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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을 강점한 일제는 물샐 틈 없는 법망과 전국에 깔린 헌병ㆍ순사들의 감시를 통해 조선인들을 옴싹달싹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일제는 1912년 총독부령 제40호로 '경찰범처벌규칙'을 만들었다. 사소한 정치적 언동에서부터 일상적인 생활과 정당한 권리마져도 억압하는 등 식민통치를 위해 물샐 틈 없이 거미줄을 쳐 놓은 것이 '경찰범처벌규칙'이다. 이른바 '거미줄법'인 것이다.

이 법령은 항일운동가는 물론 일반인의 행동까지 규제하는 철저한 식민통치 억압법령으로서 일선 경찰(순사)이 한국인의 모든 행동규범을 간섭ㆍ규제하고, 생트집을 잡아서 벌금과 매질로 다스리도록 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1916년 별세하기 직전의 나철 선생.
 1916년 별세하기 직전의 나철 선생.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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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에 우는 아기의 울음도 멈추게 만든 "순사 온다"라는 말은 이 법령과 같은 심한 규제에서 연유된 것이다. 단 2개 조항으로 되어있는 '경찰범처벌규칙'의 제1조는 "다음 각 호의 1에 해당하는 자는 구류 또는 과료에 처한다"고 하여 무려 87개 항목을 제시하였다. 

총독부는 1912년 3월 조선민사령ㆍ형사령ㆍ태형령ㆍ감옥령을 잇따라 공포하고 '전국민의 죄수화'와 '전국토의 감옥화'를 방불케 하였다. 전국 형무소 재소자는 1913년 현재 3,611,831명, 1914년 3,546,522명, 1915년 3,765,310명이었다.(조선총독부, 『통계연보』)

1912년 8월에는 토지조사령과 시행규칙을 공포하여 농민들의 땅을 빼앗았다. 1918년까지 계속된 총독부의 토지조사사업의 결과 이제까지 실제로 토지를 소유해왔던 수백만의 농민이 토지에 대한 권리를 빼앗기고 영세소작인ㆍ화전민 또는 저임금노동자로 전락하는 민족적 비극을 맞게되었다. 1914년 3월에는 별도로 지세령(地稅令)을 공포하여 영세농민들의 지세를 늘려 "식민지배에 필요한 비용을 식민지에서 조달한다"는 수탈책을 강화하였다.
  
눈 쌓인 대종교 3대종사 묘소. 왼쪽부터 서일, 나철, 김교헌 대종사
 눈 쌓인 대종교 3대종사 묘소. 왼쪽부터 서일, 나철, 김교헌 대종사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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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신민회사건'을 조작하여 각계의 지식층과 유력인사 600여 명을 검거하고, 투옥자들의 사상전향을 강요하며 지독한 고문으로 목숨을 잃거나 다수가 불구자가 되었다.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많은 민족주의자들이 해외로 망명하였다. 

나철은 결단의 순간을 맞았다.

국내에서는 더 이상 대종교의 포교활동과 민족운동을 전개할 공간이 없었다. 감시와 탄압도 가중되었다. 1914년 5월 13일(음) 은밀히 서울을 떠났다. 그리고 백두산 아래의 동만주 화룡현 청파호에 대종교 총본사를 이전하고 항일투쟁의 본거지로 삼았다. 거점을 마련한 직후 먼저 포교를 위한 교구개편을 단행하였다.

교구를 나누어 설치할 때에도 백두산을 중심으로 하는 한반도와 만주 등 고대 한국의 강역(疆域) 전체를 동서남북으로 나누어 4도교구로 하였다.

 동도교구 - 동만주일대와 노령 연해주지방
 서도교구 - 남만주에서 중국 산해관까지
 남도교구 - 한반도전역
 북도교구 - 북만주일대 

로 구분하여 중국관내와 일본 구미지방은 외도교구로 하였다. 대종교는 한반도만의 회복, 포교에 그치지 않고 실로 고대한국의 강역 즉 한반도는 물론 만주지역까지 광복과 포교의 중심지로 했던 것이다. 대종교의 포교와 독립운동이라는 두 가지의 고차원적 의미가 있던 점을 재평가해야 하겠다. (주석 1)


백두산 기슭에 총본사의 둥지를 틀고 새로운 교구개편은 대종교의 교세확장은 물론 이후 해외 독립운동의 전진기지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교구 설정은 교세의 광역적 확산은 물론 해외 독립운동 특히 중국ㆍ만주지역에서 독립운동 거점 마련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교구는 사실상 독립운동기지나 다름이 없었다." (주석 2)


주석
1> 강수원, 『우리 배달겨레와 대종교역사』, 228쪽.
2> 김동환, 앞의 책, 91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민족의 선각 홍암 나철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국난기와 국망기에 온몸을 바쳐 구국과 독립을 위해 나섰는데, 역사가 제대로 평가하지 않고 국민에게 잊혀진다면 어찌 건강한 사회라 할 것이며, 그것은 누구의 책임일까?
태그:#나철, #나철평전, #홍암, #홍암나철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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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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