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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 국경역 프브라니치나야 플랫폼(2009. 10. 30. 촬영).
 러시아 국경역 프브라니치나야 플랫폼(2009. 10. 30. 촬영).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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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침묵이 이롭다

러시아와 중국의 국경인 포브라니치니야 역에서 러시아 관리가 뭐라고 묻는데 나는 무슨 말인지 몰라 입을 꽉 다물고 여권만 보여줬다. 그러자 그 관리는 내게 한참 질문을 했다. 내가 대답하지 않은 채 고개를 흔들자 그는 씩 웃고는 통관 스탬프를 '쾅' 찍어줬다.

때로는 침묵이 이롭다. 세상을 살다보면 잘 알지 못하면서도 함부로 지껄이다가 화를 입는 일이 많다. 그래서 "혀 밑에 도끼 있다"는 속담도 생겨났다. 변화무쌍한 게 세상사다.

국경지대에서는 사진 촬영에 주의해야 한다. 이전에 나는 중국 단둥에서 국경 압록강의 사진을 찍다가 공안에게 걸려 된통 혼이 난 적이 있었다. 그 일로 우리 일행의 하루 일정을 망쳐버렸다. 이후 국경 일대에서 사진을 찍을 때는 무척 조심한다.

중러 국경인 포브라니치니야 역은 안중근이 한의사 유경집의 아들 유동하를 대동케 한 국경 역이다. 유동하를 얘기하자면 답사자로서 빠트릴 수 없는 지명이다. 그래서 주변을 두세 번 살핀 뒤 007 제임스 본드처럼 슬쩍 한 컷 카메라에 담고는 카메라조차 가방 속에 감췄다.

다시 중러 국경인 중국 측 쑤이펀허 역에서 중국 관리들에게 입국 통관절차를 밟았다. 그런 뒤 그곳을 떠날 때까지 무려 5시간을 텅 빈 객차 안에서 대기해야만 했다. 내 인내력을 시험하는, 중국인들의 '만만디', 곧 '느림의 미학'을 마냥 즐긴 여행이었다. 
 
 안중근 의사의 의거지 표지(세모꼴)에서 김우중 선생이 이토히로부미가 쓰러진 자리(마름모꼴)를 권총 사격자세로 가리키고 있다(2009. 10. 31. 촬영).
 안중근 의사의 의거지 표지(세모꼴)에서 김우중 선생이 이토히로부미가 쓰러진 자리(마름모꼴)를 권총 사격자세로 가리키고 있다(2009. 10. 31. 촬영).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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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 역 플랫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차를 탄 지 꼬박 40시간 45분 만인 2009년 10월 31일 오전 7시 45분, 마침내 하얼빈 역에 도착했다. 내 생애에 가장 길고도 지루한 열차 여행이었다. 하차한 뒤 무거운 가방을 어깨에 메고, 또 다른 하나는 끌고 출구로 나가는데 역구내 계단에서 낯익은 노인이 나를 향해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하얼빈 거주 동포 김우종 선생이었다. 그분은 하얼빈 거주 조선족사학자로 헤이룽장성 공산당사연구소장이었다. 검은 오버코트와 털모자에 장갑을 낀 그분의 모습은 얼핏 마오(毛) 주석 같았다. 꼭 10년만의 재회였다. 우리는 악수만도 부족해 두 손을 치켜든 채 포옹까지 했다.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에서 수분하(쑤이펀허)를 거쳐 열차로 하얼빈에 오는 박 선생의 그 열정에 정말 감읍했소."
"이른 아침 플랫폼에까지 마중을 나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내 평생 하얼빈 안 의사 답사자를 숱하게 만났지만 박 선생처럼 해삼위에서부터 곧이곧대로 열차를 타고 온 이는 처음 보오. 그 열정에 내가 여기까지 마중을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소."

우리는 곧장 거기서 멀지 않은 역구내 안중근 의거 터로 갔다. 내가 처음 하얼빈을 답사했을 때인 1999년 하얼빈 역 플랫폼 의거 장소엔 아무런 표지가 없었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그때는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총을 쏜 자리에는 세모표, 이토가 총을 맞고 쓰러진 자리는 마름모꼴 표시해두고 있었다.
     
 안중근 의사가 발사하여 이토히로부미를 관통한 탄알(일본 헌정기념관 소장).
 안중근 의사가 발사하여 이토히로부미를 관통한 탄알(일본 헌정기념관 소장).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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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야이지스고(채가구) 역 

첫 답사 이후 나의 저서(항일유적답사기)와 오마이뉴스 기사에 안 의사 의거지에 아무런 표지도 없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었다. 그 때문인지, 하얼빈 거주 교민회와 광복회 등 국내 보훈단체에서 중국과 교섭한 결과, 하얼빈 역 플랫폼 의거 터에 표지된 것은 대단히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날 하얼빈 역 플랫폼 답사를 마친 뒤, 김우종 선생의 안내로 한 숙소에 짐을 풀었다. 곧장 샤워를 한 뒤 아침밥을 먹고 본격 하얼빈 답사에 나섰다. 안 의사가 의거한 뒤 러시아 헌병대에서 이송된 하얼빈 일본총영사관 지하실, 안 의사가 하얼빈에서 머물렀던 동포 김성백의 집과 하얼빈공원(현재 지명은 이조린공원) 등지를 두루 답사했다.
    
 채가구 역 표지판
 채가구 역 표지판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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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2009. 11. 1)은 답사 7일째로 지야이지스고(채가구) 역으로 갔다. 2000년 제2차 항일유적답사 때 이곳을 거쳐 갈 때만도 그 역사(驛舍)는 옛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새 새 역사로 황토색 페인트를 흠뻑 뒤집어쓰고 있었다. 나는 역원의 허락을 받은 뒤 역사 안팎을 카메라에 부지런히 담았다. 그런데 안중근의 동지였던 우덕순과 조도선이 오들오들 떨면서 이틀을 묵은 역 구내매점과 식당은 끝내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새 역사를 지을 때 모두 없앤 모양이었다. 중국도 한국처럼 농촌인구가 급격히 줄어든 모양으로 지야이지스고 역 부근에는 사람은 거의 볼 수 없었고 찬 북풍만 몰아쳤다.
 다롄 역
 다롄 역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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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롄

애초에는 그 길로 창춘에 간 뒤 거기서 1박하는 여정이었다. 하지만 김우종 선생님의 소개장을 창춘 역원에게 보여주자 그는 갑자기 태도가 변하더니 그날 밤 다롄으로 가는 특급 침대열차가 있다고 말했다. 중국 전역에서는 공산당원의 위력은 대단했다. 나는 그 소개장으로 귀한 열차표를 웃돈 없이 살 수 있었다. 그래서 횡재한 기분으로 그날 밤 창춘에서 묵지 않고 대합실에서 대기 후 다롄으로 가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2009년 11월 2일 새벽에 도착한 곳은 다롄이었다. 다롄대학교유병호 교수가 소개해준 다롄 안중근연구회 박용근 회장의 안내로 그날은 다롄 시내의 일제강점기 유적지를 둘러봤다. 

먼저 일본조선은행 다롄 지점을 갔다. 그곳은 서울 소공동의 한국은행 본점을 보는 듯 똑같았다. 그곳에 이어 옛 일본관동군사령부로 가자 지난날 일본의 욱일승천기 대신에 오성홍기가 펄럭였다. 지금은 다롄인민정부 청사로 쓰고 있었다.

다롄 시내 거리에는 그때까지 일제강점기 때 쓰던 전차가 그대로 굴러가고 있었다. 아무튼 다롄은 일제강점기의 흔적이 그때까지도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2009년 11월 3일은 답사의 마지막 여정으로 뤼순 일대 항일유적지를 둘러보았다.

첫 답사 지는 옛 일본 관동지방법원이었다. 그 건물은 현재 뤼순구 인민병원으로 쓰이고 있다. 옛 뤼순지방법원 법정으로 들어가자 1910년 그때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법정 벽에는 안중근 의사의 사진과 이토 히로부미 죄상 15개 항이 한글과 한자로 액자에 담아 걸어두고 있었다.

법정 옆 전시실에는 안 의사가 감옥에서 재판정으로 오갈 때 탄 마차 수레와 '筒帽(통모, 용수)'가 전시됐고, 이어 법원장실, 검찰관장실 등이 있었다. 뤼순감옥은 뤼순법원과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뤼순 감옥
 뤼순 감옥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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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순감옥

안중근이 1909년 11월 3일부터 1910년 3월 26일까지 145일간 수감됐던 곳이다. 안중근 의사의 숱한 유묵에 '庚戌二月(또는 三月) 旅順獄中 大韓國人 安重根'이라는 글로 우리에게 매우 익은 장소이기도 하다.

여순 감옥 내부를 관람하는 가운데 마침내 '조선애국지사 안중근을 구금했던 방'이라는 안내판 옆에는 안중근 의사의 감방이 있었다. 쇠창살 틈으로 들여다본 안 의사의 감방은 1인용 특별실이었다.

감방 내 왼편에는 딱딱한 나무침대 위에 담요가 깔려 있었고, 오른편 책상에는 의자와 함께 안 의사가 쓰던 필기도구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감방 내부는 마치 안 의사가 글씨를 쓰다가 잠시 나들이 간 듯 꾸며놨다.

나는 뤼순감옥을 나온 뒤 박 회장에게 뤼순감옥 묘지 안내를 부탁드렸다. 감옥 묘지로 찾아가는 길옆에는 그 무렵 온통 고층 아파트들이한창 들어서고 있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하는데 그새 100년이 지났으니, 이곳인들 어찌 변치 않겠는가. 게다가 일제가 안중근 의사의 무덤을 제대로 남겼겠는가. 설사 남겼더라도 일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 유해로 남아 있을 가능성은 거의 희박하다.

하지만 뤼순감옥 묘지 흙에는 안중근 의사의 육신과 넋이 그대로 녹아 있을 것이다. 나는 이 흙이나마 한 줌 담아다가 광복 후 백범 선생이 효창원에다 가묘를 한 안중근 의사 묘지에다가 덮어주고 싶었다.

박 회장은 뚜벅뚜벅 앞장서서 가다가 한 돌비석 앞에 섰다. 흰 비석에 '뤼순감옥구지묘지(旅順監獄舊址墓地)'라고 새겨 있었다. 안중근 순국 후 일제는 안중근 묘역을 특별히 표시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100년이 지난 지금 정확한 지점을 찾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나는 그곳에는 안중근 의사의 육신과 넋이 배어있으리라고 판단한 다음 그 자리에서 꿇어 절을 두 번 드렸다. 그런 뒤 두어 줌 흙을 비닐주머니에 담은 뒤 하산했다.
  
  기자가 옛 뤼순감옥 사형수 묘지의 흙을 담아 오다(2009. 11. 3.).
  기자가 옛 뤼순감옥 사형수 묘지의 흙을 담아 오다(2009. 1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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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회에 이어집니다. 이 연재는 78화로 끝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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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년 교사생활 후 원주에서 지내고 있다. 장편소설 <허형식 장군> <약속> <용서>, 역사다큐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사진집<지울수 없는 이미지> <한국전쟁 Ⅱ> <일제강점기> <개화기와 대한제국> <미군정 3년사>, 어린이 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 <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 <독립운동가, 청년 안중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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