기 위한 방안으로 개천 4372년 을묘(서기 1915년) 8월 15일에 이른바 조선총독부령 제83호로 종교통제안을 공포하였다. (주석 2)

나철은 다시 한 번 결단의 시기를 맞았다. 그의 심중에는 신명을 바쳐서라도 대종교의 정맥을 잇고, 이를 통해 독립운동을 확산시키겠다는 뜨거운 열정이 치솟았다. 길은 찾았으나 사방이 꽉 막혀 있었다. 포교활동은 철저히 차단되었다. 

총독부는 1916년 4월 대구에 처음으로 일본 신사(神社)를 세우고, 이후 전국 각지에 신사가 세워졌다. 6월에는 조선왕궁인 경복궁에서 조선총독부 청사 기공식이 열렸다. 이들 사건은 민족종교 대종교를 이끄는 대종사(大倧師)의 신분으로서는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치욕이었다.

1909년 6월 11일에 지었던 시조 「단단조(檀檀調)」를 다시 되새기며 자신이 가야할 길을 모색하였다. 1절과 7절을 소개한다. 

 백두산 돌아드니 단군 위업이 아닌가
 잃은 강토 찾아내고 죽은 인민 살리랴면
 아마도 단군 후예로 일체 단단(檀檀).

 형제들아 자매들아 배달 겨레 모든 인중
 우리 형제 자매들아 함께 지성으로 
 일심하여 빛내보세 빛내보세
 태황조의 베픈 신교(神敎) 빛내보세. (주석 3)


기회를 노리던 일제는 날이 갈수록 "대종교는 종교유사단체"라 몰아 대대적인 박해를 가하기 시작했다.

집회ㆍ설당(設堂)에 대한 불허는 물론이오 "대종교인의 자유가 없다"하고 교주 이하 주요 간부의 사생활과 출입거처를 물샐 틈 없이 감시하고 또 헌병ㆍ경찰을 미행시켜 자유를 속박하는가하면 교도들의 가두검색이 극심하였고, 특히 쟁송(爭訟)이 있을 시는 대종교인은 불문곡직하고 패소처분하는 학대를 자행하였다. (주석 4)
  
서울시 종로구 사직동의 단군성전에서 찍은 단군상.
 서울시 종로구 사직동의 단군성전에서 찍은 단군상.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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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경술년 병탄 이전부터 대종교를 사갈시하였다.

"대종교는 국조 단군을 숭봉하는 교단으로 민족의식을 환기하고 일정에 반발하며 대중으로 하여금 대일적개심을 고취하고 민족적 혈통을 고수하야 국권회복의 선봉기수"라고 낙인하였다.

일제의 대종교 해체설이 비등할 때 일본에서 발행된 『태양』이란 잡지가 이에 대한 논설을 실었다. 일본인들도 불법무도함을 알고 있었다.

대종교는 그 제창된 것이 오래 전 일이요 그 나라에 있어서는 가장 오래된 고교(古敎)라 하겠고 또 그 신도가 많다고하나 수중에 촌철이 없으니 설사 불쾌한 행동이 있다고 하더라도 두려워할 것이 아니오 또 그때 해산하여도 늦지 않거늘 구태여 이제 강제로 해산시켜 종교에 간섭하였다는 원망과 비방을 들을 것이 없다. (주석 5)


주석
1> 『대종교 60년사』, 185쪽.
2> 앞의 책, 186쪽.
3> 앞의 책, 15 1~159쪽.
4> 앞의 책, 181쪽.
5> 앞의 책, 180쪽, 재인용.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민족의 선각 홍암 나철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국난기와 국망기에 온몸을 바쳐 구국과 독립을 위해 나섰는데, 역사가 제대로 평가하지 않고 국민에게 잊혀진다면 어찌 건강한 사회라 할 것이며, 그것은 누구의 책임일까?
태그:#나철, #나철평전, #홍암, #홍암나철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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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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