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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암 나철선생 홍암 나철선생
▲ 홍암 나철선생 홍암 나철선생
ⓒ 김성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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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부터 무척 영민했던 나철은 집에서 아버지로부터 한학을 공부하다가 아홉 살 때 서당에 들어갔다. 그때 만난 스승이 이웃 고을 구례에 살았던 천사(川社) 왕석보(王錫輔, 1816~?) 선생이었다. 사람은 언제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 운명이 달라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아들을 왕석보에게 맡긴 아버지의 혜안도 보통이 아니었던 것 같다. 

사회적 변환기에 지적 욕구와 호기심이 많았던 그에게 당시 호남 제일가는 학자 왕석보의 존재는 시골 소년의 운명을 온통 바꿔놓았다. 그는 유학자이면서도 전통적인 보수파 유생이 아니었다. 

왕석보가 길러낸 나철이나 해학(海鶴) 이기(李沂, 1848~1909) 그리고 매천 황현(1855~1910) 같은 제자들의 사상을 보면 제법 개화사상에 경도되어 있으나 이것은 자주적인 성향의 개화사상이었다.

왕석보는 다산 정약용의 국학사상을 물려받았고, 당시로서는 이단시했던 양명학에 밝았다고 전한다. 국학을 흔히 실학이라 하나 필자는 정인보의 말대로 국학이라 부르고 싶다. 

왕석보가 양명학에 밝았다는 것은 매우 진보적인 사상의 소유자였다는 뜻이다. 그래서 해학 이기와 매천 황현과 같은 애국적이면서 개혁적인 사상가를 배출했던 것이다. (주석 4)

 
홍암 나철선생 친필 홍암 나철선생 친필
▲ 홍암 나철선생 친필 홍암 나철선생 친필
ⓒ 김성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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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부터 개화된 스승에게서 세상의 흐름과 개화ㆍ진보의 가르침을 받고, 어느 때 부터인지는 정확하진 않지만, 역시 왕석보의 제자인 해학 이기와 만나 자주적 개화사상을 배우면서 시골 소년 나철은 의식이 크게 바뀌었다.

소년은 그동안 과거를 보기 위해 전통유학을 공부하는 한편 이기의 집에 소장된 단군 관련 서적을 비롯, 청나라 서적 등 각종 도서에 접하게 되었다. 이기는 나철보다 15세 연상이여서 삼촌 뻘이었으나 그는 나철을 무척 아끼고 동지가 되었다. 뒷날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서 민간외교를 벌이고 을사오적 척살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나철의 생애에 하나의 변곡점이 된 것은 어느 해 형과 함께 서울에 갔다가 구한말 정계의 거물 운양 김윤식(雲養 金允植, 1835~1922)를 만나 그의 식객된 일이다. 어떤 경로에서 시골의 무명 청년이 정계의 거물을 만나게 되고, 식객이 된 것인지, 저간의 사정은 알려지지 않는다.

10대 후반이 된 그는 형과 함께 상경하여 서울의 이곳저곳을 돌아보고 형님만 귀향하고 자신은 서울에 남게 되었다. 하루가 다르게 변전하는 시국에 시골 촌구석에서 살아갈 수 없다는 생각이었을 것이고, 왕석보와 이기 두 스승으로부터 배운 개화의 욕구때문이었을 터이다. 

김윤식은 1874년 문과에 급제하여 황해도 암행어사 등을 거쳐 1880년 순천부사에 임명되었다. 이 때에 어떤 인연으로 나철이 김윤식을 만났을 지도 모른다. 김윤식은 친청파로서 중국에서 북양대신 이홍장과 7차에 걸쳐 회담을 하고 그 결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었다. 어윤중 등과 흥선대원군 제거 방략을 제의하여 실현시켰는가 하면, 1884년 갑신정변이 발발하자 청나라의 실력자 위안스키에게 구원을 요청, 청국 군대와 함께 창덕궁을 점거하고 있던 일본군을 공격, 패퇴시킴으로써 정변을 종식시켰다. 이후 병조판서를 역임하고 있었다. 

나철은 김윤식의 도움으로 과거준비를 하게 되고 29세인 1891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급제하지 않고서는 관직에 나아갈 수 없는 시대여서 늦은 나이지만 과거에 나선 것이다. 그리고 김윤식의 작용이었는지, 자신의 실력 때문인지 요직에 발탁되었다.  

같은 해 최고의 요직인 승정원 가주서(假注書)로 임명되어 고종 임금을 알현하고 사무에 임했다. 가주서란 기거주(起居注)라는 별칭으로도 불리는 벼슬로서, 임금의 모든 움직임을 친히 모시면서 기록하는 사관(史官)이다. 따라서 시골의 한빈(寒貧)한 유생 출신의 나철로서는 출세를 위한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그는 고종의 총애를 받으며, 31(1893년) 세에 병조사정(兵曹司正)에, 그리고 같은 해 몇 개월 후에는 승정원 부정자(副正字)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10여일 근무 후에 사직서를 내고 낙향을 한다. 그리고 33세인 1895년에는 징세국장(徵稅局長)에 임명되지만 사양하고 끝내 취임하지 않았다. 개인적 영달의 길을 스스로 포기하고 우국의 험한 길을 택한 것이다. (주석 5)


보통의 유생이라면 사관(士官)에 이어 오늘에 치면 국세청장의 자리를 헌신짝 버리듯 포기하고 낙향하기란 여간해서 쉽지 않는 결단이었다. 그로부터 10년 뒤인 1905년 단재 신채호가 성균관 박사를 버리고 재야의 길로 매진한 일의, 선행(先行)이었다고 하겠다.


주석
4> 앞의 책, 32쪽. 
5> 김동환, 「2005년 9월, 이달의 문화인물 나철」, 3쪽, 문화관광부.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민족의 선각 홍암 나철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국난기와 국망기에 온몸을 바쳐 구국과 독립을 위해 나섰는데, 역사가 제대로 평가하지 않고 국민에게 잊혀진다면 어찌 건강한 사회라 할 것이며, 그것은 누구의 책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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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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