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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봉오동 전투' 100주년 기념해이다. 봉오동 전투는 3‧1운동의 패배주의를 딛고 승리한 위대한 사건이다. 나아가 1920년대 항일무장투쟁의 포문을 열어 젖힌 역사적 대사건이다.

1920년대를 관통해 일본군과 수백 차례 전투를 치른 통의부,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로 대표되는 항일무장투쟁이 그러하다. 20년대 전반기 300명이 넘게 희생을 치른 의열단 의열투쟁 또한 마찬가지이다. 하나같이 강도 일본 제국주의를 모두 무력으로 응징하고자 했다.

그런 이유로 당시 독립군들은 봉오동 전투를 '독립전쟁 제1회전'이라 불렀다. 따라서 '청산리 전투'는 봉오동 전투의 연장전인 셈이다. 이 두 전투에 모두 참전했던 인물이 바로 최진동 장군이다.

 
영화 '봉오동 전투'의 한 장면
 영화 "봉오동 전투"의 한 장면
ⓒ 쇼 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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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오늘날 세상은 봉오동 전투의 영웅을 '최진동' 장군이 아니라 '홍범도'로 기억한다. 학교교육을 통해 오래 전부터 그렇게 배워온 탓이다. 심지어 2019년 개봉한 영화 <봉오동 전투>에서도 홍범도(최민식 분)가 봉오동 전투의 영웅으로 묘사돼 등장했다.

봉오동 전투는 영화 <봉오동 전투>처럼 누더기 옷을 입은 독립군들이 치른 전투가 아니다. 감자 한 알을 여럿이 나눠 먹으며 치른 전투는 더더욱 아니다. 마찬가지로 봉오동 전투의 영웅은 '홍범도'가 아니라 '최진동' 장군이다. 오늘날 교과서에 영웅사관으로 서술된 '봉오동 전투=홍범도, 청산리 전투=김좌진'은 수십 년 동안 왜곡된 집단 기억이 낳은 신화이자 제도권 교육이 안고 있는 최대 맹점이다. 근본적으로 역사학계의 성찰이 요구되는 지점이다.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독립군의 실체는 통합부대 '북로독군부'였다. 북로독군부는 1920년 5월에 결성된 통합부대이다. 북로독군부의 주력부대는 최진동 장군이 통솔한 '군무도독부'였다. 군무도독부는 최진동-최운산-최치흥 3형제가 1912년부터 훈련시킨 자위대 병력이 1915년 500명 규모의 '도독부'로 발전해 1920년 6월 당시 670명 규모로 훈련된 최정예 독립군부대였다.

최진동의 군무도독부를 중심으로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안무의 국민회군 등 6개 부대가 통합, 결성된 부대가 '북로독군부'였다. 북로독군부 부장, 바로 사령관이 최진동 장군이었고 최운산 장군이 참모장, 최치흥 장군이 참모였다. 안무는 사령관 부관이었고 김좌진(제1연대장), 홍범도(제2연대장), 오하묵(제3연대장)은 연대장의 직책이었다.

더구나 홍범도는 봉오동 전투 당시 일본군과 치열하게 교전 도중 사령관의 지휘를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퇴각한 적이 있다. 자신의 부대는 게릴라 부대이지 정규군이 아니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그러한 홍범도의 판단은 다른 독립군 부대를 순간적으로 위기에 빠트린 잘못을 범했다.

실제로 봉오동 전투 당시 일본군 퇴로를 막고 있던 신민단 소속 독립군들은 홍범도 부대의 퇴각으로 수적 열세에 처해 일본군과 교전 끝에 모두 전멸했다. 봉오동 전투가 종료된 후 홍범도는 최진동 장군으로부터 심한 질책을 받았다.  

그것이 역사의 진실임에도 학교 교육이나 영화 <봉오동 전투>에선 홍범도를 영웅으로 그리고 있다. 홍범도 장군은 오히려 청산리 전투에서 뛰어난 용병술을 발휘해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혁혁한 공훈을 세운 인물이었다. 김좌진을 넘어설 정도였다.

실제로 홍범도 장군은 어랑촌 전투에서 위기에 빠진 김좌진 부대를 구해 준 적이 있다. 일본군 정예사단 병력이 가장 두려워한 부대가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이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역사의 진실이 왜곡된 데에는 역사학계가 그동안 북로군정서 출신 이범석의 저술 <우둥불>(1971)이나 이범석의 회고에 지나치게 의존한 탓이 컸다.

이미 <우둥불>(1971)은 독립운동사에서 과장된 서술이나 왜곡된 표현이 적지 않음이 판명된 자료이다. 이범석 자신의 전투 승리를 과대 포장한 것이 그러하다. 거꾸로 홍범도 부대를 겁 많은 부대로, 일본군과 교전도 해보지 않고 줄행랑 친 것으로 묘사한 장면도 마찬가지이다. 이 모든 역사 왜곡은 이범석 자신의 정치적 야망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오늘날 독립운동사를 전공한 학자들이 반드시 바로잡아야 할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봉오동 전투에서 독립군들은 장작림 부대 중국군 복장과 비슷한 회색 빛깔의 군복을 입었다. 다만 안무의 국민회군은 일본군 군복과 비슷한 색깔이어서 봉오동 전투 당시 일본군 부대 간 서로 피아식별을 못한 채 교전한 상황도 발생했다.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 사상자 숫자가 수백 명에 이른 것에는 일본군들 자기 부대끼리 총질을 자행한 탓도 컸다. 독립군 군복은 최운산 장군의 부인 김성녀 여사를 비롯해 독립군 부인들이 손수 재봉틀 8대를 돌려서 만든 군복이었다. 결코 영화 장면처럼 누더기 옷을 입고 일본군과 싸운 게 아니었다.

그리고 잘 훈련된 정예 병력이었고 대포와 기관총, 소총으로 중무장한 채 막강한 화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더구나 하루 3천 명을 먹일 수 있는 군량미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 모든 군대 식량과 무기 공급은 최진동-최운산-최치흥 3형제, 그중에서도 대부분 최운산 장군의 사재를 털어서 충당하였다.

최운산 장군은 당대 동북만주 제1의 거부였다. 그는 자신의 전 재산을 바쳐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몸소 실천한 인물이다. 즉 서간도에 이회영이 있다면 동북만주에는 최진동-최운산-최치흥 3형제가 있었다. 마땅히 한국사 교과서에 기록돼야 하고 어린 세대에게 귀감이 되는 역사적 인물로 가르쳐야 한다.
 
북만주 제1의 대지주이자 거부 최운산 장군은 자신의 전 재산을 쏟아 부어 무기구입, 군복 제작, 군량미 조달 등 독립군 기지 건설과 독립군 양성에 혼신을 다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귀감이 되는 인물이다. 1977년 뒤늦게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았다. 최진동 장군과 함께 <봉오동 전투>의 실질적 주역이다.
▲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귀감이 된 최운산 장군 북만주 제1의 대지주이자 거부 최운산 장군은 자신의 전 재산을 쏟아 부어 무기구입, 군복 제작, 군량미 조달 등 독립군 기지 건설과 독립군 양성에 혼신을 다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귀감이 되는 인물이다. 1977년 뒤늦게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았다. 최진동 장군과 함께 <봉오동 전투>의 실질적 주역이다.
ⓒ 최운산 장군 기념사업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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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진실이 이러할진대 보훈처는 최운산 장군에 대한 서훈을 1977년에 이르러서야 인정했다. 그런가 하면 아직도 여성독립군 김성녀 여사와 최치흥 장군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하질 않고 있다.

거꾸로 보훈처 심사위원들은 최진동 장군을 '친일파'로 규정해 서훈을 박탈을 시도했다. 최종 국무회의 결정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후손들이 서훈 취소 결정을 뒤늦게 알게 된 일이 발생했다. 후손들에게 서훈 취소 결정 이전에 소명 기회를 주지 않았다는 것은 절차상 중대한 하자가 아닐 수 없다. 현재 국무회의에서 서훈 취소 결정 논의 절차가 중단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면 보훈처 심사위원들의 주장이 무엇이 문제인지 후손들의 소명을 중심으로 정리해 보고자 한다.

최진동 장군의 밀고? 

첫 번째 친일 증거로 보훈처는 최진동 장군이 독립군 동향을 중국 측에 밀고했다고 주장하는 1911년 5월 10일자 문서를 제시했다. 그러나 이는 당시 최진동 장군이 의병활동을 도모하며 봉오동을 근거지로 독립운동세력을 길러내고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한 처사이다.

'최명록(최진동의 다른 이름)의 밀고' 라는 단 한 마디 표현을 문제 삼아 보훈처가 친일로 규정하는 것은 1910년대 최진동-최운산-최치흥 3형제가 준비해 나가던 항일무장투쟁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판단이다. 당시 최씨 3형제는 모두 중국군에 복무한 경험이 있었고 중국국적을 취득한 상태였다. 따라서 중국군과 소통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활동의 하나였다. 그것을 일본 외무성 자료에 근거해 친일로 몰아가는 것은 너무 성급한 판단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최진동 장군은 1912년 당시 반일사상 고취와 항일독립운동의 근간이 되었던 북간도 간민회 왕청현 지회장이었다. 1919년 일본 측 자료에는 최진동 장군이 1500명이 참석한 왕청현 독립만세 시위를 주도하고 국내로 진공해 일제헌병주재소를 공격하려 한다며 '극단적 배일주의자'로 자신들이 작성한 문서에 적시하고 있다. 이는 최진동 장군을 '밀고자'라고 보는 보훈처 판단과 180도 전혀 다른 상반된 평가이다. 보훈처의 자료가 설득력이 떨어짐을 부인하기 어렵다.

보훈처가 제시한 내용

다음으로 최진동 장군이 1923년 중국 관헌 맹부덕에게 독립군 정보를 밀고했다고 보훈처가 제시한 자료이다. "불령선인 영수 최진동이 1923년 불령선인 김광, 마룡하, 홍진우, 안무, 구춘선 등 무리가 러시아 적군(赤軍)으로부터 다액의 돈을 받아 공산당 지부 같은 적군(赤軍)의 분회를 설치하고 무지한 조선인을 규합해 동삼성 일대를 소란하게 하고 있다"는 내용을 길림성 독련 맹부덕에게 비밀리에 보고한 내용이다. 이는 최진동 장군이 민족주의자로서 공산주의를 싫어했던 사실을 간과한 것에서 빚은 지나친 억측이다.

당시 동북만주지역에는 같은 항일독립운동을 하면서도 민족주의와 공산주의 간 갈등이 없지 않아 존재했다. 1921년 자유시 참변 당시 수백 명의 항일독립군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참극을 목격한 최진동 장군은 공산당에 대한 불신이 매우 깊었다. 최진동 장군의 큰 아들, 최국신이 항일독립운동가로서 명석했음에도 공산주의 사상을 간직하자 이념 갈등 끝에 크게 야단을 쳤다.

그러자 큰 아들은 시름시름 앓다가 1년 뒤 병명도 모른 채 죽었고 며느리 역시 뒤따라 운명했다. 그 일로 최진동 장군은 크나큰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 그만큼 최진동 장군은 비록 항일독립운동의 방편일지라도 공산주의를 무척 싫어했고 불신했다. 따라서 일본군이나 일본 제국주의에 알린 것도 아니고 중국 측에 알린 행위가 어떻게 친일행위가 될 수 있는지 의아스럽기 그지없다.

1920년대 중반을 전후해 같은 항일독립운동가들끼리도 공산주의와 무정부주의자들 간에 서로 죽고 죽이는 참극이 다반사로 벌어졌던 게 당시 독립운동가들이 처한 비극적 현실이었다. 비근한 예로 무정부주의자 김좌진 장군이나, 뛰어난 독립운동가 김종진(김좌진의 사촌 동생)이 모두 아나키즘에 경도되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던 사실은 널리 회자되었다. 그 반대의 죽음도 무수히 많았다.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들에 의해 항일독립운동가 코뮤니스트들이 죽어간 이야기 한 토막을 전하고자 한다.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 정화암(본명 정현섭)이 쓴 회고록 <어느 아나키스트의 몸으로 쓴 근세사>에는 끔찍한 살육전이 이렇게 서술돼 나온다.

"해림을 중심으로 한족총련지역(아나키스트 본거지)과 영안현을 중심으로 공산지역은 항상 팽팽한 대결상태에 있었다. 어쩌다 잘못하여 상대방 지역으로 들어가게 되면 서로 죽고 죽이는 비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한 번은 경비를 돌던 교민이 20여 세 가량의 청년공산당원을 잡아왔다. 하얼빈쪽에서 공산당 본거지인 영안현으로 가려면 해림을 통과해야 했기 때문에 가끔 공산당원들이 해림역에서 체포되어 오는 수가 있었다. 체포되어 온 사람들은 거의 사살해 버렸다.

자루에 산 채로 묶어 넣고 다리 위에서 얼음이 언 강 위로 떨어뜨려 익사시키는 방법, 땅에 구덩이를 파고 사람을 묶어 그 구덩이에 세워놓고는 흙으로 묻어 죽이는 방법, 넓은 벌판으로 데려가 도망치게 하고는 뒤에서 총으로 쏴 죽이는 방법 등 서로가 잔인한 행동을 서슴없이 자행하는 경우도 있었다. (중략)

공산당원이라고 잡혀온 그 청년도 순진하고 총명하게 생겨 아까웠다. 언제부터 공산주의자가 되었는지 모르지만 나는 청년을 설득하여 내 사람으로 만들어 볼 결심이었다. 그런데 내가 산시(山市)의 대표자 회의에 참석한 사이 그 청년은 사살되어 버렸다. 그 뒤에 또 한 사람이 잡혀 왔다."- 정화암 <어느 아나키스트의 몸으로 쓴 근세사> 117~118 페이지.

거꾸로 청산리 전투로 유명한 백야 김좌진 장군은 공산주의자 청년 박상실에게 피살되었다. 김좌진은 아나키스트 독립운동단체인 한족총연합회 주석이었다. 김좌진의 사촌동생이자 무관학교를 졸업한 시야 김종진 역시 아나키스트 본거지인 해림 역 근처에서 공산주의자들에게 납치돼 피살되었다.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이지만 생각의 차이, 곧 이념과 오해는 슬프게도 참극에 또 다른 참극을 낳았다.

민족의 독립, 식민통치로부터 해방이라는 같은 목표를 위해 목숨을 걸고 분투했지만 항일지사들 간 참극을 피하진 못했다. 항일독립군끼리 수백 명의 비극을 자초한 '자유시 참변'(1921)은 그 대표적인 사건으로 기록돼 있다. 이는 세간에 널리 알려진 역사의 진실이다. 김좌진 장군을 암살한 박상실이라는 청년은 8년 뒤 동북항일연군 소속 독립군이 되어 일본군과 교전 중 전사한다.

그런 점을 기억한다면 최진동 장군이 공산주의 성향을 보이는 독립군들을 일본군도 아닌 중국군에 알린 것을 두고 친일의 증거로 내세우는 것은 온당치 않다. 보훈처의 친일 판단은 지나친 논리의 비약이거나 아니면 꿰어 맞추기식 억지주장이 아닐 수 없다.

일본 총영사관 통한 귀순?
  
세 번째로 보훈처가 주장한 일본 총영사관 귀순 행위이다. 최진동 장군은 1924년 9월 9일 장작림 봉천 군벌에 전격 체포됐다. 항일독립군들에게 우호적인 오패부 군벌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친일적인 봉천 군벌 장작림이 최진동 장군을 체포해 길림 감옥에 감금했던 것이다.

1924년 9월은 오패부 군벌과 장작림 군벌 간 전쟁으로 중국 동북 지방엔 전운이 감돌았다. 그런 정세 속에서 항일독립운동을 지원한 오패부 군벌과 제휴를 꾀한 것이 빌미가 되었던 사건이다.

친일군벌로 돌아선 장작림 봉천 군벌은 오패부 군벌을 지원할 수 있는 항일독립군들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최진동 장군을 체포한 것이다. 이를 위해 장작림 친일 군벌은 중국인을 매수해 음모를 꾸몄다. 최진동 장군의 모친이 위독하다는 허위 정보를 뿌려서 최진동 장군을 귀향하는 과정에서 체포한 것이다.

 
최진동 장군의 동생 최운산 장군 일대기와 가족사를 담은 책.
 최진동 장군의 동생 최운산 장군 일대기와 가족사를 담은 책.
ⓒ 필로소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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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최진동 장군의 동생 최운산 장군도 장작림 친일 군벌의 계략으로 일본군에 피검돼 청진 감옥에 수감돼 3년 간 고초를 겪었다. 당시 정세를 읽을 수 있는 <동아일보> 1924년 1월 12일자 '최진동의 세력 왕성'를 살펴보자.

"이미 보도한 바와 같이 북간도와 러시아령 방면 근처에 근거를 둔 독립당 최진동이 거느린 다수의 부하가 무기를 가지고 그 세력이 매우 굳세다 한다. 중국 관헌 간에서도 매우 염려하고 있다. 동녕현 지사가 조사하여 길림성 성장에게 보고한 바에 의하면 최진동의 부하는 4199명이고 장총이 4059개이며 기관총이 27개, 대포가 4문이라고 한다." - <동아일보> 1924년 1월 12일

최진동 장군이 장작림 친일 군벌에 체포돼 길림으로 압송된 사건에 대해 김경천 장군은 "불행한 일이라며 눈물을 금치 못하겠다"고 자신의 일기(敬天兒日錄, 1924년 10월 13일자)에 썼다.

일제 외무성 문서에 따르면 최진동 장군은 1926년 12월 초 건강 악화로 기소유예처분을 받고 병보석으로 석방된다. 그리고 고향인 연길 국자가에 도착해 중국 관헌에게 12월 3일 신고하고, 3일 후인 6일에 일본 관헌에 신고하였다고 전해진다. 이를 두고 보훈처는 최진동 장군이 일본 관헌에 신고했기에 귀순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최진동 장군 후손들은 이 부분에 대해서도 근거가 빈약한 억측이라고 판단한다. "최진동 장군이 진술한 부분은 중국 관헌이 작성한 신고서 일부분으로 일제 문서에는 따옴표 표시로 인용돼 있다. 일본 영사관에 제출한 것이라면 대부분 일제 문서에서 보듯이 전체 진술서가 별도로 첨부돼 있었을 것이다. <최진동 장군>(2006)이란 책을 통해 일대기를 연구하고 쓴 연변역사학자 김춘선을 비롯한 중국 역사학자들은 그 책에서 일제에 신고한 게 아니라 중국 군벌 도윤공서에 신고한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일제에 의해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것이 아니라 오패부 군벌에 협력한 혐의로 장작림 친일 군벌에 체포된 것이지 일제에 체포된 게 아니라"는 것이다.

최진동 장군이 일제에 귀순했다면 일본 영사관이 최진동 장군을 함부로 체포하지 못하도록, 중국 측이 적극적으로 보호조치를 하였을 까닭이 없다. 그런 점에서 최진동 장군이 친일파라는 증거로서 보훈처가 제시한 자료는 함량 미달임을 보여주고 있다.

국방 헌금 납부? 남편 살리고픈 아내의 마지막 선택 
  
네 번째 보훈처가 제시한 최진동 장군 친일 혐의로 국방헌금을 납부한 사실이다. 이는 1937년 11월 2일자 동아일보에도 보도된 내용으로 최진동 장군이 국방헌금으로 100원을 납부했다고 납부자 명단을 실었다.

그러나 이는 최진동 장군을 고문하고 회유하는 과정에서 나이 어린 부인이 일제의 고문으로 죽어가는 남편 최진동 장군을 살리기 위해서 최진동 장군 몰래 납부한 것이다. 그러한 사실이 연변 역사학계에서 공식적으로 출간한 <최진동 장군>(2006)에 소상히 기술돼 나온다.

국방헌금으로 200원을 납부한 조병옥은 독립유공자로 서훈을 받았다. 보훈처는 1990년대 독립유공자들 서훈을 추진할 때 국방헌금을 문제 삼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왜 오늘에 와서 최진동 장군에게만 친일의 잣대를 들이대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2015년 연변역사학회장 김춘선 교수는 당시 100원의 국방헌금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중일전쟁으로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하던 시절, 100원의 국방헌금을 문제 삼는다면 당시 독립운동가 김약연이나 구춘선 등 항일독립지사들 모두 친일파로 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 마디로 시대적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못한 보훈처의 도식적이고 매우 경직된 사고가 아닐 수 없다.

마지막으로 보훈처는 최진동 장군이 항일독립군들의 귀순을 종용하는 '관동군 위촉 선무부장'이었다는 자료를 친일의 증거로 제시했다. 이는 1949년 반민특위에서 종로경찰서 고등계 밀정의 의혹을 받아 체포된 이기권의 '피의자 신문조서'에서 실체적으로 규명된 부분이다. 더욱이 최진동 장군의 귀순 선무부장 문제는 아나키스트 항일독립운동가 이정규의 증언도 '혐의 없음'으로 70년 전 판명 난 사건이다.

이정규는 치안유지법 위반죄로 서대문형무소 감옥에서 8년 동안 옥살이 끝에 지조를 지키며 출옥한 열혈 항일애국지사이다. 반민특위 '증인신문조사'에서 이정규는 최진동 장군이 귀순 선무활동과 전혀 관련이 없음을 진술하였다. 실제로 귀순 선무반 간판은 일제가 최진동 장군 사무실에 일방적으로 걸어 놓았던 것이다.

당시 최진동 장군은 삶과 죽음을 오가는 와병 중이었고 단 한 번도 귀순 선무활동을 벌인 적도 없었다. 오히려 일본 헌병대장이 만들어준 선무 활동용 귀순 권유문을 살포하기보다 포장 대용 용지로 썼을 정도였다. 일제가 귀순 선무반 간판을 내건 지 5개월 뒤 최진동 장군은 고문 후유증으로 순국했다.

1941년 11월 순국 직전 최진동 장군은 둘째 아들 최국량을 비롯해 가족들에게 이렇게 유언을 남겼다.

"쏘독 전쟁이 이미 폭발했고 일본도 이 전쟁에 말려들 것이다. 일본은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 우리 조선은 반드시 독립할 것이다. 독립의 그날을 보지 못하고 죽는 것이 한스럽다. 내가 죽은 후 봉오동 어귀 선산에 묻어, 죽어서라도 부모님과 함께 있게 해다오."- 김춘선 외 <최진동 장군> 254쪽

독립투사다운 비장한 유언이 아닐 수 없다. 보훈처는 근거가 빈약한 자료를 친일의 증거로 제시할 일이 아니다.
 
봉오동 전투(1920. 6. 7.)당시 「대한북로독군부」 독립군이 썼던 태극기
▲ 피 묻은 태극기  봉오동 전투(1920. 6. 7.)당시 「대한북로독군부」 독립군이 썼던 태극기
ⓒ 독립기념관 소장 사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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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 전투' 100주년을 맞은 기념해인 올해 최진동 장군의 독립유공자 서훈을 박탈한 것은 보훈 정책이 잘못돼 가고 있음을 스스로 보여준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보훈처 심사위원들의 맹성을 촉구하며 최진동 장군에 대한 독립유공자 서훈 취소 결정을 다시 취소할 것을 기대한다. 그리고 보훈처의 반론 내지 답변을 환영한다.

태그:#봉오동 전투, #최진동, #최운산, #북로독군부, #홍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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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회원으로 가입하게 된 동기는 일제강점기 시절 가족의 안위를 뒤로한 채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펼쳤던 항일투사들이 이념의 굴레에 갇혀 망각되거나 왜곡돼 제대로 후손들에게 전해지지 않은 점이 적지 않아 근현대 인물연구를 통해 역사의 진실을 복원해 내고 이를 공유하고자 함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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