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8 15:57최종 업데이트 20.11.08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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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교는 2005년 총신대 평생교육원에서 침뜸 교육을 받은 이래 지금까지 침술 공부에 정진해온 재야의 침구사다. 1941년생이니 올해 여든 살. 병들어 눕기에 부족하지 않은 나이지만 지난 6월 코로나19 여파로 귀국할 때까지 미얀마에 있는 '따바와(Thabarwa) 명상마을'에서 5년 동안 침뜸으로 환자들을 치료했다. 
 

재야의 침구사인 정일교. 코로나19로 일시귀국해서 사진 촬영을 했다. ⓒ 민병래

 
따바와는 미얀마 수도 양곤에서 80여km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다. 10여 년 전, 허허벌판이던 이곳에 오따마사야다 스님이 명상과 수행을 위한 마을을 세웠는데 '본래의 진리'라는 뜻의 '따바와'라 이름 지었다.

이 마을 한켠에 중풍이나 암에 걸린 중환자들을 위한 병동이 지어졌는데 이곳에 머무르는 환자가 약 팔백명이다. 미얀마는 의료보험 제도가 없는 데다가 오랫동안 군부가 집권하고 내전까지 겪어 국민 삶이 피폐해졌다. 그래서 의료기관을 이용할 수 없는 가난한 환자들이 따바와 마을에 모여든 것이다. 사정이 이렇자 오따마사야다 스님은 미얀마 안팎에 지원을 호소했다. 정부는 마을에 사람이 모이면 혹시나 불온한 기운이 생길까 외면했지만 다행히 유럽과 남미 등에서 의료인과 수행자들이 자원봉사를 위해 찾아들었다.


정일교는 바로 이 병동의 한 이층방에 살며 하루 종일 침뜸 시술을 한다. 그가 매일 만나는 환자가 대략 50~60명. 숨 가쁘게 침을 놓고 다음 환자로 이동해도 하루가 빠듯하다. 그를 돕는 사람들은 정일교로부터 침 시술을 받고 완치된 후 봉사를 자원한 이들이다. 정일교가 침을 꽂고 다음 환자로 이동하면 그들은 침을 돌리면서 자극을 주는 일을 한다. 환자나 자원봉사자 식사는 아침마다 스님 150여명이 버스를 타고 양곤에 가서 탁발로 얻어온다. 정일교도 스님들이 얻어 온 음식을 먹으며 5년을 살아왔다.

따바와 마을에서 병자들을 만나다

2013년 정일교는 전자사업을 하는 친구의 부탁으로 팜농장 시장 조사차 미얀마에 발을 디뎠다. 그때 현지 직원의 어머니가 중풍기가 있었는데 정일교가 침으로 치료해줬다. 농장이 있던 마노롱 마을에 소문이 나 사람들이 침을 맞으러 몰려들었다. 어떤 이는 움막을 짓고 밥을 해 먹으면서까지 매달렸다. 그곳은 반군 카렌족이 정부군과 30여 년이나 내전을 치렀던 곳이어서 주민 생활이 열악했고 의료혜택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정일교의 작은 침 하나 하나가 그들에게는 희망이었다. 면허 없는 의료행위는 미얀마에서도 처벌 대상이지만 지역 경찰서장과 면장이 와서 "고맙다, 더 열심히 주민들을 돌봐달라"고 부탁할 정도였다.

팜농장 개설이 순조롭게 마무리돼 그는 2015년 6월 15일 3년간의 미얀마 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마을의 스님 한 분이 출국 전에 '따바와 명상마을'에 꼭 들러보라고 간곡히 권했다. 정일교가 가서 본 따바와의 환자 상태는 보기가 안타까웠다. 에이즈와 결핵 환자 그리고 중풍이나 나무에서 열매를 따다 떨어져 하반신 마비가 된 환자들이 즐비했다. 결핵 병동은 들어가 볼 수 없었지만 에이즈병동환자들은 합병증이 심했고 마비 환자들은 오랫동안 누워 있었던 탓에 욕창으로 썩는 냄새가 났다.

결국 정일교는 귀국 전 잡아둔 양곤 관광을 취소하고 환자들에게 침을 놓았다. 이 모습을 본 큰 스님 오따마사야다는 "한국에 가셨다가 꼭 따바와로 돌아오시라"고 부탁했다.
  

정일교의 시술 장면 미얀마 따바와 마을 병동의 상태는 이렇게 열악하다. ⓒ 정일교 제공

 
당시 정일교는 한양대 구리병원에서 지병인 전립선암을 치료할 예정이었다. 70대 중반이라 체력도 떨어진 데다 더운 나라에서 혼자 지내다 보니 몸도 많이 상했다. 그런데 그는 1년 후인 2016년 6월 미얀마행 비행기에 올랐다. 따바와에서 그날그날 연명하는 사람들과 큰 스님의 간절한 부탁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아내의 죽음으로 제2의 인생을 결심

그가 따바와로 떠날 결심을 한 데는 또 다른 사연이 있었다. 2004년 그가 토목회사를 운영할 때 아내가 폐암으로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 슬픔에 정일교는 오랜 시간 방황했고 우울증 때문에 입원까지 했다.

아내는 그에게 특별했다. 1941년생 정일교는 강원도 동해에서 8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농사질 땅도 없었던 그는 18세부터 장성에서 광부 생활을 했다. 강릉 탄광에 있을 때 만난 아내는 광부인 그를 남편으로 받아 주었다. 맨앞에서 갱도를 개척하는 선상부였던 정일교는 어느 날 갱도에 찼던 가스에 질식해 쓰러졌다. 산소탱크실에 옮겨진 그는 3일 만에 퇴원했다. 의사는 "제 발로 걸어 나간 사람이 없는데 당신은 정말 기적이다"라고 했다. 꼼짝 않고 병실을 지켰던 아내는 눈물로 그를 맞았다.

퇴원하는 날 정일교는 구멍가게에서 본 '파독광부' 모집 기사가 퍼뜩 생각났다. 장성탄광에 들어오기 위해 쌀 몇 가마니씩 바친다고 할 정도로 벌이가 좋았지만 사고를 당하고 보니 독일에 가면 여기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도 장성을 벗어나는 데 무조건 찬성했다.

다음 날로 동해에서 새벽차를 타고 청량리에 도착, 신촌 가는 버스를 타고 동교동에 있던 해외개발공사에 도착했다. 2014년에 개봉해 천만 관객이 넘었던 영화 <국제시장>에서는 덕수 역의 황정민이 파독광부가 되기 위해 쌀가마니를 짊어지는 시험을 치른다. 71년 정일교는 40kg 모래주머니를 메고 30m를 왕복했다. 광부로 단련된 그에게 어렵지 않은 실기시험이었다.

다음은 필기시험, 감독관은 "여러분! 대한민국 청년이 맞습니까? 태극기 잘 그리겠네요. 오늘 시험은 태극기를 그리는 겁니다"하면서 16절지 종이를 나눠주었다. 마침 정일교가 가지고 있던 수첩 첫 쪽에 태극기가 그려져 있었다. 덕분에 필기도 통과했다.

<국제시장>의 덕수가 간 곳은 독일 뒤스부르크 함보른 광산이었다. 정일교도 근처 쭈바이핀푸 광산에 배속되었다. 한 달 월급이 2500마르크, 한국 돈으로 50만 원 가까운, 당시로는 매우 큰 돈이어서 몇 달을 모으면 집 한 채를 살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독일 탄광도 위험하긴 마찬가지. 갱도 안 열기에 그는 얼굴에 화상을 입었고 발파 소리에 난청까지 얻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독일 광부들은 한국 광부들이 조금만 일이 서툴러도 "Du Schwein!"(두 슈바인, 이 돼지새끼야!)라고 불렀다.
 

독일 쭈바이핀푸 광산에 있을 때 뒷줄 오른쪽이 정일교 마을 사람들과 라인강변에 놀러가서 찍은 사진이다. ⓒ 정일교 제공

   
그래서 정일교는 용접 기술을 배웠다. 퇴근 후면 지친 몸을 이끌고 직업학교에 가 1년 7개월 만에 수중 용접까지 익히고 가스기사 자격증도 땄다. 이 용접 기술은 그가 83년부터 사우디의 리야드에 건설기술자로 나갈 때나 토목회사를 창업할 때 요긴하게 쓰였다.
 

83년 사우디의 리야드에 건설노동자로 나갔을 때, 동료들과 찍은 사진. ⓒ 정일교 제공

 
아내는 이렇게 정일교가 장성 탄광과 독일 광산의 광부로 또 사우디의 건설기술자로 오가는 과정을 뒷바라지했다. 부산 자갈치시장에서 같이 장사를 하다가 사기를 당해 쫄딱 망하기도 했다.

그래서 정일교에게 아내는 반려이면서 동지였다. 그런 아내의 죽음은 그에게 큰 충격이었다. 그는 우울증 치료 후 퇴원하면서 "이제 제2의 인생! 세상에서 받은 것을 갚으며 보람되게 살자"고 다짐했다. 이런 사연 때문에 그는 70대 중반이라는 많은 나이, 전립선암의 후유증까지 무릅쓰면서 미얀마의 따바와로 향했다.

따바와는 그에게 운명이다

그가 2016년 6월부터 4년간 돌본 환자들이 무려 3000여 명. 자원봉사자 도움으로 환자 진료 카드를 하나하나 만들었다. 그는 환자들을 보면 깊은 포옹을 한다. 가족에게서도 버림받은 환자들은 절망감으로 하루를 보낸다. 그들에게 "당신은 나을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정일교의 위로는 큰 힘이 된다.
 

미얀마 따바와 마을의 한국인 침구사 정일교 올해 나이 여든의 정일교가 미얀마 따바와 마을의 환자들에게 침을 놓고 있다. 그는 올해 코로나19가 번지기 전까지 4년 넘게 따바와 마을에서 살면서 아픈 사람들을 돌봤다. ⓒ 정일교 제공

 
그가 가장 보람을 느꼈을 때는 열네 살 소녀 마쌀을 치료했을 때다. 미얀마는 땅에서 한길 높이 정도에 나무로 된 방바닥을 만드는데 새벽녘에는 찬 기온이 돌고 난방은 없기에 일시적으로 허리가 마비가 되기도 한다. 마쌀도 그랬는데 전혀 걷지도 못할 정도로 심했다. 3개월에 걸친 정일교의 침술로 완치돼 지금은 따바와에서 틈틈이 봉사를 하고 있다.
  

정일교에게 치료받아 완치된 마쌀의 모습 ⓒ 정일교 제공

 
정일교는 욕창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특히 정성을 기울인다. 그는 쌀뜨물에 EM(유용미생물균) 그리고 소금과 설탕을 섞어 소위 '쌀뜨물EM'을 만들었다. 이를 환부에 촉촉히 적셔주면 통증도 줄고 썩어가는 정도도 늦출 수 있다. 의약품 지원이 없는 상태에서 그가 오랫동안 궁리하고 실험해서 만든 약재(?)다.

사람들이 손사래를 치고 말리지만 정일교는 에이즈 병동에도 기꺼이 들어간다. 합병증 상태에 이른 그들의 면역력을 높이기 위해 기본 혈자리를 찾아 침을 놓고 "나을 수 있다"는 말을 빠뜨리지 않는다. 이런 노력은 짧게나마 미얀마 MR 4TV에 방송되기도 했다.
  

욕창환자를 치료하는 정일교. 그가 만든 쌀뜨물EM으로 치료하고 있다. ⓒ 정일교 제공

 
코로나 이후 따바와 시대를 준비하는 정일교

지금 코로나로 일시 귀국했지만 정일교는 한국에서 더 분주하다. 다시 들어가면 하루 몇천 원 정도 약값도 쓸 수 없는 환자들을 위해 다양한 민간처방을 연구 중이다. 그동안 뒷배 노릇을 한 장남의 사업이 신통치 않아 침구값을 도와줄 후원자도 구하고 있다.

이런 정일교를 더 바쁘게 하는 이가 있으니 그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젊은 의사 지로지나다. 그는 아르헨티나 의과대 학생으로 2016년에 열흘간 봉사하러 따바와에 왔었다. 그러다 정일교의 침술을 보고 "어떻게 저런 작은 침이 효과를 내지?"하고 놀라워했다. 그는 귀국을 3개월이나 늦추면서 정일교 옆에서 침술을 배웠다. 지로지나는 한국의 침술을 남아메리카 사람들에게 접목하겠다고 당찬 포부를 밝혔고 2018년 의사고시에 합격, 정식 의사가 되었다.

지로지나는 요즈음 "코로나 시대에 면역력을 높이기 위해 침술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본인이 접하는 다양한 환자들에게 어떤 시술이 좋은지?"를 자주 물어온다. 정일교는 번역기를 돌리고 주변에 물어가며 끙끙 답장을 쓴다.

영화 <국제시장>에서 덕수 황정민은 파독 광부와 베트남전쟁을, 정일교는 파독 광부와 사우디 파견노동자를 경험했다. 하나만 겪어도 대단한데 덕수와 정일교는 둘씩이나 경험했으니 그야말로 우리 현대사를 온몸으로 살아온 셈이다.

<국제시장>의 마지막 장면에서 노인이 된 덕수는 흥남 부두가에서 헤어진 아버지를 그리며 서럽게 운다 "저 참 힘들게 살았지요?"하고 되뇌이면서. 그리고 아내에게 시장통에 있는 가게 '꽃분이네'를 팔자며 고단했던 인생살이를 마감코자 한다.
 

정일교가 명상하는 모습. 그는 다시 따바와 병자마을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 ⓒ 민병래

 
정일교는 다시 보게 될 따바와 환자들을 위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쌀뜨물약재(?)를 개선하느라 분주하다. 또 아르헨티나의 젊은 의사와 코로나 시대에 맞는 대체의학을 탐구하고 있다. 그의 나이 올해 여든 살인데 아직 덕수처럼 인생을 정리할 계제가 아닌가 보다. 그런데 떠나지 않는 근심이 있으니 아들의 성화다

"아버지, 몸도 성치 않고 나이도 있으신데 거기 가서 또 탁발 음식이나 드시려구요?"
 
못다 한 이야기
① 따바와의 정식이름은 '따바와명상마을'이다. 오따마사야다 큰 스님의 애초 취지는 명상과 수행의 도량이었고 부대시설로 환자들을 위한 병동을 지은 것이다. 현재 4000명 정도가 기거하는 마을을 이루고 있다. 국제적으로도 이름이 나 많은 수행자들과 자원봉사자들이 찾고 있다. 특히 유럽쪽 사람들의 방문이 많다.
 
② 따바와 환자들에 대한 미얀마 정부의 지원은 거의 없다. 2019년에 이르러서야 양곤에 있는 간호사들이 실습생들과 함께 방문해서 혈압이나 피검사를 하는 정도다. 그래서 따바와 마을의 모든 의료행위는 대부분 기부, 지원, 자원봉사에 의존하고 있다.
 
③ 아르헨티나 의사 지로지나가 대체의학으로서 침구를 주목한 것은 침술의 임상효과도 좋지만 누구나 쉽게 배워 서로에게 시술할 수 있다는 점이다. 정일교에게 밥을 챙겨주던 무학(無學)의 아주머니는 현재 침술사가 되었다. 아이가 딸린 30대 초반의 이 아주머니에게 정일교는 아침에 일어나면 신체 경락도의 혈 자리 그림에 세 번 절을 하고 그 흐름을 익히도록 했다. 그리고 종일 정일교의 시술을 보조하면서 침술을 배우게 했다. 환자가 밀려들어 정일교가 감당할 수 없을 때 그녀는 보조침구사 노릇을 하다가 이제 임상경험이 몇 해 동안 쌓이니 스스로 환자를 돌볼 정도가 되었다. 지로지나는 이런 가능성에 주목했다.
 
⓸ 파독광부 시험에서 재밌는 에피소드가 있다. 실기와 필기후 마지막으로 신체검사가 있었다. 기준 체중이 57kg인데 정일교는 미달이었다. 다행히 신체검사를 하던 간호사가 슬쩍 눈치를 주며 점심 식사 후에 다시 오라고 했다. 점심 시간에 체중을 늘려야 했다. 곰탕 한 그릇을 두둑이 먹었는데 그걸로 안될 것 같아 삼양설탕 300g을 물 한 바가지에 풀어서 다 마셨다. 요동치는 배를 움켜잡고 신체검사장에 들어갔다. 58kg! 합격! 가까스로 통과했다. 그리고 바로 화장실로 달려가야 했고, 먹은 것이 모두 설사로 쏟아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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