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5 07:10최종 업데이트 20.11.05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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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개월 만에 전국 검찰청 순회 간담회를 재개한 윤석열 검찰총장이 29일 오후 대전지방검찰청에서 지역 검사들과 간담회를 한 뒤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2020.10.29 ⓒ 연합뉴스

 
윤석열 검찰총장이 '나는 부하가 아니다'라며 추미애 법무부 장관에 맞서고 일부 검사들이 법무부 장관 비판에 동조하는 현상은 많은 부분 외부 통제에 대한 검찰의 오래된 반감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 반감이 싹튼 것은 일본제국주의 때였다. 사법대신(법무부 장관)을 경유한 내각의 통제를 차단하고 검찰의 내부 단결을 공고히 할 목적으로 일본 검사들은 '사법대신님은 검사가 아니다'라며 사법대신의 지휘권을 배척했다.


그들이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사법대신의 통제를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2009년에 <내일을 여는 역사> 제36호에 수록된 문준영 부산대 교수의 논문 '한국적 검찰제도의 형성'은 "당시 일본에서는 천황에 대한 내각의 보필 책임이라는 관점에서 사법대신이 지휘·감독할 수 있다고 이해되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다가 1900년대 및 1910년대의 정경유착 사건들을 계기로 검찰 수사가 내각의 존폐에 영향을 끼치고 검찰과 내각의 뒷거래가 늘어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이로 인한 검찰권 강화는 검사들이 검사총장(검찰총장)과 검사 동일체 원칙을 중심으로 단결해서 사법대신의 통제를 배척하는 배경이 됐다.

위 논문은 "검찰 조직 내에서 검사총장의 위상이 강화됨에 따라, 사법대신의 지휘권 행사에도 의문이 제기되었다"라고 한 뒤 "1920년대 후반이 되자 구체적 사건에 대한 사법대신의 지휘·감독은 반드시 검사총장을 경유해야 한다는 입법론이 대두"됐다고 말한다. 이런 검찰 문화가 식민지 한국을 거쳐 대한민국 검찰에 영향을 주게 됐다고 논문은 말한다.

그런데 대한민국 검찰은 조직의 단결을 추구하면서도, 적어도 전두환 정권 때까지는 내각과 정권에 맞서지 않았다. 그때까지는 권력의 시녀에 만족하고 살았다. 만약 그런 시절에 윤석열 총장 같은 인물이 출현해 지금처럼 행동했다면, 역사에 길이 남을 위인으로 기록됐을 것이다. 그랬다면 대검찰청 앞에 응원 화환 355개를 놓는 것으로는 부족했을 수도 있다.

일본의 영향을 받은 한국 검찰의 독특한 역사

그랬던 검찰이 1987년 6월항쟁으로 국가권력이 약해지자 정권과 내각을 상대로 독립성을 추구했고, 노무현 정권과 문재인 정권 때는 한층 더 목소리를 높이며 외부 통제에 맞서고 있다.

작년 연말의 검찰개혁 입법에도 불구하고 검찰은 여전히 강력하다. 다소 약해지기는 했지만, 기소권·수사권 및 강제수사권(체포·구속·압수·수색)에서 막강한 권한을 보유하고 있다. 그래서 피해자나 피의자·피고인으로 형사사건에 연루되는 국민들은 앞으로도 계속 검찰의 강력한 권력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그런 검찰이 외부 통제도 제대로 받지 않고 사조직처럼 운영된다면, 국민들의 권익이 충분히 보장되기를 기대하기가 어렵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검찰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끊임없이 작동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그런 민주적 통제를 하기 위해 국민들이 작년 하반기처럼 대검찰청 앞으로 토요일마다 '출근'할 수는 없다. 그런 방식은 거대한 사회적 비용의 출혈을 수반한다.

그래서 차선책은 국민의 신임을 받은 대통령이 국무총리와 법무부 장관을 통해 검찰을 통제하는 간접적인 민주적 통제 방식이다. 그런데도 일부 검사들이 '우리는 부하가 아니다'라며 거부감을 드러내고 집단행동의 조짐까지 보이고 있으니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26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법제사법위원회의 법무부, 대법원, 감사원, 헌법재판소, 법제처에 대한 종합감사에서 김남국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대검찰청 앞 화환 관련 질의를 듣고 있다. 2020.10.26 ⓒ 공동취재사진

 
검찰에 대한 민주적 통제는 대한민국의 경우에 특히 절실하다. 왜냐하면, 지난 100년간 검사들이 대중과 괴리된 위치에 놓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검사들이 놓인 조건이 대중이 놓인 조건과 비슷하다면, 검찰에 대한 통제가 다소 느슨해져도 검찰이 대중의 이해관계를 거스를 가능성이 높지 않다.

하지만 지난 100년간 한국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대중과 검사들이 상이한 조건에 놓이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양자가 각각 다른 방향을 지향하기 쉬웠다. 이 때문에 민주적 통제의 필요성이 더욱더 절실했던 것이다.

외부 통제가 완화되면, 검사들이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움직일 가능성이 생긴다. 외부 통제 여하에 관계없이 법과 양심에 따라 소신을 지키는 검사들은 그렇지 않겠지만, 그런 검사들이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을 우리는 그간의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

외부 통제가 느슨해지는 경우에도, 검사들이 처한 조건과 대중이 처한 조건이 유사하다면 검찰의 독자 노선이 대중의 이해관계를 침해할 가능성은 높지 않게 된다. 예컨대, 재미 한국인들이 많이 사는 미국 도시에 한국인 검사가 부임한다면, 한국인들이 굳이 검찰을 압박하지 않더라도 검찰이 한국인 인권을 침해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하지만 그 한국인 검사가 군산복합체 재벌의 사위라면 사정이 달라진다. 그 검사는 생활 수준이 높지 않은 한국인들의 이익보다는 미국인 장인어른의 이익을 먼저 생각할 가능성이 있다. 최소한 그렇게 의심할 여지가 커진다. 이처럼 대중과 검사가 처한 조건이 각기 다른 경우에는 검찰에 대한 민주적 통제의 필요성이 높아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나가는 판·검사와 들어오는 판·검사가 똑같다

일제강점기 때도 그랬지만, 해방 이후의 검찰도 일반 국민들과 현저히 다른 처지에 놓여 있었다. 이 점은 해방 2개월 뒤인 1945년 10월 11일 단행된 미군정 최초의 검찰 인사에서도 드러난다.

이때는 검찰이 법원과 분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법원 검사국 인사가 검찰 인사였다. 법원 인사 차원에서 검찰 인사가 이뤄진 것이다. 이날의 인사 방침은 일본인 검사들을 해임하고 한국인 검사들을 임용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날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나가는 판·검사들과 들어오는 판·검사들의 얼굴이 똑같았던 것이다.

검사 출신인 김두식 경북대 법학교수가 쓴 <법률가들, 선출되지 않은 권력의 탄생>은 "흥미롭게도 이날 퇴임자였던 장경근·민복기·민병성·신언한·이영섭·최윤모·김장호·박성대·정재환 등은 같은 날짜에 조선인 판·검사로 임용되었다"라고 한 뒤 이렇게 설명한다.
 
민병성을 제외하면 결국 일본 인명으로는 면직사령이 나고 조선 인명으로 다시 임명사령이 난 셈이다. 이를테면, 장경근의 경우 같은 날짜에 면직사령의 '나카야마'로는 퇴임하고 임명사령의 조선인 '장씨'로는 법원장이 된 셈이다. 민복기는 이와모토로 퇴임하고 조선인 민씨로 신임 판사가 되었다.
 
일본 이름으로 바꾼 한국인 판·검사들이 일본 이름으로 해임당하고 한국 이름으로 임명되는 희한한 상황. 이랬기 때문에 해방 이전의 검사들이 해방 이후에도 자리를 지킬 수밖에 없었다.

제국주의 식민지배 기구였던 일제 치하 검찰의 구성원들이 이처럼 해방 뒤에도 이름 석자만 바꾼 채 계속 근무했기 때문에, 검찰 조직은 친일청산을 염원하는 일반 대중과 괴리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검찰이 대중의 생살여탈권을 쥐었으니, 해방 이후의 한국인들이 얼마나 위험한 조건에서 살아 왔는지를 느낄 수 있다.

친일청산을 거부하고 구체제를 지지하는 세력이 검찰을 장악하고 이를 기초로 대한민국 검찰이 유지돼 왔다는 점과 더불어, 대중과 검찰의 괴리를 조장하는 측면들이 한둘이 아니라는 점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대중과 괴리된 그들만의 세상

2009년에 김영모 중앙대 명예교수가 쓴 <한국 권력지배층 연구>는 이른바 지배층으로 분류될 만한 부장검사 이상의 검찰 출신 '사법 지배층'을 대상으로 1993년과 2007년에 이들이 어떤 사회·경제적 조건에 처해 있었는지를 분석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검사 출신의 사법 지배층 중에서 41.7%는 영남 출신이었다. 대한민국 국민의 41.7%가 영남에서 출생하는 것도 아닌데, 검사들의 41.7%는 그곳에서 배출됐던 것이다. 또 검사들의 47.0%는 서울대 출신이었다. 고3 수험생의 47.0%가 서울대에 들어가는 것도 아닌데, 검사들의 47.0%는 서울대에서 나왔던 것이다.

한편, 1960~1963년의 서울대 법대 졸업생과 1971년의 서울대 법대 신입생들의 아버지는 상당수가 중산층이었다. 이 때문에 상업 경영자, 농업 지주, 공무원, 회사원(사무직), 교원의 자녀들 중에서 검사가 대거 배출될 수밖에 없었다.

또 검찰 출신의 사법 지배층은 재산 액수 면에서도 일반 대중과 달랐다. <한국 권력지배층 연구>는 "검찰의 경우 1993년 말 10억 원이고 2007년 말 18억 5천만 원이었다"라고 말한다.

1993년 당시의 검사장·지검장들은 평균적으로 86평짜리 주택에 살면서 2644평짜리 전답 및 308평짜리 임야를 보유하고 통장예금 1억 4600만 원을 보유했다. 2007년 당시의 검사장·지검장들은 평균적으로 62평짜리 주택에 살면서 597평짜리 전답 및 4만 3731평짜리 임야를 보유하고 4억 4100만 원의 통장예금을 보유했다.

대한민국 검찰은 식민지 검찰을 그대로 계승한 탓에 일반 대중과 이질적인 정치적 기반을 갖고 출발한 데다가 출신지·대학·가문·재산면에서도 대중과 괴리돼 있다. 이런 검찰이 민주적 통제도 받지 않고 '검찰 독립'을 추구한다면, 아무래도 자신들의 사회·경제적 조건에 불리하지 않은 방향으로 움직일 가능성이 있게 된다. 이를 막는 현실적 방법은 민주적 통제의 강화라고 할 수 있다.
 

서울 서초역 부근에서 검찰개혁사법개혁적폐청산 범국민연대 주최로 '제9차 검찰개혁 촛불문화제'가 열리고 있다 (드론으로 항공촬영). 2019.10.12 ⓒ 이희훈


생계활동에 바쁜 국민들이 대검찰청 앞에 토요일마다 나가서 목이 쉬도록 고함을 칠 수는 없다. "왜 우리 명을 거역하느냐?"며 외칠 수는 없다. 그래서 대통령-총리-법무부 장관이 그 역할을 대신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일부 검사들이 불만을 품고 '우리가 부하냐?'며 항거한다면, 이는 그들이 검찰을 공조직이 아니라 사조직쯤으로, 국민의 기구가 아니라 선후배 모임 정도로 생각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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