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6년 개봉한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는 어릴 적 부모를 잃고 이모부의 엄격하고도 이상한 보호 아래 사육당하듯 살아가는 귀족 아가씨 히데코와 그녀의 몸종으로 들어 온 알고 보면 사기꾼인 숙희의 미묘한 우정을 그렸다. 히데코의 재산을 노리는 백작의 하수인으로 등장했던 숙희, 하지만 의지할 곳 없는 히데코에 연민을 느낀 숙희와 그런 숙희에게 점점 더 마음을 연 아가씨는 우정 이상의 '연대'를 통해 자신들을 가둔 삶을 돌파해 나간다.
<KBS드라마 스페셜 2020> 첫 작품으로 선보인 <모단걸>은 공영방송으로 옮겨 온 영화 <아가씨>라고 이해해도 좋겠다. 드라마는 이미 아가씨와 그녀의 몸종으로 살아가는 두 여성 구신득(진지희 분)와 영이(김시은 분)를 내세운다.
영화 속 <아가씨>의 배경이 일제시대인 듯하지만 정체성이 모호한 시대를 배경으로 했다면 드라마 <모단걸>은 일제 시대, 그 중에서도 일제가 조선을 '문화'적으로 보다 교묘하면서도 철저하게 통치하던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1919년 조선 전국에 들불처럼 퍼진 '독립만세 운동'은 일제로 하여금 더 이상 그 이전처럼 '헌병 경찰'을 앞세워 강압적으로 통치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 이에 일제는 조선에 자율성을 허락하는 듯 하면서도 '문화'적으로 조선 곳곳에 영향력을 확장해 나가고자 한다. 이런 일본의 통치 방식의 변화는 조선 사회의 문화적 열망에 불을 지폈고 이른바 '모단걸'로 대표되는 사회적 변화 양상들이 곳곳에서 드러나게 됐다.
나라를 팔아먹은 대가로 자작의 지위를 얻은 종석 집안의 며느리 구신득. 가세가 기운 양반 가문의 고명딸로 자란 그녀를 남편은 멀리하고 '모단걸'에 마음을 빼앗겨 버린다. 그런 남편을 두고 볼 수 없었던 구신득은 남편이 만나는 '모단걸'을 만나 담판을 지어보려 하지만 외려 기가 눌리고 만다. 거기에 더해 등장한 남편에게 수모를 겪는다. 이에 신득은 자신도 '모단걸'이 되어 남편의 마음을 되찾아 오겠다고 결심을 한다. 그리고 '모단걸'이 되기 위해 '학교'로 향한다. 몸종인 영이와 함께 말이다.
드라마 <모단걸>은 바람난 남편의 마음을 자신에게 돌리겠다는 신득의 '전통적 사고방식'과 그 수단이 되는 '학교'라는 근대적 문물의 충돌을 통해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학교로 간 아가씨와 몸종
학교로 간 구신득은 신문학을 배우지만 여전히 자작 집안의 며느리이다. 학교 생활을 통해 '모단걸'이 되겠다는 신득의 포부와 달리 어쩐지 공부에는 재능이 없어 보인다. 그런 신득의 눈에 띈 건 '모단'한 유행과 뜻밖에도 손에 들어온 '자유 연애'를 다룬 소설이다. 거기에 더해 어쩐지 그녀를 남다르게 대하는 듯한 선생님 윤지온(남우진 분)까지.
그런데 학교로 간 건 신득만이 아니다. 신득의 몸종 영이도 그녀를 돕기 위해 학교에 오고 신득과 짝꿍이 된다. 시험을 못 본 신득 대신 나머지 공부를 하고, 시 숙제를 못한 신득 대신 자신이 쓴 시를 내는 처지이지만 영이는 신학문을 배우는 게 마냥 즐겁다.
그런 영이에게 새로운 삶의 기회가 다가오는데 바로 신득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윤지온을 통해서다. 신득이 남편의 모단걸을 만나 위축되었을 때 머리끄덩이를 잡고 육박전을 벌였던 영이는 신득의 신발을 찾아오던 전차에서 자신의 머리채를 잡아흔든 일본 학생에게 지지 않고 당당하게 맞섰다. 그런 영이를 눈여겨 본 윤지온 선생은 영이를 보자, 일제의 문화 정책에 저항하는 자신의 동인지 조력자가 되어 달라 부탁하기에 이른다. 드라마는 학교로 간 아가씨와 몸종은 학교 선생님 윤지온을 사이에 두고 미묘한 감정적 대척점에 서게 된다.
영화 <아가씨>에서처럼 한 남자를 사이에 둔 두 여자의 미묘한 갈등 관계는 전형적인 '오해'로 인한 삼각관계로 변질되고 신득과 영이의 '주종 관계'는 파탄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이 전형적인 삼각 관계는 윤지온의 잡지 '새벽'이 불온한 서적으로 수사를 받게 되며,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영이가 일본 경찰에 끌려가 고문을 받게 되면서 관계의 정체성에 변화가 생긴다. 아가씨와 백작, 그 사이에서 조력자로 고군분투하다 아가씨와 연대하게 된 영화 <아가씨>의 숙희처럼, 드라마 <모단걸>은 영이의 구금을 통해 윤지온을 사이에 둔 연적인 줄 알았던 영이가 알고보니 신득의 유일한 가족이자 벗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신득, 모단걸이 되다
드라마 속 신득이 처음 모단걸이 되고 싶었던 이유는 다른 여인에게 마음을 빼앗긴 남편이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서였다. 말이 모단걸이 되고 싶다는 것이었지 모단걸이라는 형식을 통해 전통적인 삶을 고수하겠다는 '의지'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신득의 의지는 학교와 학교를 매개로 한 '모단한' 문물을 통해 변화하게 된다. 뽀족한 구두, 모단걸스러운 모자와 의상, 그리고 당시 유행하던 자유 연애를 그린 소설 등이 처음 그녀를 현혹했다. 그러나 그런 '모단'한 문물이 남편의 마음을 돌려놓을 수 없다는 것을 신득은 깨닫게 된다. 아니 무엇보다 그토록 자신이 애를 써서 돌려놓고 싶었던 남편이 그럴 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드라마는 신득의 드라마틱한 모단걸 되기 해프닝을 통해 진정한 모단걸은 문물의 세례가 아니라, 주체적인 인간으로의 거듭남이라 '정의'내린다. 아니 어쩌면 남편의 마음을 되찾겠다고 당당하게 학교를 선택했던 신득에게 '모단'의 주체성이 내재돼 있었는지도 모른다. 신득은 이제 당당하게 남편에게 '이혼장'을 내던지고 진짜 모단걸의 길을 걸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