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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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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전쟁의 그늘>의 저자 신기철은 현재 금정굴인권평화재단의 연구소장이다. 필자는 그를 지난 노무현 정부시절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와 진실화해위원회(아래 진실위)에서 '직장동료'로 만났다.

지난 2010년 이명박 정권이 진실위 활동을 종료시킨 후 저자는 지금까지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에 대한 책을 10권 이상 썼다. <한국전쟁, 전장의 기억과 목소리>(2020), <황금무덤 금정굴, 거짓에 맞서다>(2018), <한국전쟁과 버림받은 인권>(2017), <전쟁범죄>(2015), <국민은 적이 아니다>(2014) 등이 그것이다.

저자는 무려 11권의 민간인학살 관련 책을 펴냈다. 그가 이렇게 지칠 줄 모르고 민간인학살에 대해 연구하고 책을 낼 수 있도록 해주는 원동력은 어디에서 오나 궁금했다. 저자는 말한다.
 
"법률상 진실위의 조사기능만 한시적인 것일 뿐이지 진실규명 후 후속 조치, 특히 역사바로세우기 등은 계속되는 사업이었다. 하지만 이명박-박근혜 정권은 이 업무를 중지시켰다. 나는 민간 차원의 활동일망정 이 일을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미 2004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활동을 마치면서 후속 작업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2010년 진실위까지 과거청산의 작업을 멈출 수 없었다."


왕성한 연구와 집필 활동을 인정받아 저자는 지난 2018년 학술부분의 임종국상을 받기도 했다. 아래는 지난 일주일간 저자와 그의 신간 <전쟁의 그늘>에 대해 인터뷰 한 내용이다.

- 책의 부제가 "거짓 기록에서 찾은 6·25전쟁 잔혹사"인데 '거짓 기록'은 어떤 기록이고 왜 이런 부제를 붙인 것인지?
"'한국전쟁사' 등 국가공식 역사서는 없던 일들을 마치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인양 가공해서 수록했고 이 거짓말은 1970년대 독재정권의 반공 이데올로기를 강화시키는 기능을 했다. 공식적으로는 그 누구도 이 거짓을 지적하지 못했다.

대표적인 것이 인천상륙을 앞둔 백인엽 17연대장의 증언이다. 상륙작전이 벌어지던 1950년 9월 15일 자신은 대구에 있었음에도 마치 인천 앞바다에서 모두를 목격한 것처럼 증언했고, 국방부는 이를 그대로 전쟁사에 기록했다. 한국전쟁사 최고 감수자였던 그의 형 백선엽 역시 자신의 회고록을 통해 이를 마치 사실인양 지원했다. 나는 이번 작업을 통해 이제라도 거짓 역사를 바로 잡고 싶었다."

- 책을 쓰기 위해 걸린 시간과 방문한 지역은? 또 학살지역을 방문하고 느낀 점은?
"집필에 걸린 시간은 2년 정도였다. 방문 지역은 전투가 벌어졌던 지역의 5퍼센트 정도 된다. 방문한 곳은 그나마 전투 지역의 위치가 확인되는 경우였고 대부분은 위치조차 불분명했다. 수도권에서는 파주와 김포, 양평, 이천, 인천 옹진군, 강원에서는 홍천, 충북에서는 청주, 충주, 보은, 단양, 음성, 영동, 충남에서는 공주, 강경, 서천, 전북에서는 군산, 고창, 전남에서는 곡성, 영암, 장흥, 경북에서는 상주, 문경, 안동, 의성, 대구, 영천, 포항, 영덕, 청송, 경남에서는 통영, 마산, 창녕을 방문했다.

대개 학살지 방문에서 느끼는 첫 감정은 공포였지만 이 작업에서는 분노였다. 현장을 보는 것만으로도 여러 거짓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인민군이 진입할 군사적 이유가 전혀 없는 산골, 섬들도 있었다. 여기에 인터뷰까지 진행해보면 적이나 인민군을 소탕한 것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을 학살했다는 사실이 그대로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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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전쟁은 자기 측 군대에 의해 국민들이 조준 학살당한 사례가 훨씬 더 많은 전쟁이었다"고 썼는데 구체적 예를 들어 설명하면?
"국민보도연맹사건, 특히 국군 6사단 헌병대에 의한 사건들이 떠오른다. 국군 6사단은 국군 8사단과 함께 병력을 가장 온전하게 유지한 전투사단이었다고 평가받는다. 어이없는 것은 이들이 저지른 민간인학살 사례가 가장 많다는 것이다. 전쟁 초기 전멸하다시피 했던 국군1사단 등은 민간인학살 사건을 일으키지 않는다. 병력이 없으면 학살도 일으키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이번에 이들 6사단이 치렀다는 전투, 즉 홍천 복골, 이천 곤지암리, 충주 동락리, 음성 감우재 전투는 과연 정상적이었는지 살펴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이 전투에 대한 설명은 의혹 투성이었다. 이 전투들은 어떤 범죄도 은폐되는 전쟁 상황, 즉 '전쟁의 안개'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적인지 민간인인지도 구별하지 않고 가하는 전선의 공격이나 적을 도울 것이라며 민간인을 학살하는 후방의 공격이나 모두 자기 국민에 대한 조준 학살이다. 증거도 없고 따질 수도 없는, 따라서 처벌도 받지 않는 완전범죄가 되는 것이다."

- 6.25전쟁을 "이상한 전쟁, 정상이 아닌 전쟁"으로 평가했고 심지어 "전쟁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라고 자문했다. 그 이유는?
"지난 1기 진실위가 확인했듯이 민간인피해의 상당수는 전투에 의한 부수적 피해가 아니라 고의적인 학살이었다. 나는 대부분이 국민보도연맹사건 등 청년들에 대한 학살 또는 피란민에 대한 공격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이 만행은 반정부세력을 말살한다는 정치적 목적과 함께 군인이 될 수 있는 인력을 없앤다는, 그리고 군사작전에 방해되는 피란민을 제거한다는 군사적 목적이 결합되어 나타난 것으로 본다. 이를 보면 6.25전쟁은 전쟁이 아니라 민주공화국에 대한 반란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 6.25전쟁 중 국군은 왜 100만 명이 넘는 자국민인 민간인을 학살했다고 보나?
"대량학살이 벌어지는 메커니즘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학살자들의 각 단위는 세분화되어 있고 서로 독립되어 작동한다. 서로 경쟁을 하기도 하고 각 단위들은 집단의 이념과 상부의 명령에 따라 무심하게 대량학살을 저지르게 된다. 사악한 지도자와 맹목적으로 권위에 따르는 집단의 존재, 그리고 무기력한 상태에 빠진 피해대중, 이것이 대량학살이 발생하게 되는 조건들이다.

일본제국주의를 뒤이어 점령군으로 온 미군은 더 말할 것도 없지만 최고 권력자 이승만 역시 국민의 지지를 받고 집권한 지도자가 아니었다. 사악한 지도자의 전형이었다. 여기에 청산되지 못한 친일파 집단이 경찰과 군대라는 물리적 폭압기구를 장악했다. 친일파들은 자신들의 약점을 반공 이념으로 가리면서 애국자로 변신한다. 반면, 항일독립운동가들이나 양심적인 지식인, 헌신적인 사회운동가들은 권력에서 추방되거나 감옥에 갇히거나 학살당했다.

이제 이승만 정권에게 저항할 수 있는 사람들은 없어보였지만 1950년 선거 결과는 이승만 집단의 예측과 정반대였다. 이승만은 더 이상 대통령이 될 수 없었고 친일파정권은 물러나야 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이승만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가 택한 방법은 극단적인 선택, 즉 전쟁이었을 것이고 이 상황을 이용해 대량학살을 저질렀을 것이다. 여기에 이승만을 고무시켰던, 또는 이용했던 미군의 역할에도 주목해야 한다."
 
고창 흥덕지서 뒷산의 모습. 1950년 11월 1천 명이 넘는 빨치산을 공격하여 150명을 사살했다고 한다. 이들은 한 때 전차까지 보유하고 있었다고 했지만 정작 이들의 무기는 곡괭이였다.
 고창 흥덕지서 뒷산의 모습. 1950년 11월 1천 명이 넘는 빨치산을 공격하여 150명을 사살했다고 한다. 이들은 한 때 전차까지 보유하고 있었다고 했지만 정작 이들의 무기는 곡괭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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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에서 학살희생자들에 대해 "이동하던 피란민들은 아니었을까? (국군이) 국민보도연맹원들을 학살해놓고 인민군이라고 한 것은 아닐까?"라고 의구심을 표현했는데, 그런 추정을 할 만한 증거가 있나?
"1950년 7월 11일 공주 유구읍 유구초등학교 전투를 보자. 국군 기병중대가 인민군 환영대회장을 공격했다. 집회의 성격으로 보아 인민군이 있었을 것이고 이들을 환영하는 주민 인파가 모여 있어야 마땅하다. 이들을 공격했으니 민간인의 죽음도 피할 수 없었겠지만. 그런데 더 큰 문제가 드러났다. 같은 날 인민군은 아산에 있었으니 공주 유구의 북쪽인 예산에도 아직 안 왔다. 같은 날 예산에서는 국민보도연맹원 학살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래서 유구에서 벌어졌다는 인민군과의 전투, 의심할 만하지 않나?"

- 그러면 6.25전쟁의 성격을 정당한 전투로 보나 아니면 전쟁범죄로 보나?
"민간인 학살의 관점에서 본다면 모든 전쟁은 전쟁범죄의 성격을 갖는 것 같다. 이를 떠나 국가 간의 '정당한' 전쟁을 따지려면 결국 침략의 의도와 결과를 봐야 한다. 1950년 6월 25일 인민군이 38선을 넘어 남진한 것은 객관적 사실이다. 침략 전쟁범죄에 해당한다. 한편 미국이 전쟁을 유도했다고 본다. 미 국방부 참모 도널드 맥비 커티스가 작성했다는 전쟁유도계획이 이를 증명한다고 생각한다. 이것도 전쟁범죄다. 그리고 1950년 10월 1일 국군이, 이후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했다는 것도 사실이다. 이 역시 평화 의무를 위반한 전쟁범죄이다."

- 이제 곧 2기 진실위가 발족되는데 2기 진실위에 바라는 기대가 있다면?
"1기 진실위 이후 10년이 지났다. 새롭게 시작할 2기 진실위는 새로운 사건과 함께 1기의 연장으로서 지난 성과를 이어나가야 하는 역할도 함께 해야 한다. 이제는 피해를 회복하는 일에 더해 진실규명의 의의를 확대해 나가는 노력, 지난 사건의 의미를 미래 세대들에게 전달하려는 노력도 필요하다. 개인적으로는 베트남이나 이북지역에서 자행된 민간인학살 행위에 대해서도 돌아봐야한다고 생각한다. 조사를 지원하거나 공동조사 할 수 있는 관계가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전쟁의 그늘 - 거짓 기록에서 찾은 6·25전쟁 잔혹사

신기철 (지은이), 인권평화연구소(2020)


태그:#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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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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