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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암 나철선생 사진
▲ 홍암 나철선생 사진 홍암 나철선생 사진
ⓒ 김성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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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위기에 놓이면 간신배들이 설치고 이에 맞서 우국지사들이 나오게 되는 것은 고금이 다르지 않다.

송병준과 이용구가 친일 매국단체 일진회를 창립하고, 양기탁과 영국인 베델이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였다. 정부는 일본인 메가다 쇼타로를 재정고문에, 친일외교관인 미국인 스티븐스를 외교고문에 각각 임명하는 등 정부의 재정과 외교의 요직이 외국인(일본)의 손아귀로 넘어갔다. 

나철은 더 이상 산중에서 머물고 있기에는 나라 사정이 너무 긴박하게 흘러갔다. 이기를 만나 시국을 토론하면서 우선 일본인의 이민을 여권 없이 받아들인다는 정부의 정책에 항의하는 서한을 조종 대신 김가진(金嘉鎭)에게 보내기로 했다. 그가 사회적 문제에 처음으로 이름을 올린 사건이다. 이기가 기안하고 나철과 홍필주ㆍ이건 등이 연명한 「일인의 이민을 논박한 서한」의 요지다.

요즈음 신보(新報)를 보니 일본인들이 이민법을 개정하여 자유로 우리 나라에 올 수 있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그 신보의 기사는 대개 와전된 것이 많으므로 모두 믿을 수는 없지만 그 기사를 전혀 불문에 부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아! 지금 천하에 국가로 호칭한 나라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대소ㆍ강약은 비록 같지 않다 하더라도 이미 국가를 호칭하였다면 제각기 자기 땅을 국토로 인정하고 자기 백성을 국민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히 한국과 일본은 가까운 거리에 있어 사람들의 왕래가 다른 나라에 비해 그 수효가 매우 많으므로 우체국도 개설하고 병참도 설치하여 이미 우리 세대에 커다란 누를 끼쳤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광산을 독점하고 어채권(漁採權)을 침탈하여 우리 생활의 이윤을 앗아갔습니다. 그리고 전국 국민이 원망과 노기에 가득하고 있습니다.

아마 2~3년이 지나지 않아서 반드시 간과(干戈. 전쟁)를 서로 겨루게 될 것이니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지금 실기하여 나중에 후회하는 것보다는 일이 확대되기 전에 미리 준비해 두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지금 정부에서 시행하는 정책은 그럭저럭  간편하게 처리하고 있으나 우리는 아무 일이 없을 것이라는 행복한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람이란 걱정이 있으면 예방책을 마련하여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국력이 약하고 백성은 가난하여 일본인들이 우리를 두려워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오직 천하의 공법과 한일 양국의 약장입니다. 

그렇다면 항구에 파견된 관리들에게 엄한 칙령을 내리어 그 조례를 잘 지키도록 하고 한국에 있는 일본인은 입국한 지 오래 되었거나 새로 들어온 사람이거나를 막론하고 그들이 여권을 소지하고 있는지 호구마다 조사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들은 일본에서 도주한 호구일 것인데 어떻게 해서 이들을 장차 우리 국적에 입적시키려 하고 있습니까? (주석 3)


'포츠머스조약'으로 러일전쟁은 마무리되었지만 이 전쟁의 결과로 대한제국은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다. 강제로 체결된 '한일의정서'에서는 일본이 대한제국의 필요한 지역에 군대를 주둔할 수 있도록 하여 일본의 정치적ㆍ군사적 간섭의 길을 텄으며, '제1차 한일협약'으로 조선이 외국과의 조약 체결이나 그 밖의 주요 안건은 사전에 일본과 상의할 것을 규정하여 외교권을 간섭하였다. 일본군의 주둔을 허용하고 외교상의 행위를 일본과 상의토록 한 이 조약으로 대한제국의 국권은 크게 박탈되었다. 

포츠머스조약에서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러시아의 진출을 막기 위한다는 명분으로 일본의 조선 지배가 적절한 것이라고 인정해주었다. 미국의 필리핀 지배의 대가로 일본의 대한제국에 대한 종주권을 인정해준 것이다. 아시아에 많은 식민지를 갖고 있는 영국 또한 일본의 '대한제국보호조치'를 승인하였다. 

나철은 미국으로 가서 루스벨트에게 따지고자 준비를 서둘렀다.

조선은 1882년(고종19) 미국과 '조미통상조약'을 맺었다. 두 나라가 국교수립과 통상을 목적으로 맺은 조약이다. 구미제국과 맺은 최초의 조약으로 주요 내용에는 "제3국이 한쪽 정부에 부당하게 또는 억압적으로 행동할 때는 다른 한쪽 정부는 원만한 타결을 위해 주선한다."(제1조)고 약조하였다. 그럼에도 미국 정부가 일방적으로 일본 편을 들자 이를 따지고자 한 것이다. 

외교권을 장악한 일제가 이를 허용할 리 없었다. 결국 미국행을 중단하고, 침략의 당사자인 일본으로 가기로 동지들과 뜻을 모았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기 직전이다. 

그는 이에 앞서 1904년에는 이기ㆍ오기호(吳基鎬)ㆍ최동식(崔東植) 등 호남의 우국지사들과 유신회를 조직하여 국채상환운동과 애국계몽운동을 벌이고 애국계몽운동 단체 '호남학회'에 참여하면서 민중계몽과 국권회복운동에 나섰다.  


주석
3> 『해학유서(海鶴遺書)』 5권 「문록(文錄)」.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민족의 선각 홍암 나철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국난기와 국망기에 온몸을 바쳐 구국과 독립을 위해 나섰는데, 역사가 제대로 평가하지 않고 국민에게 잊혀진다면 어찌 건강한 사회라 할 것이며, 그것은 누구의 책임일까?
태그:#나철, #나철평전, #홍암 , #홍암나철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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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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