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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기사(쌀 때문에 태어난 군산항 그리고 '뜬 다리 부두')에서 이어집니다.

째보선창과 쌀이 없는 동네

뜬 다리 부두가 있었던 곳 인근이 째보선창(죽성포구)이다. 이곳이 군산 원류라 생각된다. 1908년에 개통된 전군가도(全郡街道)가 와 닿은 곳도 이곳 째보선창이다. 1912년 개통된 익산∼군산 간 철도가 이곳 째보선창을 지나 그 끝이 가 닿은 곳이 군산 내항이다. 째보선창 북서쪽 바닷가에 뜬 다리 부두가 들어선다. 해망동이다. 소설 <아리랑>에서 째보선창을 묘사한 부분이다.
 
째보선창은 묘하게도 땅이 양쪽으로 찢어지듯 갈라지듯 하면서 바다와 맞닿아 있어서 배들을 대기가 아주 좋았다. 그래서 옛날부터 선창이 되었고, 날마다 작은 배들이 바글거렸다. 배들이 많이 모여드니까 자연히 객주집들이 많아지게 되고, 일거리를 찾아 막일꾼들이 언제나 북적거렸다. 
  
선창에 정박한 어선들이 휘날리는 오색깃발의 모습에서 한때 번성했던 포구 모습을 회상할 수 있다. 물길이 뭍으로 길게 파고든 곳에 포구가 있었다. 지금은 복개되어 옛 모습을 찾을 수가 없다.
▲ 1960년대 째보선창 선창에 정박한 어선들이 휘날리는 오색깃발의 모습에서 한때 번성했던 포구 모습을 회상할 수 있다. 물길이 뭍으로 길게 파고든 곳에 포구가 있었다. 지금은 복개되어 옛 모습을 찾을 수가 없다.
ⓒ 임성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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째보선창이 있던 포구는 복개되어 지금은 흔적도 없다. 군산은 이곳 째보선창에서 시작했다. 군산을 항구로 이름지어준 곳도 이곳 째보선창이다. 한국전쟁 때,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목선을 빌려 피난길에 오른다. 곳곳에 무너지고 깨어져나간 삶들이 째보선창 펄에 묻힌다. 째보선창은 군산 사람들에게 그런 곳이다.

째보선창과 더불어 '쌀을 보관하는 동네' 장미동(藏米洞)이 수탈의 상징이다. 지금 해망동이다. 소설 <아리랑>에서 수국이가 쌀을 선별하던 미선소가 있던 곳도 장미동 부근이다. 수국 가족이 겪은 기구한 삶은 당시 군산, 나아가 이리저리 빼앗김만을 당해야 했던 조선의 모습을 닮아있다. 소설 <탁류>에서 초봉이가 겪었던 삶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사진 좌측 중상단이 개복동이다. 초가집으로 추정되는 작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모습이, 수탈과 착취에 허덕이던 당시 조선 백성들의 실상을 웅변하고 있다. 그 앞으로 곧게 뻗은 도로와 넓은 집들이 보이는 곳이 일본인들이 살던 곳이다.
▲ 1920년대 군산 시가지 모습 사진 좌측 중상단이 개복동이다. 초가집으로 추정되는 작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모습이, 수탈과 착취에 허덕이던 당시 조선 백성들의 실상을 웅변하고 있다. 그 앞으로 곧게 뻗은 도로와 넓은 집들이 보이는 곳이 일본인들이 살던 곳이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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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항을 통해 호남평야 쌀이 일본으로 실려 나간다. 이 모든 게 뜬 다리 부두 때문이다. 시인 고은은 절규하듯 말한다. 군산을 있게 한 뜬 다리 부두가 1930년대 조선인들에게 "군산과 그 인근 고장을 '쌀이 없는 고장'으로 만들어 버린다. '쌀의 마을'과 '쌀이 없는 마을'을 동시에 체험하게 했다"는 것이다. 악랄한 수탈의 상징이다.

1930년대 군산에서 쌀이 있는 마을은 해망(장미)동, 신흥동, 월명동 등 주로 일본인들 거주지였다. 쌀이 없는 마을은 너른 징게멩게를 비롯하여, <탁류>에서 초봉이네가 살던 개복동을 비롯한 높은 산골짜기 조선인들이 사는 허름한 동네다.

1909년 조선에서 생산된 쌀의 30%가 군산항을 통해 빠져나간다. 1934년엔 전국 총 생산량의 50%에 육박하는, 200만 석이 실려 나간다. 말 그대로, 헐벗고 굶주린 조선백성들의 피와 땀을 헐값에 빼앗겨버린 것이다. 조선 사람들의 몸부림과 아우성이 이곳 뜬 다리 부두에서 곡성(哭聲)으로 들려온다.

근대 유산의 역설이 희망이 되어 주길

군산은 유독 일제식민지 유산이 많이 남아있는 도시다. 이는 항구 운명과 궤를 같이한다. 군산항은 1960년대 중반을 전후하여 국제무역항으로서 기능이 급격히 쇠퇴한다. 항로에 쌓인 퇴적토 때문이다.

뜬 다리 부두도 한계가 있었다. 타 지역 항만이 대규모 허브(Hub) 항만으로 번성하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항만으로써 기능상실이 원인이다. 여기에 1990년 금강하구를 둑으로 막아버리면서 항로 퇴적은 그 속도를 더한다. 이음이 아닌 단절을 가속화 시킨 재앙이다. 물의 흐름이 막힌 까닭이다.

금강 하굿둑을 지금 상태로 지속하여 존치할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할 시기에 이르렀다. 임계점에 다다른 느낌이다. 금강만의 문제는 아니다. 낙동강, 영산강도 마찬가지다. 이제라도 다시 이어주어야 한다. 지금이야 외항을 건설해 대규모 선박 접안이 가능하다지만, 그때는 그렇지 못했다. 따라서 토지이용 효율이나 고도화, 도시 변화 속도가 상대적으로 더뎠다.

자본이 군산으로 새로운 눈길을 보내지 않는다. 물길이 막히니 돈 길도 막힌다. 하굿둑 주변 금강호 휴게소 한 구석에 서 있는 이광웅 시인의 시비가 모든 것을 말하고 있다. 모든 것을 바꿔 내려면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한다고.

느린 변화와 더딘 발전이 군산에 상대적으로 옛 문물(건축물이나 가옥 등)이 훼손당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이유가 되었다. 역설이다. 서글픈 군산의 과거이자 현실이다. 흐름을 거슬러 움직였던 과거가 현재에서 또 다시 거슬러 움직이길 기대한다. 우리에게 아픔을 줬던 유산들이 훌륭한 관광자원으로 발돋움하여, 군산에 새로운 활력과 보물이 되어주기를 기대한다.
  
뜬 다리 부두 인근에 있는 옛 조선은행 군산지점이다. 수탈의 상징이다. 한때 민간인 소유로 여러 용도로 쓰이다, 지금은 군산근대건축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 옛 조선은행 군산지점 뜬 다리 부두 인근에 있는 옛 조선은행 군산지점이다. 수탈의 상징이다. 한때 민간인 소유로 여러 용도로 쓰이다, 지금은 군산근대건축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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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행과 더불어 식민지 수탈을 상징하는 건축물 중 하나다. 유흥음식점 및 가구점 등으로 쓰이던 수리하기 전 모습이다.
▲ 수리하기 전 일본18은행 조선은행과 더불어 식민지 수탈을 상징하는 건축물 중 하나다. 유흥음식점 및 가구점 등으로 쓰이던 수리하기 전 모습이다.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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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류>에서 초봉이 남편이 된 고태수가 다니던 은행이, 일제가 군산에 설립한 조선은행이다. 초봉이 아버지 정 주사가 미두장(米豆, 미곡 거래에서 실물이 아닌 시세 등락을 이용해 약속만으로 매매하는 투기행위)에서 돈을 잃고 젊은이에게 멱살을 잡힌 곳도 이곳 조선은행 인근이다. 조선은행은 일본18은행과 더불어 수탈 전진기지라는 식민지 폐단을 군산에 이식한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항구 주변에 당시로서는 대규모 세관을 두었다는 것은, 그 만큼 물류흐름이 번성했다는 반증이다. 일제가 이곳 세관을 통해 조선 땅에서 수탈한 물자를 일본으로 내 보내는 통로로 활용하였다. 지금은 유물과 자료 전시관 등으로 활용하고 있다.
▲ 옛 군산세관 항구 주변에 당시로서는 대규모 세관을 두었다는 것은, 그 만큼 물류흐름이 번성했다는 반증이다. 일제가 이곳 세관을 통해 조선 땅에서 수탈한 물자를 일본으로 내 보내는 통로로 활용하였다. 지금은 유물과 자료 전시관 등으로 활용하고 있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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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세관은 서울역사(驛舍), 한국은행과 더불어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서양 고전주의 3대 건축물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빈번하고 번잡했을 물류 흐름이 옛 세관건물에서 고스란히 읽힌다. 
 
해망동과 군산시가지 중심부를 신속하게 잇던, 일제의 필요에 의해 건설된 2차선 터널이다. 지금은 보행자 전용으로만 사용되고 있다.
▲ 해망굴 해망동과 군산시가지 중심부를 신속하게 잇던, 일제의 필요에 의해 건설된 2차선 터널이다. 지금은 보행자 전용으로만 사용되고 있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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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에서 포목점 등을 운영하며 많은 부를 축적, 군산 상권을 쥐락펴락하던 일본인 상인 히로쓰라는 자가 살던 가옥이다. 대체로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어 드라마나 영화의 촬영지로도 쓰이곤 한다. 촬영 당시는 코로나19로 출입이 폐쇄되어 있었다.
▲ 히로쓰 가옥 입구 군산에서 포목점 등을 운영하며 많은 부를 축적, 군산 상권을 쥐락펴락하던 일본인 상인 히로쓰라는 자가 살던 가옥이다. 대체로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어 드라마나 영화의 촬영지로도 쓰이곤 한다. 촬영 당시는 코로나19로 출입이 폐쇄되어 있었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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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망굴은 신속한 물자수송, 해망동과 군산 도심을 연결하고자 일제가 만든 터널이다. 지금은 차량통행을 금시키고 보행자 전용으로 사용 중이다. 신흥동에 있는 히로쓰 가옥은 여러 드라마나 영화촬영지로 유명하다.

히로쓰는 포목점을 운영하며 군산 상권을 좌지우지하던 자다. 군산 주변엔 조선 농민을 수탈하던 대농장주들 호화 가옥도 몇 개 있다. 일제 강점기 일본가옥을 그대로 보존하여 관광·문화상품으로 활용 중이다.
 
군산에 있는 일본식 사찰이다. 높은 지붕과 급경사의 물매가 습도가 높고 통풍이 필요했던 일본건축물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시인 고은이 젊은 시절 이곳 동국사에서 중이 되려고 수행하기도 했다.
▲ 동국사 군산에 있는 일본식 사찰이다. 높은 지붕과 급경사의 물매가 습도가 높고 통풍이 필요했던 일본건축물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시인 고은이 젊은 시절 이곳 동국사에서 중이 되려고 수행하기도 했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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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사는 일본식 사찰이다. 건물 평면이나 지붕모양이 습도가 높은 일본 기후와 지형에 맞게 지어진 사찰이다. 이곳에서 시인 고은이 젊은 승려로 잠시 몸담기도 했다.

신음하는 군산

군산은 쇠락으로 신음하고 있다. 얼마 전 큰 자동차 회사가 문을 닫았다. 그곳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은 하루아침에 거리로 내몰렸다. 경영의 실패를 노동자들이 실직으로 떠안았다. 바다 쪽을 막아 새로 만든 공업단지에서도 노동자의 아우성이 들려온다. 사업 철수와 구조조정이라는 차가운 자본 논리가 횡행한다. 노동자들은 일제강점기 때나 지금이나 갈 곳이 없다.

금강을 가로막은 하굿둑은, 강경이라는 걸출한 하항(河港)을 몰락시켰다. 더불어 군산 항구 기능도 급격히 쇠퇴시켜 버렸다. 항로에 토사가 쌓였기 때문이다. 기수역(汽水域, 강물과 바닷물이 섞이는 곳. 염도가 낮아 생물다양성이 풍부하여 다양한 어류자원이 서식)에 살던 수많은 종류의 물고기들과 갯벌 생물들이 사라져 갔다. 물의 흐름이 막힌 까닭이다.

부안과 군산을 이어 막은 새만금은, 썩어가는 물로 신음 중이다. 특히 만경 수역이 극심하다. 바닷물을 다시 들여보내자는 아우성이 하늘에 가 닿고 있다. 갯벌이 죽은 지는 이미 오래 전이다. 뜬 다리 부두로 쌀을 수탈당하던 고장에서, 지금은 걸출한 외항을 갖췄음에도 자본과 기술, 환경과 인권을 두루 수탈당하는 도시가 되어 있다. 서글픈 현실이다.

군산은 항구가 되게 한 뜬 다리 부두에서 말미암았다. 뜬 다리 부두로 도시가 번성했고, 일제의 쌀 수탈기지가 되었다. 조선 사람들은 고통으로 몸부림쳤다. 뜬 다리 부두로 인해, 군산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수많은 비극이 잉태되고 삶의 애환이 생겨났으며, 인권이 유린당하고 끈끈한 민족정신과 저항정신이 발현되기도 했다.

뜬 다리 부두의 쇠락으로 도시에 여러 근대유산이 남게 되는 역설도 생겨난다. 그런 유산들이 지금은 훌륭한 관광 상품이 되어있다. 문학이 탄생했고 많은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뜬 다리 부두를 빼고서 군산을 얘기 할 순 없다.

덧붙이는 글 | 오래된 사진 자료를 구하는데 큰 도움을 주신 오마이뉴스 조종안 기자님께 특별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태그:#군산뜬다리부두, #군산근대건축물_유산, #금강 하굿둑, #새만금, #기술노동환경인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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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레 타인과 소통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래도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소통하는 그런 일들을 찾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보다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서로 교감하면서,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풍성해지는 삶을 같이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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