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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초등학교 입학 전이었던 것 같다. 사촌 언니네 집에 있던 스누피 인형을 복실이란 복고적인 이름을 붙여서 집에 데려왔다. 만화 영화 속 스누피는 수컷이었던 것 같은데 내가 가지고 온 인형은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복실이와 먹고 자고 입고 모든 일상을 함께 했다. 복실이를 괴롭히는 남동생에게 "그러지마, 복실이 아프잖아"라며 매달렸다. 진짜 살아 있다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복실이를 보는 내 마음이 아팠다.

보통 2세에서 6, 7세 유아들은 사물에 생명이 있다고 생각하는 물활론적 사고를 한다. 책상에 부딪친 아이에게 어른들이 책상이 그랬냐면서 혼내준다고 책상을 '탕탕' 치는 행동을 하는 것도 그렇고, 자신의 애착 인형을 동생처럼 친구처럼 데리고 다니는 행동도 다 물활론적 사고에 속한다.

이렇게 사물에 감정이나 생명이 있을 거라 생각하며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특정 시기도 있지만 그 시기를 지나서 어른이 되어서 사물에 이야기를 입혀 생명을 불어넣는 사람이 있다.

이연 작가는 <불꽃머리를 펼쳐라> 그림책에서 생일케이크에 한 번 쓰고 버려지는 춧불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오디션 프로그램을 볼 때 참가자의 사연을 듣고 나면 노래가 더 감미롭게 들리는 것처럼 이연 작가는 사람들의 관심이 머물지 않는 작은 촛불에 이야기를 입혀 특별하게 만들었다.
 
 '불꽃머리를 펼쳐라' 겉표지.
 "불꽃머리를 펼쳐라" 겉표지.
ⓒ 한솔수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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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들에게는 마법의 머리카락이 하나씩 있어요. 초들은 이 머리카락에 불이 붙을 날 화려한 불꽃을 펼치기 위해 운동도 하고, 독서도 하고, 검은콩과 같은 몸에 좋은 음식도 많이 먹어요. 미풍, 약풍, 강풍, 태풍 같은 바람 종류에 따라 불꽃이 꺼지지 않게 연습도 하고, 바람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기 위해 공포 체험도 하죠. 불꽃 가발을 쓰고 선풍기 앞에서 시물레이션 연습까지 하면서 불꽃을 멋지게 펼칠 그날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드디어 그날이 왔어요. 무대 위에서 멋진 불꽃을 펼칠 시간이 왔어요. 5개의 초에 불이 붙고 각자 불꽃머리를 뽐냅니다. 생일축하 노래가 끝나자 바람이 불어와요. 초들은 바람을 이기기 위해 노력하고 끝까지 남은 초가 있는데...

남아 있는 초는 어떻게 되었을까? 생일케이크에 꽂힌 촛불을 끄는 장면 하나가 촛불의 일대기에서부터 이렇게 멋진 이야기로 탄생하다니 이연 작가는 정말 타고난 이야기꾼인 거 같다. 휴대폰 판매원을 성악가로 만든 영국 오디션 프로그램처럼 이연 작가는 촛불을 폴 포츠로 만들어 그림책 주인공으로 탄생시켰다.

<불꽃머리를 펼쳐라>에는 다양한 색깔과 다양한 연령의 초가 나온다. 회색 초는 주름진 얼굴로 나이든 초로 나오는데, 생일초로 픽업 되지 못하고 오랜 시간 서랍 속에서 기다리느라 그런 것 같다. 우리 눈엔 다 같아 보이는 초도 각각 개성이 있고, 불꽃 모양도 다르고 바람에 견디는 정도도 다르다. 실제 우리가 초에 불을 붙여 보면 모두 같지 않기도 하고.
 
오늘은 정말 멋진 날이야. 우리의 불꽃머리를 펼친 날이니깐. 그리고 누군가에게도 특별한 날이겠지? 이제 마음껏 오늘을 축하하자.
 
촛불이 꺼지면 초들은 쓰레기통으로 갈텐데 멋진 날이라고 표현한 게 놀랍다. 생의 마지막을 멋지게 받아들이는 자족적인 모습인 것 같아 해탈의 경지에 이른 거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이 책의 매력은 이런 해탈보단 촛불에 이야기를 입혀 살아 있는 존재로 만든 데 있다. 촛불에게 이런 사연이 있을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연필, 지우개, 자 같은 문구 용품도 칼, 가위, 도마 같은 요리 도구도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토이 스토리처럼 얘네들도 우리가 잠들고 나면 돌아다니면서 자신들만의 세상에서 자신의 쓰임이 펼쳐질 때를 대비해 열심히 수련하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지난 주말 아이 놀이방을 정리하던 남편이 아이 유치원 때 가방을 버리려고 앞주머니 안에 있는 종이들을 꺼냈다. 종이비행기, 쪽지 한 뭉치를 남편이 버리려는 찰나 아이가 소리쳤다.

"안돼. 그거 버리지마."
"왜 이거 다 쓰레기인데."
"내 추억들이란 말이야. 이거 보면 윤채 생각난다고. 오늘 추억 하나 찾았다."


어른들 눈엔 쓰레기지만 아이 눈엔 추억인 종이. 아이의 추억을 입고 종이는 부활했다. 쓰레기통에 들어갈 뻔했던 종이들이 추억상자에 자리 잡았다.

촛불 하나에도 이야기가 있고, 종이에도 추억이 있는 사물에 생명을 불어넣는 눈을 가지고 세상을 사는 건 어떤 느낌일까? <불꽃머리를 펼쳐라> 그림책을 보면서 아이 마음을 가늠해 본다. 사물에서 생명을 느끼지 못하는 메마른 마음에 잠시 해가 든다.

[한솔수북]불꽃머리를 펼쳐라 외 2(전3권)/미니노트

이연 (지은이), 한솔수북(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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