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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당 안에 걸린 다산 정약용 선생 초상. 안경 낀 모습이 이채롭다.
 초당 안에 걸린 다산 정약용 선생 초상. 안경 낀 모습이 이채롭다.
ⓒ 전용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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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이 본가에 올 때 혼자 몸이 아니었다고 한다.

흔히 이 부문은 전기ㆍ평전에서 빠지고, 연구자들의 각종 논저에도 찾아보기 어렵다. 또 '사실성'에 있어서 정확한 기록으로 정평이 있는 「자찬묘지명」에도 언급하지 않았다. 자식들을 포함 측근들의 기록에도 보이지 않는다.
 
임형택 교수가 1999년 서울의 고서점에서 한시 16수를 발견하였다. 여러 가지 필사해 놓은 책 사이에 「남당사(南塘詞)」라는 16절의 한시가 들어 있었다. 필사된 책 중에는 정약용의 『아언각비』의 일부도 끼어 있어서 시중의 화제를 모았다. 「남당사」의 서문이다.

다산의 소실이 쫓겨남을 당해 양근의 박생이 가는 편에 딸려 남당의 본가로 돌아가게 하였다. 박생이 호남의 장성에 이르러 부호인 김씨와 은밀히 모의하여 뜻을 빼앗으려 했다. 소실은 이를 알고 크게 곡을 하면서 마침내 박과 결단하여 끊고 곧장 금릉으로 달려가 남당 본가로는 가지 않았다.
 
다산의 옛 거처로 가서 날마다 연못과 누대와 꽃나무 주변을 서성이며 근심스런 생각과 원망과 사모하는 마음을 부쳤다. 금릉의 악소배들이 감히 다산을 한 발짝도 엿보지 못했다. 듣고 몹시 서글퍼서 마침내 「남당사」 16절을 짓는다. 가사는 모두 여인의 마음에서 나온 것을  말했을 뿐 한마디도 보탠 말이 없다. 모든 이가 살필 진저. (주석 4)

 
 주막집 동문매반가의 주인 할머니와 딸. 다산 정약용이 유배봇짐을 풀 수 있도록 골방을 내어준 은인이다. 사의재 뒷편에 동상으로 서 있다.
 주막집 동문매반가의 주인 할머니와 딸. 다산 정약용이 유배봇짐을 풀 수 있도록 골방을 내어준 은인이다. 사의재 뒷편에 동상으로 서 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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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이하면 정약용은 강진 유배시절 소실 정씨(鄭氏)를 두었고 홍임(紅任)이란 딸을 낳았다. 정씨는 정약용이 강진에서 처음 머물던 주막집 노파의 딸로 이후 10여 년 동안 지극정성으로 남편을 모셨다고 한다.
 
해배되어 본가인 마재로 돌아올 때 정씨는 홍임과 함께 따라 왔으나 정실부인 홍씨에게 내침을 당하여 친정으로 가지않고 남편과 살았던 옛 거처인 다산으로 돌아가 살면서 원망과 사모하는 마음을 노래하였는데 이것이 「남당사」란 것이다. 16절 중 두 수를 소개한다.

 갈 생각만 하는 님 내 마음 슬퍼지니
 밤마다 한 심지 향 하늘에 닿았겠네
 어이 알리 온 집안이 환영하던 그날이
 아가씨 집 운명 외려 기구하게 될 때임을. 
 
 어린 딸 총명함이 제 아비와 똑같아서
 아비 찾아 울면서 왜 안 오냐 묻는구나
 한나라는 소통국도 속량하여 왔다는데
 무슨 죄로 아이 지금 또 유배를 산단 말가. (주석 5)


정약용은 "하룻밤 지는 꽃은 1천 잎이고 / 우는 비둘기와 어미 제비 지붕 맴돌고 있다 / 외로운 나그네 돌아가란 말 없으니 / 어느 때나 침방에 들어 꽃다운 잔치를 여나 / 생각을 말아야지 / 생각을 말아야지 하면서도 애처롭게 꿈속에서나 얼굴 보고지고." - 1806년에 「아내 생각」이란 시를 짓는 등 부인 홍씨에 대한 정을 못내 그리워 하였다.
 
꿈속에서도 접근하려는 여인을 내쳤다는 시를 짓기도 하였고, 1813년에는 부인 홍씨가 혼사 때 입었던 낡은 치마를 보내오자 가위로 잘라서 아들ㆍ딸에게 글과 그림을 그려 주었던 살가운 남편이고 아버지였다.

그런데 유배지에서 소실을 두었다?

「남당사」의 작자가 누구냐를 두고 학계 일각에서 논란이 일었다. 다산초당의 은밀한 일을 알고 있는 한 문인일 것으로 추정되기도 하지만, 정약용 연구가 정민 교수는 바로 정약용 본인이라는 주장을 편다. 4가지 논거 중의 하나를 소개한다.

둘째, 다산 아닌 다른 사람이 이런 시를 지을 수가 없다. 다른 사람이 이 시를 지었다면 그 뜻은 다산의 야박한 처사를 나무라고, 여인의 원망을 동정하는 데 있다. 다산의 제자라면 감히 스승의 소실과 관련된 일을 이렇듯 시시콜콜히 적어 결과적으로 스승을 욕 뵈려 들 수는 없다. 무엇보다 그 내용이 다산만이 알 수 있고, 다산이라야 가늠할 수 있는 사연이다.  
 
시의 사연으로 보아 모녀가 강진으로 내려간 뒤로도 다산이 그들을 계속 살펴주었음을 알 수 있다. (주석 6)


정약용이 강진에 유배되었을 때는 40세의 아직 청정한 나이였다. 언제 끝날 지 기약없는 귀양살이 신세에 따뜻한 여심이 곁에 있었고, 두 사람 사이에 홍임이라는 딸이 생겼을 것이다. 오늘의 도덕관념으로는 정약용이 아니라 그의 할아비라도 용납되기 어려운 불륜이지만, 당시는 임금부터가 궁녀를 몇씩이나 두고 양반들은 소실을 당연시하던 시절이다. 


주석
4> 정민, 『삶을 바꾼 만남』, 360쪽.
5> 앞의 책, 362쪽.
6> 앞의 책, 370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다시 찾는 다산 정약용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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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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