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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두산 정상에서 바라본 조국강산.
 백두산 정상에서 바라본 조국강산.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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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기념관

그날 우리는 숙소로 돌아와 긴급회의를 가졌다. 이도영 박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현재 우리로서는 퍼즐 게임처럼 여러 문서에서 그 진상을 추정하여 진실을 짐작하는 방법밖에는 도리가 없습니다. 백범 배후를 알 수 있는 딱 부러진 문서를 찾기란 현재로서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많은 세월이 흐른 뒤 미국 당국이 스스로 진실을 발표하거나, 한국 정부가 외교 채널로 정식 요청하여 비밀문서 열람을 하지 않고서는…."

그날 회의 결론은 갑론을박 끝에 북데기(짚이나 풀 따위가 함부로 뒤섞여서 엉클어진 뭉텅이)에서나마 알곡을 찾자는 데 모아졌다. 이튿날부터 우리 김구 팀은 눈알이 볼가지도록 북데기 문서를 뒤졌다.

2004년 2월 25일, 나와 권 선생은 이도영 박사의 안내로 버지니아 주 남단 노퍽(Norfolk) 시의 맥아더기념관으로 갔다. 맥아더기념관 자료실은 단층으로 조촐하게 꾸며져 있었다. 맥아더가 생전에 소장하였던 도서와 재임 때 받은 선물들이 잘 진열돼 있었고, 자료실에는 수많은 파일들이 잘 갈무리되어 있었다.

도착 즉시 맥아더기념관 자료실에 비치된 영상자료 비디오를 틀었다. 1950년 5월, 한국전쟁 바로 직전에 서울 근교에서 벌어진 좌익사범 처형 장면이 방영됐다. 군인 20여 명이 좌익사범을 나무 기둥에 묶은 후 가리개로 눈을 가리고, 가슴에 사격 표지판을 붙인 다음, 20여 미터 거리에서 60여 명의 사수들이 일제히 사격했다.

그런 뒤 감독관은 권총을 들고 나무기둥으로 다가가 일일이 확인한 뒤 숨을 쉬는 이는 그 자리에서 사살했다. 그 장면은 차마 볼 수 없어서 눈을 감았다.

우리 김구 조사팀이 2004년 2월 2일부터 3월 10일까지 30여 일간 검색한 자료는 모두 1만 9600여 건에 달했다. 하지만 백범 암살 진상을 밝힐 수 있는 딱 부러진 문서는 끝내 찾지 못했다.

2004년 3월 10일 종합평가를 거친 뒤 나름의 보고서를 만들었다. 귀국 경유지였던 LA에서 재미 동포들의 열렬한 환대를 받으며 사흘을 머문 뒤, 3월 16일 LA를 출발하여 3월 17일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미국 버지니아 주 노퍽에 있는 맥아더기념관
 미국 버지니아 주 노퍽에 있는 맥아더기념관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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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오지 산골로 귀촌하다

나는 미국으로 출국 전에 2004년 2월 29일자로 정년 5년을 남기고 이대부고에서 명예 퇴직을 신청했다. 후배들을 위해 교직에서 물러나 제2의 인생을 살라는 아내의 조언으로 그런 결단을 내렸다. 귀국 사흘만인 2004년 3월 20일, 나는 이대 강당에서 뒤늦은 퇴임식을 가쳤다. 이후 40여 년간 서울 살림을 모두 정리한 뒤 그해 3월 31일 곧장 강원도 산골로 내려왔다.

우리 부부가 새 보금자리를 튼 곳은 강원도 횡성군 안흥면 산골마을로, 전혀 연고가 없는 곳이다. 그 전 해, 아내가 우리 처지에 맞는 어느 화가의 집을 10년 동안 거저 빌렸다. 폐가 직전의 그 집을 아내는 사는 데 불편함이 없을 정도로 꾸며놓았다.

잡지나 TV에 나오는 전원주택과는 전혀 거리가 먼 허름한 농가였다. 주소는 '강원도 횡성군 안흥면 안흥4리'였는데, 그 고장 사람들은 '말무더미'마을이라고 했다. 강원도 오지 산골로 앞도, 뒤도, 옆도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산촌 마을이었다.
 
 귀촌 후 안흥산골집
 귀촌 후 안흥산골집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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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웃에는 사촌 사이인 노씨 두 집이 살고 있는데, 평생 농사꾼으로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내 집에는 200평 남짓한 텃밭이 딸려 있었다. 이웃 사촌들에게 농사일을 묻고 배운 뒤 옥수수, 고추, 감자, 상추, 쑥갓, 들깨, 파 등 채소들을 조금씩 심었다. 낮 시간은 텃밭 농사일로 후딱 지나갔다.

하지만 밤 시간은 '청산별곡'의 일구처럼 "올 사람도 갈 사람도 없는 밤은 또 어찌하리오"였다. 집안에 TV조차 들여놓지 않았다. 그러나 인터넷 선은 가설했다. 그때 나는 오마이뉴스에 「안흥산골에서 띄우는 편지」라는 연재기사를 만든 다음, 밤 시간에는 자판을 두들겨 기사를 2~3일에 한 번 꼴로 송고했다.

그래도 시간이 남아 1999년 중국대륙에 흩어진 항일유적을 답사한 것을 다시 가다듬으면서 박도의 「항일유적지답사기」라는 제목으로 연재했다. 두 연재물을 번갈아 오마이뉴스에 송고하니까 밤 시간이 금세 지나갔다.
  
 압록강 철교
 압록강 철교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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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항일유적답사 길에 나서다

오마이뉴스에 「항일유적지답사기」가 10여 회 나갈 무렵, 어느 날 안동문화방송국의 권오선PD가 안흥 내 집으로 찾아왔다. 안동 출신 독립운동가들이 한일병합 후 만주로 망명했다. 그분들의 자취를 8·15 특집 프로그램으로 만들고 싶다면서 내게 코디로 길 안내 도움을 청했다.

나는 이항증 선생과 상의해 보겠다고 한 뒤 돌려보냈다. 그 며칠 후 오마이뉴스에 나의 기사 고산자의 신흥무관학교 편이 나가자 우당기념관 윤흥묵 이사가 나에게 전화를 했다. 서울 올 때 꼭 한 번 우당기념관으로 들러달라는 청이었다.

그 며칠 후 이항증 선생과 안동문화방송국 건을 상의하자 흔쾌히 수락하여 마침 안동문화방송국 권오선 PD도 상경했기에 함께 우당기념관을 방문했다. 그날 윤흥묵 이사와 이종찬 전 국정원장은 정중히 우리 일행을 맞아주었다.

그날 이종찬 원장은 대단히 진지하게 우당기념관에 비치된 여러 독립운동가 사진을 한 분 한 분 소개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당돌하게 이 원장에게 말했다.

"이 사진들을 가보로만 갈무리하지 마시고 국보로 만드시지요?"
"네에? 어떻게요?"
"책으로 출판을 하면 됩니다."
"몰랐습니다. 한번 주선해보십시오."
 
 
 1920년대 독립군이 백두산 밀림 요새지로 가는 길을 따라 항일 유적지를 답사하다(2004. 5, 30.). 답사 당시 도로 확장 공사로 노폭은 넓혀졌지만 그때까지도 비포장 도로로 요철이 심했다.
 1920년대 독립군이 백두산 밀림 요새지로 가는 길을 따라 항일 유적지를 답사하다(2004. 5, 30.). 답사 당시 도로 확장 공사로 노폭은 넓혀졌지만 그때까지도 비포장 도로로 요철이 심했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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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우당기념관에서 중국 현지 이국성이라는 동포 사학자를 소개받아 2004년 5월 25일부터 6월 4일까지 열하루 동안 동북 삼성을 답사하고 왔다. 그때는 1차 때 미처 답사하지 못한 단둥, 통화, 합니하의 신흥무관학교, 그리고 1920년대 우리 독립군들이 백산에서 무송을 거쳐 백두산 밀림으로 간 그 길을 뒤쫓았다. 그런 뒤 청산리, 연길, 용정, 봉오동전적지도 답사했다.

1차 답사 때 들르지 못한 합니하(哈泥河) 신흥무관학교와 따베차의 백서농장, 그리고 청산리대첩 후 곧장 우리 독립군들이 경신참변으로 백두산 요새지까지 행군했던 바로 그 옛길을 따라 백두산에 오른 것은 내 생애에 가장 보람되고 느꺼운 답사였다. 그때까지도 백두산 가는 길은 비포장 도로라서 우리 답사단 일행은 엄청 고생했다. 그때 답사기를 안동문화방송국에서는 '혁신 유림'이라 하여 8·15 특집 프로그램으로 방영했다.
 
 <한국 독립운동사> 표지
 <한국 독립운동사> 표지
ⓒ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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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엮은 한국독립운동사>

나의 「항일유적답사기」가 오마이뉴스 지면을 한창 달굴 때인 2004년 6월 25일 눈빛출판사에서 내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입수한 한국전쟁 사진을 중심으로 『지울 수 없는 이미지』라는 한국전쟁 사진집을 발간했다. 거기에 수록된 사진들은 모두 NARA에서 엄선하여 입수한 것들이다.

나는 고려 때 원나라로 사신을 간 문익점 선생이 붓두껍에 목화씨를 숨겨온 그 고사처럼 이들 사진을 애써 복사해 왔다. 미처 6.25전쟁을 체험하지 못한 다음 세대들에게 보여주고자 함이었다. 이 사진집이 나온 후 세 번 놀랐다.

그 첫 번째는 사진집의 사진이 원판보다 더 선명했다. NARA의 사진들은 현상한 지 50년이 넘었기에 사진이 오그라들고, 여러 사람이 만졌기에 먼지 및 군떼가 많이 묻었다. 게다가 나는 스캐너 다루는 일이 서툴러 제대로 복사치 못하고 삐뚫게 스캔한 사진도 많았다. 그런데 눈빛출판사에서 어떻게 손질했는지 금세 찍은 사진처럼 화면이 아주 깨끔했다.

그 두 번째는 편집이 잘 됐고, <지울 수 없는 이미지>라는 사진집 제목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그런 탓인지 곧 여러 신문에서 거의 빠짐없이 대서 특필해 주었다. 어떤 신문에서는 1면에도 책 소개를 실어주었다.

그 세 번째는 사진집이 나오는 날 소정의 인세를 전액 현찰로 내 손에 쥐어 주는데 놀랐다. 솔직히 나는 그 이전까지 책을 10여 권 냈지만, 늘 인세 때문에 속이 많이 상했다. 그 인세로 그늘에서 수고하시는 분(민문연)들에게 밥 한 끼를 사기도 했다.

한국전쟁 사진집 <지울 수 없는 이미지>는 고가임에도 1쇄가 다 팔려, 곧 2쇄를 찍었다. 그런저런 일로 눈빛 이규상 대표를 만나 우당기념관에 전시된 독립운동가 사진 얘기를 하자 솔깃해했다.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 골목. 어린 시절에 뛰놀던 당신 생가 앞 골목을 50년 만에 찾은 이종찬 전 국정원장 부부.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 골목. 어린 시절에 뛰놀던 당신 생가 앞 골목을 50년 만에 찾은 이종찬 전 국정원장 부부.
ⓒ 이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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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종찬 원장과 셋이 만나 <사진으로 엮은 한국독립운동사>를 펴내기로 합의했다. 사진은 우당기념관 측이 제공했고, 사진설명 및 중간에 들어간 간추린 역사는 내가 쓰기로 했다. 그래서 나는 초보 역사학도로 한국독립운동사 관련 공부를 골똘히 했다.

다행히 이종찬 원장은 독립운동사에 대단히 조예가 깊었다. 그래서 초교와 재교를 볼 때 나는 노트북을 들고 우당기념관으로 가서 밤늦도록 이 원장과 머리를 맞대고 원고를 가다듬었다. 이종찬 원장과 같이 일해 보니까 매우 치밀하고 인품이 훌륭한 분이었다. 독립운동의 대부 우당 이회영 손자로 독립운동사에 박식했고, 컴퓨터 다루는 솜씨도 나보다 훨씬 앞섰다.

만주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독립운동가 후손으로, 학식과 인품을 겸비한 이종찬 원장이 나라와 겨레를 위해 친일, 분단, 민족화해 등과 같은 현안 문제의 해결 방안을 제시해 주시리라 기대해 본다. 

(*다음 회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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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년 교사생활 후 원주에서 지내고 있다. 장편소설 <허형식 장군> <약속> <용서>, 역사다큐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사진집<지울수 없는 이미지> <한국전쟁 Ⅱ> <일제강점기> <개화기와 대한제국> <미군정 3년사>, 어린이 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 <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 <독립운동가, 청년 안중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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