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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스 하나로, 할머니랑 조금 더 친해졌다.
 주스 하나로, 할머니랑 조금 더 친해졌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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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이거 하나 드세요."

볼일을 보러 집 밖에 나갈 때마다 늘 한 번씩 뵙는 분이 있었다. 내가 자주 다니는 길목의 한 자리를 지켰던 그 할머니는 화창한 날이면 늘 집 앞 의자에 앉아서 햇볕을 쬐길 좋아하셨다.

매번 마주칠 때마다 그냥 지나가기가 뭐해서 가벼운 인사를 주고받는 사이가 됐는데, 묵례를 하는 나에게 꼭 '키 크고 잘생긴 총각'이라며 칭찬 한마디를 붙여 주셨다. 한 번은 그냥 가기 뭐해서 슈퍼에서 득템한 1+1 오렌지맛 주스를 하나 드렸다. 그리고 할머니랑 조금 더 친해졌다.

하루는 쌀이 똑 떨어져서 마트를 가는데 내 텔레파시를 용케도 캐치하신 할머니가 집안으로 오라고 손짓을 하셨다. 살림살이도 별로 없는 휑한 방 하나가 보이고, 볕도 잘 안 드는 어둑어둑한 부엌에 내 손을 끌고 가시더니 1.5리터 페트병에 든 쌀 세 통을 얼른 가져가라고 하신다.

사실 처음엔 '묵은 쌀이라 입맛에 안 맞아서 나한테 떠넘기시나?'라는 얄궂은 의심도 들었지만, 동시에 먼 마트에서 쌀가마를 짊어지고 올 수고를 덜겠다는 생각이 번뜩 났다. 낼름 그것들을 받고 집으로 돌아왔다. 귀차니즘의 노예로서 최선의 선택을 한 셈이다.

며칠 후, 후덥지근한 여름철이라 시원한 게 당기던 참에, 용달차에 탄 수박 장수의 반가운 메가폰 소리가 들렸다. 만 원짜리 수박 한 통을 사서 냉장고에 넣어두려는 데 엊그제 어머니가 왕창 보내준 깍두기통이 들어차서 좀처럼 여유가 없었다.

젠장, 조금만 보내라고 그렇게 신신당부했건만 울 엄마 손이 좀 커야지. 역시나 짜증과 귀차니즘이 발동하고, 수박을 저녁으로 택한 것에 후회감이 밀려왔다. 그렇게 고민하다가 몽땅 화채를 해서 반은 냉장고에, 반은 이웃집 할머니한테 나눠드리겠다는 수를 짜냈다.

수박 화채 한 봉지를 들고 할머니 집 앞에서 노크를 했다. 몇 분을 기다려도 답변이 없길래 발길을 돌리던 참에 비로소 문이 열렸다. 초췌한 얼굴을 하고 나타난 할머니는 안 먹겠다며 고개를 가로저으셨다. 재차 권유를 드렸지만 '잘생긴 총각 많이 먹으라'며 한사코 마다하셨다. 간만에 맛깔나게 화채를 했는데, 속상한 마음만 안고 발길을 돌렸다. 

사이렌 소리, 집 앞에 나온 가구... 설마 했는데

그 이후로 할머니는 잘 보이지 않았다. 보름이 지나 쌀 세 통도 동이 나고, 감사 인사를 드리려고 한 번은 할머니 집 창문을 기웃거려 봤지만, 형광등 불도 켜져 있지 않고 영 인기척도 없었다. 또 며칠간 할머니 집 앞은 오래된 가구들로 붐볐다. '이사하려고 짐을 버리시는 건가?' 라는 생각이 들다가, 며칠 전 응급차 사이렌 소리를 들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설마' 하는 걱정이 가슴 속에서 솓구쳤다.

"탁-탁, 탁-탁"

심란한 마음을 추스리며 방안에 있는데 지팡이 짚는 소리가 들려서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도류 할머니'의 운동타임이다(*이도류 - 양손에 검을 한 자루씩 들고 싸우는 기술). 하루에 꼭 두 번, 양손에 쥔 두 개의 지팡이를 신나게 두드리면서 걷기 운동을 하는 또 다른 이웃 할머님께 내가 붙여준 별명이다. 나는 이도류 할머니를 급하게 불러 세워 질문 하나를 띄웠다. 이웃집 할머니의 유일한 말동무였기 때문이다.

"그 할머니 며칠 전에 죽었어. 반찬 배달해 주는 복지센터 직원이 발견했는데 입술이 시퍼런 채 누워있었다고 하더구만. 잘 죽었지 뭐, 호상이여 호상."

"아아… 돌아가신 거였군요. 근데 자식이나 돌봐주는 형제, 친척은 없어요?"

"없어. 그 양반, 월세도 몇 달째 밀려서 집주인이 방 빼라고 했는데, 자기는 여기서 죽어서 나갈 거라고 했더구만. 결국 그렇게 됐으니 소원 이룬 거지. 딱 아흔살에, 하하하… 그리고 나는 아흔 여섯 살이여. 나도 얼마 안 남았어, 갈 날이."


대화를 나누고 무거운 마음으로 다시 방 안에 들어왔다. 그리고 복잡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방세도 못 내고 궁핍한 생활을 하며 지내는 할머니한테 쌀 세 통의 의미는 남달랐을 텐데 왜 나한테 주신 걸까? 문득,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곡기를 끊는다는 엄마의 얘기가 생각나면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음료수 하나의 친절을 베푼 사람에게, 죽기 전 자신의 전부를 맡긴 게 아닐까? 그 쓸쓸한 단칸방에서 차가운 죽음의 그림자가 할머님 몸에 드리웠을 때 얼마나 무서웠을까? 수박 화채 대신 따듯한 죽 한 그릇이었으면 흔쾌히 받으셨을까? 마지막 숨을 거둘 때 옆에서 누구 한 명 손이라도 잡아줬으면 조금 더 나았을까?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하시라고 명함이라도 한 장 드릴걸. 고작 1분 거리인데 뭐가 어렵다고...

매일 고독한 하루를 견뎌낸다는 것  

그렇게 여름은 지나가고 스산한 바람이 부는 가을이 왔다. 집에 돌아올 때마다 늘 습관적으로 한 곳에 눈길이 갔다. 따스한 햇살 아래 실눈을 뜬 채 엷은 미소를 머금은, 그 할머니를 떠받쳤던 의자는 온데간데없고, 투박한 공사용 목재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할머니가 살았던 건물 전체는 리모델링 공사가 한참이었다. 마치 골치 아픈 세입자가 사라지길 기다렸다는 듯, 작업은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신나게 망치질을 하며 할머니가 살던 집 바닥을 뜯는 목수의 휘파람 소리가 참 서글프게 느껴졌다.

나도 가끔 마음이 적적할 때, 내 페이스북 글에 붙은 댓글들을 부질없이 두리번거리면서 타인의 온기를 찾을 때가 있었다. 누구나 고독한 하루를 묵묵히 견디다가도, 문 밖의 노크 소리 한 번 혹은 카톡 소리 한 번에 시린 가슴을 조금씩 데우며 그렇게 살아간다.

할머니가 나에게 그 나름대로의 특별한 '유품'을 주신 건, 지긋지긋한 고독의 장막을 깨트린 싸구려 음료수 하나 때문이 아니었을까. 지난 여름, 내 옆에서 스쳐 지나간 죽음을 목격하며 고독의 의미를 되새겨본다.

태그:#고독사, #고독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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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작가 김진수입니다. 게임,일상다반사 등 가슴에 맺힌 여러 생각들을 재밌게 써볼랍니다. 블로그 '소금불' 운영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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