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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회인의 일본 유학시절. 뒷줄 가운데가 양회인
 양회인의 일본 유학시절. 뒷줄 가운데가 양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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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이 동명지서 앞 파란 대문이요." "예? 무슨 말씀인지..." "큼큼. 그냥 그렇다고."

1949년. 전남경찰국 사찰과장은 그렇게 말하며 뒤돌아섰다. 기작현(양회인의 부인)은 사찰과장의 말을 금세 잊었다. 다음 날 집안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기작현이 이 일을 전하자 "아이고 아주머니, 그 말귀도 못 알아들었소! 쯧쯧"이라는 말이 돌아왔다.

"뭔 말이라요?" "아, 그니께 형사가 자기 집으로 돈 갖고 오란 뜻 아니오." 그제서야 기작현은 자기 손바닥으로 무릎을 탁 쳤다. '아, 그게 뇌물 바치라는 소리였구나' 뒤늦게 이해한 그녀는 하는 수 없이 전남 화순군 도곡면 시골의 논밭을 팔아 3만 원을 장만했다.

4일 만에 사망한 남편

"이것 갖고 될까나?" "5만 원은 있어야 할 틴디요..."

하지만 기작현은 더이상 돈을 마련할 수 없었다. 남편 양회인은 툭하면 전남경찰국에 검거되어 이미 여러 차례 돈을 갖다 바쳤다. 때문에 그들 수중에는 팔 논밭이 남아 있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기작현은 어렵게 장만한 돈을 들고 전남경찰국에 갔다. 그녀가 사찰과장 책상 위에 슬쩍 돈봉투를 밀어넣자 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사찰과장은 모르는 척하며 "아, 아줌씨 오셨구만이라우. 양회인씨는 잘 있응께 걱정 마이소"라며 친절하게 대했다.
 
양회인 부부  뒷줄 오른쪽이 양회인, 앞이 아내 기작현.
▲ 양회인 부부  뒷줄 오른쪽이 양회인, 앞이 아내 기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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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다음날 기작현의 집으로 전남경찰국 사찰과 형사들이 찾아왔다. 형사들 얼굴 빛은 어제와는 180도 달라져 있었다. 이번에는 사찰과 형사들이 거꾸로 돈봉투를 기씨에게 내밀었다. "이것 갖고 전남대병원 영안실로 가 보시오." 그녀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어찌됐든 그녀는 돈봉투를 집어들고 전남대병원 영안실에 갔다. 영안실을 관리하던 사람이 관뚜껑을 열더니 "당신 신랑 맞소?"라고 물었고, "아이고, 여보"라는 소리와 동시에 기작현의 입에서 곡이 터져나왔다. 영안실 관계자는 그녀를 밀치고는 관에 못질을 했다. "언능 시체 가져 가소." 양회인이 전남경찰국 사찰과 형사 서너 명에게 연행된 지 4일 만의 일이었다.

혼자서 관을 옮길 수 없었던 그녀는 화순군 시골집까지 걸어가 집안 일꾼과 함께 전남대병원으로 다시 왔다. 기작현은 관을 지게에 얹고 가는 일꾼을 뒤따르며 내내 곡을 했다.

장례를 치르고 난 후 기작현이 돈봉투를 열어보니 2만 원이 들어있었다. 전남경찰국에서 양회인을 취조하다가 고문으로 죽여 놓고, 일말의 양심인지 뇌물 일부를 돌려준 것이다. 3만 원 중 1만 원은 벌써 사용했고 나머지 2만 원을 돌려줬다.

양회인은 1949년 8월 25일 광주시 충장로 1가에 있었던 전남경찰국에서 고문치사했다. 그로부터 20년 후에야 아들 양득승은 아버지를 선산으로 이장할 수 있었다.

화순탄광 노동자들에게 사랑방을 내주다

"부의장님, 안녕하신게라?" "어이, 위원장 오셨는가. 어여 사랑방에 가서 회의하소."

전남 화순군 도곡면 월곡리 양회인 집으로 7, 8명의 화순탄광 노동자들이 모여들었다. 미군정이 노동조합을 전면 탄압하자 대처방안을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미군정은 노동조합 간부를 '빨갱이' 취급했기에 회의를 아무 데서나 할 수 없었다.

안전한 곳을 찾다 보니 전남 민주주의민족전선 부의장인 양회인의 집이 선택되었다. 양회인은 해방 직후 조직된 전남 화순군 도곡면 인민위원장을 역임했고 1946년 6월 1일 전남 민주주의민족전선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그는 화순탄광 노동자들의 자주관리운동에 적극 협력했다.

1945년 해방 직후 전남 화순에 있던 화순탄광은 당시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탄광이었다. 일본인들이 물러간 후 탄광에는 노동자들로 구성된 자치위원회가 만들어졌다. 일제강점기에 탄광이 일본인의 소유였다면, 해방 후에는 무주공산이 되었다. 생산이 전면 중단되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이에 노동자들은 자치위원회를 구성, 탄광을 직접 운영했다. 위원회는 노동자들과 지역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는데, 생산성이 일제 때보다 오히려 높아졌다. 일제 때는 2500명이 한 달 동안 7만 8000톤가량 생산하던 것을 노동자자주관리 체제 하에서는 1300명이 무려 9만 1000톤을 생산했다. 

1945년 11월 초 남한에는 16개 산별노조에 728개 공장관리위원회가 구성됐는데 여기 소속된 노동자가 8만 8000명이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화순탄광이었다. 노동자 자주관리운동이 일어난 곳은 이전에 일본인 소유이거나 친일파들의 소유기업 들이었다.

하지만 미군정은 노동자 자주관리운동을 허용할 수 없었다. 1945년 11월 초 미군정은 화순탄광을 점령하고 서울에서 데려온 우익인사를 소장으로 앉혔다. 노동조합 간부에겐 24시간 이내에 떠나라고 통보한 뒤 임금투쟁이나 파업을 벌이면 5년 형에 처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러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노동조합 간부 3명을 포함, 노동자 100명을 해고했다.

화순탄광 노동자들은 미군정에 저항했다. 1946년 2월 전 종업원대회를 열어 소장독재 배격, 최저 생활임금 확보, 해직자 복직 등을 내걸고 투쟁했다. 8월 15일에는 1000여 명의 노동자들이 광주에서 개최된 해방 1주년 기념식에 참석, 미군정의 정책 실패로 야기된 식량난을 비판하고 '더 많은 쌀 배급'과 '완전 독립'을 요구하다가 너릿재에서 미군정에 의해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손호철, 「화순탄광 노동자들의 자주관리운동」)

이 와중에 화순탄광 노동조합 위원장 유몽룡과 간부들은 양회인 집에서 회의를 하며 활동방침을 논의했던 것이다.

소작인들에게 무상으로 토지를 나눠주다

양회인(1909년생)의 아내가 돈 3만 원을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한 일은 예전같았으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양회인은 천석꾼의 자식으로, 화순군 도곡면에서 양회인의 땅을 밟지 않고는 지나갈 수 없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물론 양회인이 도곡면 인민위원장과 전남 민주주의민족전선 부의장을 하며 여섯 차례 검거되면서, 그를 빼내기 위해 경찰에 돈을 많이 갖다주기는 했다. 하지만 양회인의 곳간을 텅 비게 만든 주요 원인은 다른 데 있었다. 

그 이유는 양회인이 소작인들에게 토지를 무상으로 나눠주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부터 사회주의에 눈을 뜬 양회인은 해방이 되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자기 재산 대부분을 소작인들에게 무상으로 주었던 것이다. 

양회인은 능주국민학교를 나와 광주고등보통학교에 들어갔다. 하지만 '독서회사건'으로 퇴학 당하고 전북 고창에 있던 고모부의 도움으로 '고창고보'에 편입학한다. 후에 일본 와세다대학으로 유학한 양회인은 사회주의에 눈을 뜬다.

양회인이 전남경찰국 사찰과 형사들의 검거에 시달릴 때, 그의 아들 양득승 역시 경찰의 수배를 받고 있었다. 양득승(1929년생)은 전남 화순군 도곡면 북정초등학교(현재 수창초등학교)를 나와 광주서중을 다녔다. 1946년에 광주서중을 졸업한 그는 동국대학교에 입학했고, 이때부터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양득승은 종로경찰서에 연행된 것만도 여러 차례였고 경찰의 수배를 받기도 했다. 아버지 양회인이 전남경찰국에서 고문으로 사망했을 때 양득승은 전북 전주에 피신해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의 사망 사실도 나중에야 알았다.

화순군유격대 문화부중대 중대장

"동무를 도곡남초등학교 교장으로 임명합네다"라는 북한군 장교의 말에 참석자들의 박수 소리가 터졌다. 북한군 점령 시절 양득승은 초등학교 교장이라는 감투를 썼다. 그가 32세의 나이에 교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대학을 다녔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아버지 양회인이 경찰 고문으로 학살당했다는 것이 더 컸다. 

하지만 초등학교 교장 생활은 60일에 불과했다. 북한군이 물러가고 유엔군이 수복하자 양득승은 몸을 피해야 했다. 그는 화학산으로 입산해 화순군유격대 문화부중대 중대장을 맡았다. 중대원은 약 30명으로 화순군 도곡면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다가 1951년 초 즈음에 제2차 군경합동토벌작전에 검거돼 광주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 양득승이 포로수용소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어머니 기작현은 구명운동을 펼쳤다. 하지만 구명운동은 별 성과가 없었고 양득승은 사형을 구형 받은 후 최종적으로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는 인천소년형무소를 거쳐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만 11년 2개월의 감옥 생활 끝에 1962년에서야 세상 빛을 보게 되었다.

구순의 유족회장  

지난 11월 1일 경북 경주에서 열린 '한국전쟁기 민간인희생자 경주지역 합동위령제'에서 만난 양득승은 구순의 나이에도 목소리에 힘이 넘쳤다. 도저히 92세라고 믿겨지지 않았다.

2020년 현재에도 그는 여러 가지 직책을 맡고 있다. '광주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와 '민자통 광주·전남협의회', '범민련 광주·전남 연합회' 고문을 맡고 있다. 또 '한국전쟁민간인희생자유족회 광주·전남연합회' 회장을 맡고 있다.

그는 아버지의 명예회복을 볼 때까지 유족회 활동을 놓을 수 없다. 그가 청소년 시절부터 맺게 된 민주화운동의 연 또한 계속되고 있다. '건강하게 사는 길'과 '아름답게 사는 길'은 누구에게나 소중하다. 사회 변화를 꿈꾸는 양득승의 아름다운 마음이 지속되었으면 한다.
 
 증언자 양득승
 증언자 양득승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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