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입에서 '트로트'라는 말이 나왔다. 한두 번도 아니고 계속. 지난 추석 때 친정에 갔을 때 엄마는 트로트 이야기를 꺼내셨다. 더 정확히는 '미스터 트롯'이야기였다.
 
"요즘 우리 찬원이 보는 재미에 하루하루가 너무 신나. 영웅이는 영웅이대로 잘하고 호중이는 호중이대로 잘하고... 그래도 나는 찬원이가 제일 이쁘고 매력있더라."

 
영웅이, 호중이, 찬원이가 친한 지인의 아들이라도 되는 듯, 엄마는 참으로 다정하게 이름을 불렀다. 임영웅, 김호중, 영탁은 나도 한번씩 들어보긴 했지만 '찬원이'는 처음이었다. 나는 엄마에게 찬원이가 누구냐고 물었다. 엄마는 신이 나서 이야기를 들려줬다. 엄마의 이야기를 종합해본즉슨 <미스터 트롯>에 나와서 일약 스타덤에 오른 트로트 가수로서 <사랑의 콜센타>에서 맹활약을 하고 있으며, 매력 있고 생기발랄하고 노래도 너무 잘하는 가수라 했다.
 
 
 TV조선 <사랑의 콜센타> 관련 이미지.

TV조선 <사랑의 콜센타> 관련 이미지. ⓒ TV조선

 
엄마, '우리 찬원이'는 누군가요?
 
나는 트로트라는 장르를 좋아하지 않는데다(트로트를 좋아하지 않는 건 아니다. 트로트를 소재로 한 '쇼'를 별로 좋아하지 않을 뿐이다) <미스터 트롯>이 나오는 방송 채널도 선호하는 채널이 아니어서 그저 포털 뉴스 정도로 트로트가 요즘 대세라는 것을 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내 주위를 둘러보면 대개 60-70대 어른들이 <미스터 트롯>을 좋아했다. 대개 내 또래의 엄마 아빠들이 <미스 트롯>과 <미스터 트롯>을 보며 열광했다. 60-70세대는 왜 트로트에 열광할까?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남들이 다들 열광하는 것에는 묘하게 어깃장을 놓고 싶은 내 심보도 한 몫했지만 그 방송이 나오는 채널이 마음에 안 들었다. 사람들이 그 채널의 프로그램에 열광한다는 게 못마땅했다(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남들이야 어떻든, 트로트가 인기있든 말든, 내 알 바 아니다'라고 생각했는데, 트로트에 푹 빠졌다는 엄마의 고백(?)에 나는 가벼운 충격을 받았다.
 
"엄마 친구들은 만나기만 하면 <미스터 트롯> 이야기만 해. 나만 안봤더라고. 나만 보면 친구들이 <미스터 트롯> 한번 보라고 보라고 계속 그러는데 엄마는 안봤거든."
 

엄마가 안 봤던 이유는 오직 하나. 채널이 마음에 안 들어서다. 엄마 나름의 신념같은 것이리라. 그랬던 엄마가 어느날 우연히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 <사랑의 콜센타>를 보게 되었고, <미스터 트롯> 멤버들에 푹 빠지게 되었다. 단 몇 분만에 앉은 자리에서 엄마의 마음을 확 사로잡았다. '사랑의 콜'을 제대로 받으신 셈이다.
 
젊고 발랄한 가수들... 엄마는 무장해제되었다
 
 
 TV조선 <사랑의 콜센타> 관련 이미지.

TV조선 <사랑의 콜센타> 관련 이미지. ⓒ TV조선

 
엄마는 하루종일 <사랑의 콜센타>를 본다고 했다. 유튜브로도 찾아보고, 다시보기도 챙겨보았다. 갑자기 <사랑의 콜센타>를 찾아보는 엄마가 궁금해졌다. 이유는 간단했다.
 
"'미스터 트롯'이 뭐가 그렇게 재밌는데?"
"그냥 신나. 젊은애들이 왜 이렇게 노래를 잘한다니... 걔네들 노래 부르는 거 보면, 에너지가 넘치고 너무 신나. 정말 신나. 시간 가는 줄 모른다니까."
"그게 그렇게 재밌어?"
"그럼. 얼마나 재미있는지 모른다. 젊은애들이 노래도 너무 잘하고, 말도 잘하고, 춤도 잘 추고... 정말 끼가 너무 많아. 어디서 그렇게 재주도 많은 애들을 나타났는지 모르겠다. 너무 신나고 에너지가 팍팍 생기는 것 같다."

 
트로트는 인생 산전수전의 슬픔과 비애, 기쁨과 한의 정서가 담겨있는 장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내 생각이 잘못되었을까. 트로트에 대한 내 생각은 구닥다리에다 편협했던 걸까.
 
집안에 흐르던 애잔하고 구슬픈 네박자 쿵짝
 
엄마는 예전부터 트로트를 좋아했다. 엄밀히 말해, 트로트를 좋아하기 보다는 KBS <가요무대>를 좋아하셨다. 월요일 밤 10시면 항상 가요무대를 켜놓고 흥얼거리셨다. 김동건 아나운서가 처음 진행했을 때부터 엄마는 왕팬이셨다. 나직이 따라 부르시면서 김동건 아나운서의 멘트에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몸을 흔들흔들하면서 쓸쓸한 얼굴로 흥얼거렸던 엄마였다. 그러다 전인석 아나운서로 교체되었을 때 엄마는 살짝 실망했다. 김동건 아나운서만의 그 감칠맛을 느낄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이내 전인석 아나운서의 진행에도 익숙해졌다. 월요일 밤, 우리집에 잔잔하게 흐르던 4박자 쿵짝. 결혼한 후, 가끔 친정에 가서 월요일 밤을 엄마와 보낼 때면 그 안정적인 트로트 박자가 집안에 바닷물처럼 고요하게 찰랑거렸고, 엄마는 고슬고슬한 빨래를 갠다든지, 다음날 아침 식사 거리를 준비하면서 조용히 흥얼거렸다.
 
그러다 엄마가 언젠가부터 가요무대를 잘 안보신다는 걸 알았다. 왜 안보냐고 물어보니 지루하다고 했다. 이건 무슨 소리인가 싶었더니, 엄마 말에 의하면 전인석이 진행할 때는 신선하고 젊은 감각으로 이야기해서 재미있었는데, 요즘은 너무 옛날 방식이어서 따분하다고 했다. 가끔 진행자가 꼰대같은 소리를 할 때도 있어서 재미없고 심지어 짜증까지 난다고 했다.
 
엄마의 변심(?)이 나는 살짝 당황스러웠다. 엄마가 변한 걸까. 가요무대가 변한 걸까.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엄마의 스타일이 변했다고 느끼게 된 건. 엄마는 그 무렵부터 재미있고 유쾌하고 명랑한 것들만 좋아하셨다. 누군가가 아프거나, 가난 때문에 힘들거나, 배신을 당해서 슬픈 드라마나 심각하거나 어려운 다큐멘터리 같은 건 딱 질색하셨다. 젊은 애들이 나오는 청춘드라마나 유쾌한 가족드라마나 (내 눈엔) 유치찬란한 사랑이야기, 그런 것들을 좋아하셨다.
 
오히려 요즘은 내가 <가요무대>를 본다. 노랫말을 듣고 있으면 참 유치하면서도 한편으론 우리 인생사를 솔직하고 쉽게도 얘기해놓았구나 싶다.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든다. 트로트가 요즘 그렇게 대세라는데, 왜 <가요무대>는 그만큼 인기가 없는 걸까. 단순히 예능적이고 비주얼적인 면이 부족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가수의 문제인걸까. 나는 나대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 예전에 가요무대를 쓸쓸한 얼굴로 보았던 엄마를 떠올린다.
 
어쨌거나 구슬프고 애절한 네박자 쿵짝을 엄마는 더 이상 듣지 않는다. 그러잖아도 웃을 일 없는 인생인데, 신나고 즐겁게 살고 싶다 했다. 젊고 발랄한 가수들이 부르는 빠르고 유쾌한 트로트가 엄마를 웃게 만든다. 엄마가 정말 좋아하는 것은 트로트일까 아니면 삶의 활력일까. 10대 소녀들이 아이돌에 열광하는 것처럼 '우리 찬원이'를 연발하는 엄마가 가끔은 낯설기도 하다.

하지만 그 역시 그 나름대로 받아들여야 할 일. 엄마의 그 '신명'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이해할 수 없을 것 같기도 하다. 그 나이가 되어야만 보이는 것, 느끼는 것이 있듯, 엄마도 엄마 나이에 느낄 수 있는 트로트의 신 매력을 재발견했다고 생각한다. 어쨌거나 인생이 즐겁고 재밌어졌다는 건 중요하고 소중한 것이니까.

그래도 가끔은 조용히 노래를 흥얼거리며 쓸쓸함 가득한 표정으로 가요무대를 보던 엄마의 젊은 시절이 그립기도, 애잔하기도 하다.  
미스터트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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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픈 것은 삶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도스또엡스키(1821-1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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