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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60년대 치과 전경(출처: 서울대 치의학 박물관 홈페이지)
 1950~60년대 치과 전경(출처: 서울대 치의학 박물관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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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7월 말경. 

"여기가 해남치과요?" "그라지라." "의료기기 판다는 소문을 듣고 왔는데요." "들어 오씨요." 오태장은 의료기기를 사러 온 손님을 데리고 치과로 들어갔다. "여기 왼갖 기기들이 있응께 둘러 보씨오."

김민서(가명)는 치과 안의 의료기기들을 둘러보았다. 기기들은 새 물건이었다. 해남치과가 개원한 지 1년 6개월밖에 되지 않았으니 새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치료용 의자는 물론이고 치과용 겸자인 포셉, 치과용 모루, 펜치 등이 깨끗이 보존되어 있었다. 특히 원심분리기와 풋엔진은 탐나는 물건이었다. 당시 치과 의료기기 중에 원심분리기와 풋엔진이 가장 비쌌다.

치과 의료기 팔아 보리쌀을 샀다

치과 개원을 준비하던 김민서는 의료기기가 탐났다. 당시 전남 해남군 해남읍에 유일한 치과병원인 해남치과가 폐업을 했으니 말이다. 폐업한 치과의 의료장비를 헐값에 구입하면 자신은 땅 짚고 헤엄치는 게 될 터였다. 그 치과에 얽힌 사연을 알고 있었던 김민서는 가격을 후려칠 심산이었다. 

"쭉 둘러보니 별로 필요한 게 없네요." "죄다 새 물건인데, 우짜코롬 필요한 게 없다하씨요..." "그러면 다른 사람한테 팔든지요." "아이고, 선상님. 그라지 말고 사람 하나 살리는 셈으로 이 물건들 좀 사주씨오."
"글쎄요. 난 별로 필요한 게 없긴 한데.... 아주머니 형편이 딱해서, 여기 있는 장비 전부 5만 원 쳐드리지요." "예?! 우리 집 이가 이 물건들 살 때 전부 500만 원(2020년 현재 약 5천만 원) 들었다고 했는데요."


그 말에 김민서는 "그럼 알아서 하시든가"라며 등을 돌렸다. 오태장은 화들짝 놀랐다. "아이고, 선상님. 그라지 마시구, 그냥 그 가격에 사 주씨소"라며 사정조로 애원했다. 김민서는 헛기침을 하며 마치 자신이 커다란 손해를 보는 듯 굴었다. 아무리 중고로 산다고 해도 지금 금액의 열 배는 들어갈 터인데 말이다. 

그렇게 김민서는 헐값에 치과 의료장비를 사들였다. 세상 물정을 몰랐던 오태장은 울자 겨자 먹기 식으로 남편이 운영한 치과의 의료기기를 처분했다. 그렇게 손에 쥔 5만 원으로 시장에서 보리쌀과 식재료를 구입했다. 그녀는 당분간 시부모와 자식들이 굶지 않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그렇다면 오태장의 남편이 운영하던 해남 읍내의 유일한 해남치과는 갑자기 왜 폐업했을까?

한 지붕 다섯 가족

며칠 전 해남군 해남읍 김응준의 집. "인민군 온당께요. 언능 피난 갑시다." 이웃집 남자의 말에도 김응준은 꿈쩍하지 않았다. 이번엔 김응준의 장남 김소철(당시 16세)이 재촉했다. "아버지, 얼릉 피난 가장께요." "일없다. 이럴 때일수록 집에 있어야 쓴다." 겁이 난 김소철은 후문으로 줄행랑을 쳤다.

바로 그때 인민군으로 보이는 청년 두 명이 김응준 집 정문으로 들이닥쳤다. 김응준이 세 들어 살던 집은 다세대 주택이었다. 전남 해남군 해남읍 남동리에 소재한 김종주의 주택은 다섯 가구가 모여 살았다. 집주인 김종주는 안채에 살았고, 김응준 가족은 사랑채에, 문간채와 후문채에 각각 다른 이가 살았다. 김응준이 운영하던 '해남치과'도 그 집 건물 안에 있었다. 

불청객 청년 둘의 손에는 소총이 쥐어져 있었다. "모두 마당으로 나오시오." 한 지붕 다섯 가족은 모두 마당으로 나왔다. 남동리 주민 대다수가 인근 야산으로 피난을 갔지만 이 집의 다섯 가족은 움직이지 않았다. 치과 원장 김응준이 피난을 가지 않으니 다른 세입자들도 따라 움직이지 않았다. '선상님이 어련히 알아서 하실라구'하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김응준의 부친 김봉수를 포함, 이십여 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총을 든 청년들은 그 중에서 젊은 남자 네 명을 별도로 세웠다. 잠시 후 "탕탕"하는 소리가 집을 뒤흔들었다. 애초에 누구인지, 왜 피난을 가지 않았는지에 대해 묻지 않았다. 젊은 남성에게 무조건 총부리를 들이댄 것이다.

해남치과 원장 김응준이 즉사했고, 후문채에 세 들어 살던 열다섯 살 이종국도 사망했다. 이종국은 김응준의 아들 김소철의 1년 후배였다. 집 뒷문에 있던 절구통에서 총소리를 들은 김소철은 무작정 산으로 뛰었다. 그날 저녁 황혼이 깃들 때가 돼서야 내려오니 마을 어귀에서 할아버지 김봉수가 넋이 나간 채 서 있었다. 손주를 본 김봉수는 "소철아, 니 애비가 죽었단다"라며 눈시울을 적셨다.

그렇게 삼삼오오 흩어져 해남읍 전역에서 피의 살육제를 벌인 이들은, 인민군이 아니라 '나주경찰부대'였다. 나주경찰부대 약 100명은 당시 1950년 7월 25일 해남읍에 도착해 108명을 학살했다. 해남읍 주민들은 나주경찰부대원들을 인민군으로 착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국적과 신분을 알 수 있는 군복을 입지 않았고, 견장과 군모, 버클 등을 천으로 가렸다. 또 죄다 북한 말씨를 썼다.

그렇다고 해서 이날 총 맞은 해남읍 주민들이 '인민군 환영대회'를 열거나 "인민공화국 만세"를 부른 것도 아니다. 해남치과 병원장 김응준처럼 대부분 집에 있다가 나주경찰부대의 총탄에 생을 달리했다. 나주경찰부대는 해남읍 가가호호를 수색해 젊은이들을 싹쓸이한 것이다.
 
 1952년 3월경 요새화 되어 있는 전남 나주경찰서 다도지서. (출처: 이경모, 격동기의 현장)
 1952년 3월경 요새화 되어 있는 전남 나주경찰서 다도지서. (출처: 이경모, 격동기의 현장)
ⓒ 이경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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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는 커서 치과의사 혀라"

일제강점기 중국 스좌장(石家莊)에서 일본인이 운영하던 치과병원에서 일한 김응준은 해방 직전 귀국해 전남 담양에서 치과를 개원했다. 김응준의 아들 김소철이 담양남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상급학교에 진학할 때였다. 김응준은 자식 교육을 위해 담양에서 해남으로 이주하고, 그곳에서 해남치과도 개원했다. 그때가 1949년도의 일이었다.

김응준은 소철에게 틈날 때마다 "니는 커서 치과의사 혀라"라고 당부했다. 장남이 자신의 일을 잇기를 바랐던 것이다. 남편이 치과의사이니 아내 오태장은 세상 부러울 게 없었다. 그녀는 시부모 모시고 가사노동에만 전념했다.

그런데 6.25 전쟁의 와중에 김응준은 대한민국 경찰인 나주경찰부대에 의해 학살되었다. 그는 좌익활동을 한 적도 인민군 환영식을 한 적도 없었다. 그저 집에 있다가 나주경찰부대의 총질에 쓰러졌을 뿐이다.

다음 날 '한 지붕 다섯 가족'이 모여 사는 해남읍 남동리 김종주 집에는 관 네 개가 놓였다. 김응준을 포함한 4구의 시신이 담긴 관은 손수레에 실려 공동묘지인 배드레재에 묻혔다.

경찰·공무원 가족은 지서에서 밤새워

"큰아버지, 지들 왔어라우." "잉, 왔냐." 김소철은 어머니 오태장과 동생과 함께 큰아버지가 사는 전남 장성군 북이면으로 갔다. 큰아버지 김찬준은 당시 북이면 면장이었다.

오태장은 아들들과 함께 시아주버니에게 가 시부모를 모셔가 달라고 부탁했다. 남편 김응준이 치과를 운영할 때는 살림에 여유가 있어 시부모를 모시는 데 불편함이 없었다. 하지만 남편이 나주경찰부대에 의해 학살된 이후로 하루하루 사는 게 전쟁이었다.

살림만 하던 그녀가 먹고 살기가 쉽지 않았다. 한번은 고추를 사와 시장에 내다 팔았는데 본전은 고사하고 손해만 봤다. 태어나 장사 한번 못해본 그녀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온 식구가 손가락만 빨 수는 없었다. 그래서 치과 의료기기를 되팔기로 했지만 제값을 받지 못했다. 아들 김소철이 나무를 해 시장에 팔았지만 돈이 되지 않았다. 결국 시부모 모시는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대흥사와 소나기
 
 증언자 김소철
 증언자 김소철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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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중학교 졸업반 시절 김소철은 늘 우울했다. 상급학교 진학의 희망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철아 니 요즘 어떻게 지내냐?" 해남고등학교 교장의 딸이자 1년 선배인 최향란이 다정하게 물었다. 최향란은 소철의 아버지가 나주경찰부대에 의해 학살된 것을 알고 있었다.

소철은 어머니가 장사를 하다 손해를 본 후에는 마을에서 품팔이를 하고, 자신은 동생과 나무를 해 내다 팔아 입에 풀칠만 한다고 했다. 

"소철아! 머리도 식힐 겸 대흥사에 놀러 가자." 중학교 졸업반인 소철과 고등학교 1학년생인 향란은 대흥사에서 1박을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음 날 귀가하는데 소나기가 쏟아졌다. 비에 흠뻑 젖은 소철은 향란의 집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이들의 우정은 그렇게 싹텄다. 소철은 마음속 근심을 향란에게 솔직하게 보여주었다.

이야기를 들은 향란은 아버지 최병량 해남고 교장에게 부탁했다. 소철이 3년 동안 해남고등학교를 장학생으로 다닐 수 있게 부탁했다. 덕분에 김소철은 고등학교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김소철(86세, 전남 화순군)이 최향란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에게 전쟁의 아픔은 깊고 오래 갔을 것이다. 사춘기의 풋풋한 우정은 소철이 굳건하게 성장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구십을 앞둔 김소철은 지금도 향란과의 우정을 잊을 수 없다. 또 아버지가 죽임을 당하던 날 후배 이종국에게 피하라고 말하지 못한 게 지금도 목에 가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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