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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에 먹는 음식은?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주관식 문제였다.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아, 그렇구나. 그럴 수 있겠다, 라는 순진하다 못해 기초 상식이 전혀 없어 무식한 나는 우리 집에서 가장 귀한 음식을 묻는 질문으로 받아들였다.

우리 집에서 가장 귀한 음식은 뭘까? 가장 귀해서 아껴 먹는 음식. 일 년에 한 번 겨우 먹을 수 있는 음식. 난 한참을 고민하다가 설날에 먹는 음식이라는 질문에 '누룽지'라고 썼다.
 
 솥밥 누룽지도 맛있지요.
 솥밥 누룽지도 맛있지요.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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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에는 누룽지가 귀했다. 압력밥솥 바닥에 들러붙은 밥풀에 물을 자작하게 끓여 뽀얗게 우러나오는 누룽지는 식사를 마친 아빠의 몫이었다. 하얗게 김이 올라오는 누룽지 한 그릇을 아빠가 후후 불며 후루룩 드시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얹힌 속이 다 내려가는 거처럼 개운해 보였다.

단숨에 그릇을 비워내는 아빠를 보면서 나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음식은 저것일지도 모른다고 굳게 믿었다. 나는 구수한 누룽지가 정말 먹고 싶었으나 1남 2녀의 막내로 서열이 가장 낮았기에 내 차지가 될 수 없었다. 한 대접의 모락모락 피어나는 누룽지는 엄마가 아빠에게만 차려주는 특별한 만찬과도 같았다.

설날에 먹는 음식이 떡국이라는 걸 정확히 모르기도 했지만, 설날 대표 음식 떡국과 추석 대표 음식 송편을 물리치고 나에게 가장 귀한 음식은 누룽지였다. 혹시나 맞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아주 작은 글씨로 썼던 누룽지. 자신 없이 조그맣게 쓴 누룽지라는 글자에서 퍼져 나오는 초라함에 틀렸다는 채점의 작대기가 그어졌을 때 내 마음에도 스크레치가 생겼다. 마침 우리 집에 놀러 온 옆집 아주머니는 그 시험지를 보고 숨도 못 쉬며 배꼽 빠지게 웃으셨다지.

가장 귀한 음식이라 여기던 누룽지가 틀리다니. 내 마음이 들킨 거 같았다. 정답인 떡국에 비해 초라해 보이던 누룽지가 내 차지도 될 수 없었다는 걸 들킨 거 같았다. 밥이 눌어붙은 누룽지마저 눈치를 봐야 했던 내 마음이 그때만큼은 새카맣게 타버렸다. 이 사실을 마음속에 비밀처럼 간직했다가 이제야 밝힐 수 있는 걸 보니 엄청 슬펐던 모양이다. 뜬금없이 아들에게 "설날에 먹는 음식이 뭐게?"라고 묻기도 했지만.

"오늘 아침에 뭘 먹고 싶냐?"는 나의 물음에 아이는 "누룽지"라고 대답한다. 입맛 없을 때 누룽지에 김치 한 조각 올려두고 먹는 그 맛을 너도 아는구나. 또는 김 한 장 올려두고 먹는 그 맛은 얼마나 착 감기는지. 젓갈을 올려두고 먹으면 환상이지.

임신하고 입덧이 심해 아무것도 먹지 못했을 때 누룽지와 동치미만 겨우 먹을 수 있었다. 그것이 아이도 누룽지를 좋아하는 이유일까. 남편은 왜 그런 걸 먹냐고 하지만 다른 반찬이 따로 없어도 누룽지를 먹고 마시면 속도 편안하고 영혼까지 맑아지고 깊어지는 기분이다.

지금도 누군가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먹어본 음식과 먹어보고 싶은 음식 사이에서 엄청 고민하다가 조용하게 또 자신 없이 대답할지도 모른다. 그건 바로 누룽지라고. 누룽지 한 그릇으로 세상을 다 얻은 거 같았던 어린 시절의 빈 그릇을 더듬어 따끈한 누룽지를 한가득 담아본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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