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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메릴랜드 주 칼리지파크에 있는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미국 메릴랜드 주 칼리지파크에 있는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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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방끈이 짧은지라

암살범 안두희 추적자 권중희 선생은 주머니 속에서 꺼낸 가죽장갑을 손에 끼면서 책상이라도 뒤집을 자세를 취했다. 그제야 원무과 직원은 수위에게 우리 일행을 2층으로 안내하라고 이르고는 슬그머니 사라졌다.

"이 나라에서는 아직도 목소리 크거나 가께목(각목)을 휘둘러야 통한다 말이야."

수위는 그제야 상황판단을 한 듯 앞장서서 안내했다. 우리는 백범 선생이 안두희의 총에 맞아 쓰러진 경교장 2층 '역사의 현장'을 둘러봤다. 수위 말로는 그즈음 한창 복원공사 중이라고 하였다.

그래서인지 2층 전체가 썰렁하고 합판 등이 너절하게 놓여 있는 등 어수선했다. 나는 경교장 바깥에서 건물 배경으로 셔터를 여러 번 누른 뒤, 병원 주차장에서 다시 택시를 타고 효창원으로 달렸다.

뒷자리에 나란히 앉은 이항증 선생이 권중희 선생에게 근황을 물었다.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가방끈이 짧은지라 수족이 고달프지요."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새 효창원에 이르렀다. 우리 세 사람은 먼저 가까운 설렁탕집으로 갔다. 미리 주인에게 이따 식사 후에 거기서 얘기 좀 하고 가겠다고 양해를 구했다.

그러자 주인은 점심시간이 지나면 저녁시간까지 손님들이 없기에 조용할 거라고 식사 후 얼마든지 머물다가 가라고 말했다. 하지만 막상 백범 묘소 참배 후 점심을 먹고 인터뷰를 하려고 하자 그날따라 손님이 계속 들락거려 그 소음으로 도저히 대담을 나눌 수 없었다.
        
 권중희 선생이 몽매에도 그리던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서고를 둘러보고 있다(왼쪽부터 아키비스트 보이런, 이도영, 권중희.자원봉사자 재미동포 이선옥,이재수 씨).
 권중희 선생이 몽매에도 그리던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서고를 둘러보고 있다(왼쪽부터 아키비스트 보이런, 이도영, 권중희.자원봉사자 재미동포 이선옥,이재수 씨).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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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유명 인사라도

나는 하는 수 없이 두 분을 구기동 내 집으로 모셨다.

"박 선생, 서울시내 고등학교 국어 선생 맞소? 차도 닿지 않는 이 산동네에 대문도 없이 살고 있으니 도무지 믿어지지 않소?"

내 방이 좁아 하는 수 없이 거실에다가 밥상을 편 뒤 녹음기를 켜놓고 세 사람이 둘러앉았다. 권중희 선생은 그때부터 그날 저물 때까지 서너 시간 동안 1981년 12월부터 1992년까지 12년 동안 암살범 안두희를 끈질기게 추적한 얘기를 진지하게 들려주었다.

나는 이 기사를 쓰기 전 <오마이뉴스> 편집부에 '의를 좇는 사람'이라는 이름의 기사로 10회 정도 나눠 송고하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정운현 편집국장은 난감해 하면서 간곡히 만류했다.

"선생님, 인터뷰 기사는 아무리 유명 인사라도 2회를 넘기면 독자들이 식상해합니다, 가능한 2회로 축약해서 보내주십시오."

나는 '잘 알았다'고 답한 뒤 일단 1회 기사를 송고했다. 그런데 1회 기사가 온라인상에 오르자 독자들의 반응이 매우 뜨거웠다.
  
 모금 목표액 달성 후 은행 창구 앞에서 만세를 부르다
 모금 목표액 달성 후 은행 창구 앞에서 만세를 부르다
ⓒ 윤근혁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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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들의 모금 제의

1, 2회 기사를 오마이뉴스 본사로 송고할 때마다 '한 회만 더'라고 편집부에 간곡히 부탁했다. 다행히 조회수가 높았던 탓인지 탓인지 편집부에서 더 이상 만류하지 않았다.

애초에는 10회 정도로 연재하려다가 절정인 '8회 안두희 입에서 쏟아진 이승만 연루설'에서 연재를 마무리했다. 그때 나는 권중희 선생에게 마무리 말을 부탁드렸다.

그러자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 가서 한 달 정도 머물면서 1945년 8월 15일 해방부터 1950년 6월 25일한국전쟁 발발 때까지 한국관련 비밀문서를 죄다 열람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거기 비밀문서를 뒤지면 백범 선생의 암살에 관한 단서가 어딘가에서 튀어나올 겁니다. 그걸 들여다 보는 게 나의 마지막 소원입니다."

그러면서 미국 왕복 항공료와 한 달 간 체류비로 2000만~3000만 원 정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재벌들이 정치인에게는 차떼기로 뭉치돈을 갖다주지만 개털인 내게는 그들이 단돈 10만 원이라도 주겠는가?"

나는 그 말을 그대로 기사에 담았다. 그 기사가 나가자 독자 댓글이 탱자나무 열매처럼 주렁주렁 달렸다.

뜻밖에도 몇몇 독자들은 '권중희 선생 미국 보내기' 모금을 제의했다. 나는 이 제의를 선뜻 받아들여 모금을 시작했으나 만일 그 목표액에 이르지 않았을 때 그 처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러다 흐지부지되면 독자들은 '교육자도 별 수 없군' '실없는 사람' 또는 '부도덕한 사람'으로 매도할까 걱정했다. 그런 문제로 고민하다가 아내와 상의했다.

"목표액에 미달하면, 이참에 학교 그만두고 당신 퇴직금으로 다녀오세요."

아내는 주저 없이 아주 명쾌한 답을 줬다. 나는 그 말에 용기를 얻었다. 그날 밤 나는 하늘을 바라보며 맹세했다.
 
"결코 하늘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않겠습니다."

 
 오마이뉴스 편집실에서 권중희 선생(오른쪽)과 기자. 글씨는 권중희 선생의 작품이다.
 오마이뉴스 편집실에서 권중희 선생(오른쪽)과 기자. 글씨는 권중희 선생의 작품이다.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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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해봅시다"

이튿날 퇴근길에 오마이뉴스 편집부에 들러 상근기자들과 상의했다. 그러자 그분들은 나를 신뢰한다면서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박 기자님! 한번 해봅시다."

나는 그 길로 권중희 선생에게 당신 이름의 통장을 만들게 한 뒤 가장 먼저 내 이름으로 이번 기사 8회분 원고료 14만4000원을 우선 내 돈으로 대체 입금했다. 그런 뒤 독자들에게 모금을 호소하는 기사를 올렸다.

마침내 2003년 11월 27일부터 권중희 선생 미국 보내기 모금이 시작됐다. "지하의 백범 선생이 등 두드려준 듯(2003. 11. 27.)"이라는 모금 시작 기사와 함께 권중희 선생의 계좌번호를 실었다. 그러자 성금이 우수수 쌓였다.

그렇게 시작하여 모금 시작 2주 만에 총 952분이 3745만 원의 성금과 한 독자(김명원 삼우설계 대표)가 권 선생의 왕복 항공권을 보내줬다. 그때 나는 노트북이 없어 <오마이뉴스> 권우성 기자 것을 빌렸다. 그리하여 권중희 선생과 나는 2004년 1월 31일 미국으로 출국했다. 아내는 인천공항까지 전송하면서 거듭 당부했다.

"가족을 위해 단 1달러 짜리 선물도 사오지 마세요."
"아, 알았다니까."

  
 미국 워싱턴 D.C. 주재 기자 간담회 장면(오른쪽 두 번째 권중희, 맞은 편 신필영 선생. 2004, 2, 1,).
 미국 워싱턴 D.C. 주재 기자 간담회 장면(오른쪽 두 번째 권중희, 맞은 편 신필영 선생. 2004, 2, 1,).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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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회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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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년 교사생활 후 원주에서 지내고 있다. 장편소설 <허형식 장군> <약속> <용서>, 역사다큐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사진집<지울수 없는 이미지> <한국전쟁 Ⅱ> <일제강점기> <개화기와 대한제국> <미군정 3년사>, 어린이 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 <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 <독립운동가, 청년 안중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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