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2020 KB금융 한국컬링선수권대회의 포커스는 주로 여자부에 맞춰졌다. 여자부 선수들이 컬링대회의 흥행을 이끌었던 경향이 있고, '팀 김은정'의 3년만의 왕좌 복귀로 더욱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기 때문. 하지만 남자팀에도 이변이 생겼다. 국가대표에 경기도컬링경기연맹 선수들이 오른 것.

경기도연맹(스킵 정영석, 서드 김산, 세컨드 박세원, 리드 이준형, 핍스 김승민) 선수들은 국가대표로 오랜 경험을 가지고 있던 경북체육회 '팀 김창민'을 결승에서 꺾었다. 실업팀이 아니니만큼 월급도, 세세한 지원도, 심지어는 경기력 향상을 위한 해외 경기 출전도 없이 독수공권으로 컬링을 이어오던 비실업팀이 국가대표에 승선한 것이다. 이들의 저력이 놀라웠다. 

당장 젊음 하나만을 믿고 아르바이트를, 시민 대상 강습을 병행해가며 훈련을 이어갔던 선수들이다. 특히 최근 코로나19로 인해 팀의 합을 맞추기도 어려웠고, 어려운 사정 탓에 멤버 변동도 심했다. 그런 상황에서 국가대표라는 금자탑을 쌓아 올렸다. 선수들의 의지와 투혼, 그리고 열정이 빚어낸 기적이었다.

스틸 두 번, 초반 분위기 갈랐다

 
 24일 열린 2020 KB금융 한국컬링선수권대회 남자부 결승전에서 경기도컬링경기연맹 김산 선수(왼쪽)이 하우스로 들어오는 스톤을 지켜보고 있다.

24일 열린 2020 KB금융 한국컬링선수권대회 남자부 결승전에서 경기도컬링경기연맹 김산 선수(왼쪽)이 하우스로 들어오는 스톤을 지켜보고 있다. ⓒ 박장식

 
결승전에 임하는 경북체육회는 이미 경기도연맹을 상대로 예선에서, 그리고 페이지 플레이오프 첫 경기에서 이미 누른 바 있었다. 특히 지난 시즌 있었던 코리아컬링리그에서도 경기도연맹은 경북체육회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적이 없었던 상황. 이에 따라 경북체육회의 유리한 경기로 펼쳐질 것이라는 예상이 오가곤 했다.

하지만 막상 경기를 시작하니 분위기가 달라졌다. 첫 엔드 후공을 가져간 경북체육회가 2점을 먼저 따내자 경기도연맹도 손쉽게 두 점을 따라붙었다. 선수들은 3엔드에는 한 점, 4엔드에는 두 점의 스틸을 더 올리며 스코어 5-2로 초반 기세를 잡아갔다.

특히 4엔드 스틸은 하우스 안에 경기도연맹의 스톤을 넉 개나 미리 밀어넣어 경북체육회의 스톤이 들어올 틈을 막은 명품 스틸이었다. 경북체육회는 스킵샷을 가운데에 밀어넣어 점수를 챙기려 시도했으나 모든 스톤을 쳐내기에 역부족이었다. 결국 세 엔드 연속 득점을 허용하는 아쉬운 모습을 보였다.

경북체육회는 5엔드 석 점의 대량득점에 성공하며 초반 균형을 가까스로 맞췄다. 후반전에 돌입한 경기도연맹은 한 술 더 떴다. 6엔드 스킵샷 상황, 하우스에 양 팀 스톤이 10개 가까이 들어와있는 혼전 상황에서 센터 라인을 따라 강한 힘으로 던진 정영석 스킵의 샷이 경북체육회의 스톤을 모두 쳐낸 것. 단숨에 경기도연맹이 석 점을 더 얻으며 8-5로 달아났다.

경북체육회도 7엔드 다시 대량득점에 성공하며 자존심을 살렸다. 경북체육회는 7엔드 넉 점을 올리며 단숨에 스코어 8-9, 역전을 성공했다. 스틸이 가능한 상황 김창민 스킵의 스킵 샷이 하우스의 가운데로 빨려들어가며 대량득점의 발판이 되었다. 다음 엔드에는 경기도연맹이 두 점을 올려 혼전 상황을 이어갔다.

승리의 순간... 스킵은 주저앉아 울었다
 
 24일 열린 2020 KB금융 한국컬링선수권대회 남자부 결승전에서 경기도컬링경기연맹 선수들이 우승의 순간 기뻐하고 있다.

24일 열린 2020 KB금융 한국컬링선수권대회 남자부 결승전에서 경기도컬링경기연맹 선수들이 우승의 순간 기뻐하고 있다. ⓒ 박장식

 
여느 경기라면 끝났어야 할 스코어 10-9 상황, 선수들은 9엔드에 돌입했다. 경북체육회의 작전은 블랭크 엔드. 블랭크 엔드 이후 후공에서 다량득점을 노려 승리를 가져간다는 작전이었다. 9엔드의 작전은 수월하게 성공했다. 하지만 10엔드 경기도연맹 선수들의 철통 방어 속에 한 점만을 얻으며 경기는 엑스트라 엔드까지 이어졌다.

엑스트라 엔드는 경기도연맹이 후공. 하지만 경북체육회가 스틸을 가져갈 수도 있기에 긴장되는 경기가 펼쳐졌다. 경기도연맹은 하우스 안 상대 스톤을 더블 테이크아웃하는 등 경기를 끌고가려 애썼고, 경북체육회는 하우스 이곳저곳에 스톤을 배치하는 등 스틸을 위한 발판을 세우려 했다.

이윽고 스킵 샷이 이루어졌고, 경북체육회의 스톤이 경기도연맹의 스톤 뒤에 숨은 마지막 상황. 경기도연맹 정영석 스킵의 마지막 스톤이 손을 떠났다. 정영석은 직접 하우스를 보지 못하고 뒤돌아 섰다. 잠시 후 경기도연맹의 스톤이 자신들의 스톤을 쳐낸 후, 그 스톤이 다시 경북체육회의 스톤을 쳐냈다. 깔끔한 테이크아웃이었다.

최종 스코어 12-10. 경기도연맹이 컬링 대표팀에 승선하게 되었다. 비실업팀 선수들이 성인 4인조 대표팀 선수가 된 것은 2008년 부산컬링협회 이후 12년만의 일이었고, 그마저도 실업팀 경험이 없었던 선수들이 진출한 것은 2007년 전북컬링경기연맹 이후 처음이었다. 

승리의 순간, 아이스 위의 다른 선수들이 얼싸안고 기쁨을 나누는 동안 정영석 스킵은 아이스 위에 주저앉아 눈물을 훔쳤다. 이번 한국선수권 이전에는 한 번도 실업팀을 이기지 못했던, 그리고 실업 팀이 아니었기에 전력이 자주 이탈되곤 했던 모습을 눈앞에서 봤던 정영석 스킵이기에, 더욱 이번 승리가 복받친 것이 아니었을까.

"이렇게 맞춘 지 두 달도 안 되었는데..."
 
 24일 열린 2020 KB금융 한국컬링선수권대회 남자부 결승전에서 우승을 거두고 태극마크를 확정한 경기도컬링경기연맹 정영석 선수가 주저앉아 복받친 듯 울고 있다.

24일 열린 2020 KB금융 한국컬링선수권대회 남자부 결승전에서 우승을 거두고 태극마크를 확정한 경기도컬링경기연맹 정영석 선수가 주저앉아 복받친 듯 울고 있다. ⓒ 박장식

 
정영석 스킵과 김승민 핍스, 그리고 김산 서드는 주니어 국가대표 경험이 있다. 정영석과 김승민은 의정부고 시절 2013년부터 1년간 주니어 국가대표 자리에 올랐고, 김산 선수는 숭실대학교에 다니던 2011년부터 2년동안 서민국, 김정민(현 강원도청) 등 선수들과 함께 주니어 국가대표로 뛰었다. 하지만 성인 대표팀은 이번이 처음이다.

시상식이 끝난 후 정영석 스킵은 마지막 순간에 대해 이야기했다. "스톤이 하우스에 들어가기 직전에 감으로 이미 승리했음을 알았다"면서 "지금까지 컬링을 했던 모든 순간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너무 복받치더라. 사실 스코어보드만 보면 정말 열심히 했기에 져도 상관이 없다는 생각을 했는데, 막상 이기니 너무 기분이 좋다"고 소감을 말했다.

사실 경기도연맹은 최근까지 전력의 유출입이 많았다. 오승훈 선수가 강원도청으로 영입되었고, 그 빈자리를 코로나19 탓에 믹스더블 팀이 해체된 김산 선수와 이준형 선수로 채웠다. 그렇게 전력을 맞춘 것이 겨우 두 달밖에 안 되었다. 오히려 그러다보니 '이기던 지던, 다 보여주고 가버리자'는 악바리 정신으로 임하게 되었다고 한다.

김산 선수도 팀에 합류한 지 오래되지 않았다. 동료였던 박정화 선수가 코로나19 탓에 이어가기 어려웠던 선수 생활을 마감하고 중학교 코치로 부임하여 팀이 해체된 것. 김산 선수는 "믹스더블 때와 4인조 때 경기 감각에 차이가 없다"며 "이번 대회 때에는 나쁜 긴장감 대신 설레는 긴장감이 가득했다"고 웃었다.

김산 선수는 팀의 맏형 노릇을 한다. 그렇지만 강압적인 스타일 대신, 후배 동생들과 기꺼이 맞추어가며 선수들의 지지대가 되어줬다. 김산 선수는 "연맹 팀이지만 운동하는 모습과 연습도 실업 못잖은 모습에 오히려 아이들에게 많이 배웠다"며 "내가 못했을 때에도 후배들이 오히려 다독이곤 한다"고 말했다.

연맹 선수 국대행, 실업팀 창단 계기 될까
 
 24일 열린 2020 KB금융 한국컬링선수권대회 남자부 결승전이 끝난 후 우승한 경기도컬링경기연맹 선수들과 코치가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24일 열린 2020 KB금융 한국컬링선수권대회 남자부 결승전이 끝난 후 우승한 경기도컬링경기연맹 선수들과 코치가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 박장식

 
현실적인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김산 선수는 "연맹에서는 훈련할 수 있는 여건이나 지원을 해주셔서 감사하지만, 컬링이 실업팀 선수들과는 다르게 생업이 되지 못했다는 것이 아쉬웠다"며 "남자 실업팀이 많지 않으니, 월급 없이 컬링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고도 현실을 이야기했다.

선수들은 아르바이트나 컬링 강습을 통해 생업을 유지하곤 했다. 이준형 선수는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운동을 하고 있고, 박세원, 정영석, 김산 선수는 컬링장을 방문한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강습 프로그램으로 근근히 버텼다고 한다.

김산 선수는 "20대라서 가능했다. 이제 국가대표가 되었으니 아무 걱정 없이 경기를 할 수 있는 여건이 되었으면 한다"라며 "이번 국가대표 진출을 계기로 경기도청에도 실업팀이 창단되어 선수들에게도 지원이 아낌없이 되고, 후배들에게도 좋은 동기부여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경기도연맹 선수들이 주니어 국가대표 이후 세계 대회나 월드 투어 경험이 없어, 해외 팀과의 승부가 힘들 수 있다는 일각의 반응에는 정영석 선수가 "우리는 데이터가 없는 팀이다. 지금처럼 간절하게 경기한다면 분명 통할 수 있을 것"이라며 "조만간 국내 리그가 다시 열려서 경기 감각 유지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속내를 비쳤다. 

선수들에게는 막중한 임무가 부여되었다. 세계선수권에서 일정 순위 안에 들어 올림픽 출전권도 따내야 한다. 더욱 운동에 집중할 수 있도록 실업팀 창단도 추진해야 한다. 이제 드디어 '직업 선수'로 첫 발을 뗀 선수들이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고 새로운 남자 컬링의 자존심으로 등극할 수 있을지 관심있게 지켜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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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링 한국컬링선수권대회 경기도컬링경기연맹 국가대표 정영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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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교통 기사를 쓰는 '자칭 교통 칼럼니스트', 그러면서 컬링 같은 종목의 스포츠 기사도 쓰고,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도 쓰는 사람. 그리고 '라디오 고정 게스트'로 나서고 싶은 시민기자. - 부동산 개발을 위해 글 쓰는 사람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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