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친일한 사람들은 당대에 떵떵거리며 자식을 유학 보내면서 해방 후에도 후손이 잘살 수 있었고, 독립운동 하신 분은 가족을 제대로 못 돌봐 뿔뿔이 흩어지거나 제대로 교육시키지 못해 자식까지 오랜 세월 고생해야 했습니다. 아주 먼 여러 나라에서 이렇게 흩어져서 살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 독립운동가들의 후손이 겪어야 했던 여러 가지 고생들을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싶습니다."

2019년 3월 4일 문재인 대통령이 8개국 64명의 독립유공자 후손들을 초청한 자리에서 언급한 내용이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현재 해외에는 많은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살고 있다. 미국 플로리다 지역만 하더라도 삼일절 또는 광복절 기념식 등에서 독립운동가 후손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이들 중에는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일찍 인정을 받은 분들이 있는가 하면, 이런 저런 규정 때문에 방치돼 있는 분들도 있다. 먼 나라에 뿔뿔이 흩어져 사는 후손들은 독립운동가 선조에 대한 것은 물론 자신이 그 후손이라는 사실마저도 가물가물 잊고 살아간다.

"할아버지는 백범 선생도 인정하는 독립운동가"

최근 기자가 '독립운동가 후손 찾기' 시리즈를 시작하자, 여기 저기서 직·간접적으로 여러 건의 제보가 들어왔다. 그 가운데는 까맣게 잊고 있던, 어쩌면 짐짓 모르는 척 숨겨뒀던 선조들의 이야기를 '이제는 말할 때가 됐다'는 듯 조심스럽게 운을 뗀 동포들도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보자. 이승만 정권의 '반민특위' 해체로 한국 현대사는 시작서부터 절망적이었다. 혈서로 천황폐하에게 충성을 맹세한 친일파 대통령과 그 아류들의 몸보신용 반공주의는 독립운동을 폄하했다. 그러더니 이젠 아예 '독립운동가=좌빨'이라는 등식으로 '학대'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이 같은 상황에서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나는 독립운동가 후손입네!'라고 말하기 마뜩잖을 터다. 
 
 인터뷰 후 포즈를 취한 미국 플로리다 잭슨빌 거주 정상호(82)씨. 그의 할아버지 정달하 선생은 <백범일지>와 <한국독립운동사>에도 등장한다.
 인터뷰 후 포즈를 취한 미국 플로리다 잭슨빌 거주 정상호(82)씨. 그의 할아버지 정달하 선생은 <백범일지>와 <한국독립운동사>에도 등장한다.
ⓒ 김명곤

관련사진보기

 
미국 플로리다 잭슨빌에 거주하는 은퇴 의사 정상호(82)씨가 "우리 할아버지가 '백범일지'에 나오는데, 이거 말해도 될까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가 말한 대로 살만큼 살았고 별다른 평지풍파 없이 말년을 보내고 있는데, 100년 된 할아버지 이야기로 이래저래 오해를 살 것 같은 두려움이 묻어 있었다.

1973년 미국으로 유학 온 이후 47년 동안 플로리다 잭슨빌에서 의사로 살아온 정상호씨의 집안 내력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정씨는 한인회장을 여러 차례 역임하고, 흑인 빈민가에서 의료활동을 하며 자연스레 지역 주류 매체는 물론 한인 신문들과 몇 차례 인터뷰를 했다. 그러나 그의 할아버지가 독립운동가로, <백범일지>에 등장한다는 사실을 밝힌 적은 없었다.

그를 만나기 전 전화로 먼저 확인하면서 그의 할아버지가 독립운동사에 등장하는 유명한 '105인 사건(일명 안악 사건)'에 연루된 인물 중 하나라는 이야기를 듣고 귀가 번쩍 뜨였다. '105인 사건'이 뭔가. 1911년 조선총독부가 조선의 식민통치를 강화하고, 반일 민족 저항세력들의 민족해방운동을 탄압하기 위한 목적으로 다수의 신민회[1907년 초에 무실역행(務實力行)을 방향으로 삼고 안창호, 이동녕, 이승훈 등이 비밀리에 조직한 항일단체] 회원들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을 체포·고문해 투옥한 사건이다.

일제는 1910년 12월 데라우치 총독이 압록강 철교 개통식에 참석하기 위해 서북지방을 순방할 때 신민회원들과 황해도 안악군 일대의 지식층과 재산가 600여 명이 공모하여 그를 암살하려 했다고 억지 주장을 하며 대대적인 검거 작전에 돌입했다. 안악 사건으로 체포된 인사들 중에는 김구(金九), 김홍량(金鴻亮), 최명식(崔明植), 이승길(李承吉), 도인권(都寅權), 김용제(金庸濟), 이유필(李裕弼) 등이 있었다. 이들은 안악의 양산학교(楊山學校)와 면학회(勉學會)를 중심으로 애국계몽·구국운동에 헌신한 독립지사들이었다.

일본 경찰은 600명을 체포·고문을 자행한 끝에 거짓 자백을 받아냈고, 이 가운데 123명을 혐의자로 기소했다. 무려 20회의 재판을 진행한 끝에 105인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면서 '105인 사건'이란 이름으로 널리 알려지게 됐다.

정상호씨는 자신의 할아버지가 안악 사건에 연루돼 있고, 이 같은 사실이 <백범일지>에도 나온다고 했다. <백범일지>는 한국의 청소년들부터 어른들에 이르기까지 널리 읽힌 책이다.

기자의 서고에 꽃혀 누렇게 변한 1983년 발행된 7판 <백범일지>(1979년 초판 발행)를 뒤져보니 162쪽에 '정달하(鄭達河)'라는 이름이 들어 있었다.
 
이번 통에 잡혀온 사람들은 황해도에서 안명근을 비롯하여... 재령에서 정달하, 민영룡, 신효범, 안악에서 김홍량, 김용제, 양성진, 김구... 경성에서 양기탁, 김도희, 강원도에서 주진수, 함경도에서 이동휘가 잡혀와서 다들 유치되어 있었다.
 
 정달하의 독립운동 사실이 기록된 백범일지, 왼편은 1989년판(서문당), 오른편은 1979년판(3판, 교문사).
 정달하의 독립운동 사실이 기록된 백범일지, 왼편은 1989년판(서문당), 오른편은 1979년판(3판, 교문사).
ⓒ 김명곤

관련사진보기

  
이름도 쟁쟁한 60여 명의 독립운동가들 가운데 열한 번째로 거명된 '정달하'는 같은 책 177쪽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에서 1년을 선고받은 6명 가운데 하나로 기록돼 있었다. 김구 선생은 양기탁(주범), 김홍량 등과 함께 같은 보안법으로 2년을 선고받았고, 앞서 강도범으로 15년을 선고 받았다.

정달하에 대한 기록은 1989년에 발행된 <원본 백범일지> 190쪽과 208쪽에도 같은 내용으로 각각 나와 있었다. 정상호씨는 출판 연도를 알 수 없는 다른 <백범일지> 200쪽에도 할아버지 '정달하'에 대한 기록이 나와 있다며 기자에게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복사본으로 이를 확인해줬다.

그런데 독립운동가 정달하에 대한 기록은 우연하게도 역사학자이자 전 <오마이뉴스> 편집국장 정운현(이낙연 전 국무총리 비서실장)의 글에서도 기적처럼 발견됐다. 기자가 오래 전 오려뒀던 그의 '역사에세이'에서였다. 이 사실을 기자로부터 전해들은 정씨는 "<백범일지>를 제외하고는 처음 발견된 할아버버지 이름"이라며 뛸 듯이 기뻐했다.

국권회복 운동에 거금 3000원 기탁한 정달하

정운현은 2011년 백범의 친구이자 변절 친일파 김홍량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해 독립기념관에서 구축한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의 기록을 인용했는데, 그 가운데 정달하와 관련한 기록이 나온다.
 
정달하(鄭達河)와 함께 안동현(安東縣)에 이주하여 이곳에서 농업과 무역회사를 공동 경영하면서 이곳에 독립군 기지와 무관 학교를 설립하여 한국 청년들을 훈련시켜서 독립 전쟁을 일으켜 국권 회복을 이룩할 준비로서 1910년 12월 김홍량이 8500원, 정달하가 3000원을 내고 본격적 준비를 진행하였다.

위의 기록을 역사적 사실에 토대해 좀 더 풀어쓰면, 양기탁·안창호 등에 의해 결성된 신민회가 만주에 무관학교를 설립하는데 안악읍에 양산학교를 설립해 교육구국운동을 전개하던 김홍량과 만석꾼 정달하가 투척한 거금이 결정적 밑천이 되었다는 것이다.

민속문화대백과사전 등에 따르면, 당시 경인선 여객 운임이 1등석 1원 50전, 보통학교 수업료 1원(1919년), 보통 사람 하루 생활비 5∼20전(1925년)이었다. 현재 화폐 단위로 환산하면 정달하가 기부한 금액은 최소 수억 원에서 수십억 원에 해당한다.
 
 용산구청이 발급한 정달하(鄭達河) 선생 호적 등본.
 용산구청이 발급한 정달하(鄭達河) 선생 호적 등본.
ⓒ 정상호

관련사진보기

    
독립운동가 정달하에 대한 인적 기록은 정상호씨가 보관하고 있는 호적 등본에 잘 나와 있다. 호적 등본에는 출생연도가 나와 있지 않으나, 1800년대 중 후반(1850~1870년) 출생으로 짐작되는(정상호씨 추정) '재령 사람 정달하'는 슬하에 4남 2녀를 뒀다. 그의 둘째 아들 정선규의 2남 5녀 가운데 차남이 정상호씨다.

할아버지와 1년을 함께 산 정씨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정달하는 검은 두루마기를 입고 늘 성경을 끼고 사는 분이었다. 정달하는 초시에 합격해 보통 양반 가문 자제들이 꿈 꾸는 출세의 가도가 눈앞에 펼쳐지는 듯했으나, 막 외세가 밀고 들어오던 조선 말엽은 청년들의 꿈을 뒤틀어놨다.

특히 정달하의 삶의 본거지인 황해도 재령과 안악 지역은 구한말과 일제 초기에 양산학교를 중심으로한 교육구국운동의 중심지로 떠올랐고, 정달하로 하여금 자연스레 독립운동 그룹에 합세하게 만들었다. 일찍이 받아들인 기독교와 신학문의 영향이기도 했다.

정상호씨는 양조장을 운영하며 지역 토호였던 할아버지가 <백범일지>와 독립운동사에 족적을 남길 만큼 삶을 바쳤으나, 국가보훈처가 '재판 기록이 없다'며 독립운동 유공자로 인정하지 않고 있는 현실을 크게 아쉬워 하고 있다. 정씨는 수차례 고국을 방문하여 전국의 형무소를 뒤졌으나 할아버지의 재판기록을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 할아버지에 그 손자... 이기붕 단죄한 독립운동가 후손
 
 정씨가 1960년 4.19 당시 이기붕의 저택 담을 넘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정씨가 1960년 4.19 당시 이기붕의 저택 담을 넘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 김명곤

관련사진보기

 
정씨는 플로리다 북동부 잭슨빌에서만 무려 47년간 의사로 지냈다. 그 가운데 36년 동안 누구도 오가길 꺼려하는 '잭슨빌 할렘가'(45th St.)에서 의술을 펼친 정씨는 지역에서 '살아있는 슈바이처'로 불린다.

지금도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흑인들은 먼 발치에서도 금방 그를 알아보고 "하이, 닥터 정!" 하며 인사를 한다. 지역 주민들 가운데는 4대째 그의 치료의 손길을 거쳐간 흑인 가정이 한 둘이 아니다. 이 경력으로 LA폭동 당시 들썩이던 북부플로리다지역 흑인 민심을 달래는 데 일등공신 역할을 한 사실이 한국에까지 알려져 국무총리 표창까지 받았다.

독립운동가 할아버지를 둔 정씨의 이력 속에는 의사로서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것 외에도 젊은 시절 한 때 '사회를 구하는 일'에 나선 것도 눈에 띈다. 그는 부패한 사회가 신음하고 있던 시절, 역사의 부름에 팔을 걷고 나선 열혈 운동권 학생이었다.

때는 1960년 이승만 정권의 3.15 부정선거로 온 대한민국이 들끓고 있던 시기였다. 3월 26일 담화 발표가 난 후 4월 21일 발포로 시위가 주춤했고, 27일쯤 운동권 학생들이 부정선거 원흉 이기붕 체포 작전에 들어갔다. 학생들이 이기붕의 거처를 밤새 돌다가 담을 넘어 들어갔는데, 당시 전위에 선 학생들 가운데 하나가 고대생 정상호였다.

그날밤 정씨는 뜻밖에 역사적 '문건' 하나를 건져낸다. 이기붕의 부인 박마리아의 쫄쫄이 신발이 나딩굴던 집안 한켠에 비단 필 등 축재한 물품들이 쌓여 있었는데, 그 주변에서 이승만에게 양야들로 보내진 이강석의 파카를 발견했다. 주머니에서 뭔가 떨어져 주어보니 글귀가 적힌 두루마리였는데, 거기엔 놀랍게도 경자년 새해에 이기붕에게 세배차 방문한 412명의 정·재계 인사 명단과 물품 목록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정씨가 수확한 이 '문건'은 다음날 눈치빠른 기자에 낚여 1면 기사로 대문짝만하게 올려져 세상을 놀라게 했다. 정씨는 당시에 주운 자료를 지금도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다.
 
 열혈 고대 운동권 학생 정상호가 4.19 혁명 당시 이기붕의 저택 담을 넘어 들어갔다 획득한 '경자신년하객방명록'(좌). 방명록에는 몽양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의 이름이 들어 있다.
 열혈 고대 운동권 학생 정상호가 4.19 혁명 당시 이기붕의 저택 담을 넘어 들어갔다 획득한 "경자신년하객방명록"(좌). 방명록에는 몽양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의 이름이 들어 있다.
ⓒ 김명곤

관련사진보기

 
정씨는 데모가 끝나고 자유당 정권이 몰락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세배자 명단에 들어있던 여운홍(몽양 여운형의 동생으로 당시 자유당 선전부장)이 참의원에 출마하려고 한 사실을 알게된다. 격분한 정씨는 "당신은 독재세력의 주구 가운데 하나로 학생들의 무죄한 피를 흘리게 한 장본인인데, 어찌하여 그 피를 이용해 출세하려 드는가"라며 질타했고, 놀란 여운홍의 측근들이 그를 만나 회유를 시도했다고 한다.

평소 웬만한 일에 별 말씀이 없고 칭찬도 없으시던 아버지는 정씨의 당찬 행동과 의기에 팔을 붙들고 흔들며 "잘했다! 잘했다!"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고 한다.

열띤 어조로 '운동' 경력을 쏟아놓는 팔순 정씨의 눈빛에서 '독립운동가 정달하'의 모습이 자연스레 그려졌다. '민족적 정기'라는 것이 기본적으로는 불의와 불합리에 대한 항거에 근거한다는 점에서 그와 그의 할아버지는 100년을 건너뛰어 '통'하는 게 아닐까.

정씨는 최근까지 논란이 수그러들지 않고 있는 친일파의 국립묘지 안장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을 쏟아내며 인터뷰 말미를 무겁게 장식했다.

"친일파들이 국립 현충원에 묻힌 것은 도둑놈 심보입니다. 그 후손들은 얼마나 양심에 찔리며 불안하겠습니까. 양심이 살아있다면 거기서 옮겨가야 합니다. 한국 가서 보니 자격 없는 사람들이 여기 저기 찾아다니며 서명 받아 독립유공자 후손으로 인정받는다는 얘기 듣고 정말 충격 받았어요. 이래저래 구차해서 단념하고 돌아왔습니다. 할아버님께는 후손된 도리를 다 하지 못해 참 죄송하지만요."

[지난 기사]
① "네놈이 헛짓을 했구나!" 아들이 벌어온 거금, 불쏘시개로 쓴 독립운동가 http://omn.kr/1kgnh 
② 이완용 집에 불지른 아버지, 만세운동 앞장선 두 아들  http://omn.kr/1l5ew

③ '독을 차고' 김영랑 시인의 항일과 아들이 밝힌 비화  http://omn.kr/1llpx
 

덧붙이는 글 | 세계한인언론인협회 홈페이지(okja.com)에 올려진 글을 수정·보완했습니다.


댓글9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