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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일고 학생독립운동기념탑
 광주일고 학생독립운동기념탑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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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좌파와 민족주의 진영으로 나뉘어 있던 독립운동가들은 일제의 탄압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역량을 최대한 결집해야 한다는 반성 아래 단일 전선 결성을 모색했다. 그 결과 1927년 2월 15일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YMCA) 회관에서 회장 이상재(李商在), 부회장 홍명희(洪命熹)를 뽑은 신간회(新幹會)가 결성되었다. 그 후 5월 27일 자매 단체인 근우회(槿友會)가 창립되었다.

광주 학생들도 1926년 11월 3일 광주 부동정(현 불로동) 최규창(崔圭昌)의 하숙집에서 성진회(醒進會)를 조직한 이래 일제에 맞서 항일 독립운동을 펼칠 방법을 찾고 있었다. 성진회는 1927년 독서회로 확대되면서 광주고보(현 광주일고) ‧ 광주농업학교(현 광주자연과학고) ‧ 광주사범학교(현 광주교대) ‧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현 전남여고) ‧ 목포상업학교 등에 하부 조직을 두었다. 이때 김기권(金基權)과 장재성(張載性) 등은 자금 조달을 염두에 두고 학생소비조합을 만들었다.

학생소비조합 만들어 독립운동 준비

1927년 2월 5일 밤 광주사범학교 일본인 체육교사가 소등 후 도서실에서 공부하던 학생 윤형남(尹亨南)을 민족차별적인 언사로 모욕을 주었다. 이에 반발한 기숙사생 150명이 "조선인 본위의 교육을 실시하라!", "노예 교육을 철폐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이듬해 4월 28일에는 불온한 강령과 토의 사항을 내걸고 '전라북도 기자 대회'를 진행한 혐의로 기자 대표 6명이 구속됐다. 이때 조인현(趙仁賢)이 일제 착취 기관인 동양척식회사 지점 등을 폭파할 목적으로 3년 동안 폭탄을 제조해온 것이 드러나 민족의식을 가슴에 품어온 청년들에게 큰 자극을 주었다.
 
 전남여고 '광주학생독립운동 여학도 상'
 전남여고 "광주학생독립운동 여학도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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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에는 광주고보 학생 이경채(李景采) 등 8명이 〈조선독립선언문〉 배부 사건으로 구속된 사건도 있었다. 이 일을 계기로 광주고보 2·3학년생들이 '한·일 학생 교육 제도와 시설의 차이'를 지적하며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이때 광주농업학교 학생들도 동조 동맹휴학 투쟁에 돌입했다. 6월 26일에 벌어진 '광주 학생 동맹 휴학'이었다.

이어 8월 5일에는 전라남도 각 지역 소년운동가들이 무등산 증심사에서 간담회를 연 일로 연행되었다. 일제 경찰은 혹독한 고문 끝에 정홍교(丁洪敎)·고장환(高長煥)·유혁(柳赫) 등 8명이 서울에서 파견된 사실을 알아내고 이들을 구속했다.

동맹휴학, 독립선언문 배부 등 줄기찬 항쟁

끊임없이 이어진 일제와 독립운동 진영 사이의 마찰은 광주 학생들의 마음을 계속 흔들었다. 1928년 11월 초에는 광주여고보 장매성(張梅性)·박옥련(朴玉蓮)·박계남(朴繼男) 등 11명이 주도하여 비밀결사 소녀회를 조직했다. 1929년 3월 광주고보 학생 김몽길(金夢吉)·여도현(呂道鉉) 등이 학교 규칙을 지키지 않는다는 퇴학당했다.

이 사건으로 긴장이 지속되던 중 '광주 학생 동맹 휴학' 1주년인 6월 26일 광주고보 학생들이 수업을 거부하고 하교했다. 학생들은 운암역(현 북광주역)에서 "한국인은 야만스럽다"라고 비난하는 일본인 학생 곤토오(近藤)를 구타하기도 했다.
 
 광주교대 학생독립운동기념탑
 광주교대 학생독립운동기념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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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1929년 10월 30일 오후 5시반께 나주역에서 사건이 벌어졌다. 광주발 통학열차가 도착해 통학생들이 역사로 나오는 중 후쿠다 슈조(福田修三)와 스에요시(末吉克己) 등 광주중학교 학생들이 광주여고보 3학년 박기옥(朴己玉)·이금자(李錦子)·이광춘(李光春) 등의 댕기머리를 잡아당기면서 희롱했다. 뒤에 나오던 박기옥의 4촌동생 광주고보 2학년 박준채(朴準埰)가 그것을 보고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박준채와 일본 학생들이 충돌하자 최희선(崔熙善)·김보섭(金普燮) 등 광주고보 학생 10여 명이 가담했다. 출동한 역전 파출소 순사들이 일방적으로 일본인 학생들 편을 들어 박준채 등 한국 학생들을 구타했다. 일단 사건은 거기서 끝이 났다.

일본 중학생의 조선 여학생 희롱으로 1차 발단

이 충돌 사건은 11월 1일 광주역에서 재현되었다. 이틀 전 나주역 싸움 때 현장에 없었던 일본인 중학생 여러 명이 광주고보 정세면(鄭世勉)에게 시비를 걸었다. 다시 한·일간 학생 충돌이 벌어졌고, 두 학교의 교사들이 달려와 일을 수습하려 했다. 하지만 일본인 중학교 교사들은 도리어 학생들을 부추기는 경향이었고, 한국인 교사들을 얕잡아 대하면서 협의가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양쪽 모두 동시에 퇴각하는 것으로 일단락이 되었다.

독서회가 중심이 된 광주 학생들은 11월 3일이 일본 국왕의 생일인 메이지절(明治節)이고, 마침 음력 10월 3일로 개천절이었으며, 독서회 전신인 성진회의 창립 3주년 기념일이라는 사실에 맞춰 대규모 실력 행사를 벌이기로 했다. 메이지절 기념식 후에 진행될 신사 참배 거부를 시작으로 항일 투쟁에 들어갈 계획이었다.

일본왕 생일 기념 신사참배 거부 후 항일 투쟁 돌입 계획

오전 11시께 신사 참배 후 돌아오던 사이오토(濟藤敏夫)·마스나가(松永良雄) 등 16명의 일본인 중학생들이 광주신시 앞 도랑가에서 광주고보 최쌍현(崔雙鉉)을 단도로 찔려 얼굴에 부상을 입혔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광주고보 학생들이 일본인 학생들을 구타하기 시작했다. 결국 광주중학교 학생들은 광주역 안까지 달아났다.

광주고보 학생들은 계속 뒤따라가 그들을 두들겨팼다. 광주중학생 백수십 명이 유도 교사 이다(伊田)의 지휘 아래 단도와 목검을 들고 몰려왔다. 광주고보·광주농업학교 학생들도 소식을 듣고 무리를 지어 역으로 달려왔다.
 
 광주자연과학고 학생독립운동기념탑
 광주자연과학고 학생독립운동기념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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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치하던 양교 학생들은 결국 이틀 전 1일의 광주역 사태 때처럼 동시에 퇴각하였다. 학교로 돌아온 광주고보 학생들은 노병주(盧秉柱)의 사회로 집회를 열어 가두시위 투쟁을 결의했다. 300여 명의 학생들은 김병기(金炳基)·강윤석(康潤錫)·김용대(金容大)·김상환(金相奐) 등의 지휘를 받아 목봉과 검도 도구 따위를 챙겨들고 오후 1시께 시내로 진출했다.

강윤석·김무삼(金戊三)·김향남(金向南)·김상섭(金相燮) 등 기골 장대한 학생들이 선두를 이끌었다. 충장로와 광주역을 지나 광주중학교를 습격할 계획이었다. 광주고보 학생들과 광주농업학교 학생들이 뒤를 따르며 "조선독립 만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며 행진했다. 그러나 일제 경찰이 동원한 방어 인력에 막혀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다.

광주사범과 여고보 학생들도 가세

시위대는 진격 방향을 일본인 소학교 쪽으로 바꾸어서 광주중학교를 습격하기로 계획을 변경했다. 하지만 이 길 역시 막혔다. 이때 도청 옆에서 광주사범학교 학생 100여 명이 가세했다. 광주여고보 학생들 일부도 가담하였다.

기세가 오른 시위대는 도립병원 앞을 지나 재차 광주중학교 습격을 시도했다. 하지만 경찰과 소방대 등에 가로막혀 광주중학교를 습격할 수 없었다. 거리의 시민들이 학생들의 투쟁에 박수와 고함으로 지지를 보냈고, 일본인 상점들은 문을 닫았다. 학생들은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광주고보 학생들은 강당에서 김향남·오쾌일(吳快一)·정명섭(丁明燮) 등이 제안한 '부상자 문제'와 '금후의 연락 방법' 등을 결의한 후 대오를 지어 귀가했다. 귀가 중 박상기(朴相琦)·최상을(崔相乙) 등은 광주역에서 일본인 순사와 역원, 일본인 중학생 12명을 구타해 부상을 입혔다.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회관 1층 제향 공간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회관 1층 제향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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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3일 가두 투쟁으로 광주고보 학생 39명과 광주농업학교 학생 1명이 구속되었다. 일제의 탄압은 학생들의 항쟁심을 오히려 북돋우었고, 학생들의 투쟁이 전국적 항일운동으로 발전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장석천(張錫天)·장재성·강석원(姜錫元)·국채진(鞠埰鎭)·박오봉(朴五鳳)·임종근(林鍾根)·나승규(羅承奎) 등 신간회 광주지부·청년단체·사회단체 청년들은 '학생 투쟁 지도 본부'를 설치하여 학생들의 투쟁을 전국적 항일 민족운동으로 승화시키는 데 힘을 쏟았다.

따라서 11월 12일의 제2차 시위는 아주 조직적으로 펼쳐졌다. 항일 격문이 시내 중요 요소에 뿌려졌고, 광주고보 학생들은 형무소 앞에서 시위를 벌였으며, 조길룡(曺吉龍)·김남철(金南哲)·김현수(金玄洙) 등의 주도 아래 광주농업학교 학생 140명이 달려와 가세했다. 교문을 돌파하지 못한 광주여고보 학생들은 다음날부터 동맹휴학에 돌입했다.

12일 당일 광주고보 학생 190여 명과 광주농업학교 학생 60여 명이 체포되었고, 그 중 170여 명이 광주형무소에 투옥되었다. 광주고보 학생 300여 명과 광주농업학교 참가자 전원이 퇴학되었다. 광주여고보는 장경례(張慶禮)·박봉순(朴奉旬) 등 17명을 무기 정학시켰다가, 학생들이 동맹휴학으로 항의하자 64명을 또 무기 정학시켰다. 광주사범학교도 38명을 퇴학시켰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철저히 보도통제한 일제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신문에 보도되지 않았다. 일제는 광주와 타 지역 사람 사이를 오가는 편지까지 검열하면서 광주학생독립운동 소식이 번지는 것을 막으려 했지만 애당초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가까운 목포, 나주, 함평 등지부터 독립운동이 일어났고, 12월 2일 밤에는 서울 시내에 전국 학생·민중 총궐기를 촉구하는 격문을 살포되었다.

12월 5일 경성제2고보(경복고)의 동맹휴학을 시작으로 경성제1고보(현 경기고)·중동·경신·보성·중앙·휘문·배재·이화·동덕·협성실업학교 등이 동맹휴학을 벌였다. 12월 9일에는 경신·보성·중앙·휘문·협성실업학교 등의 학생들이 가두 시위를 펼쳤다. 13일까지 계속된 가두 시위에는 1만2000여 학생들이 참여했고, 1400여 명이 체포되었다. 시위는 함흥, 원산, 신의주, 평양, 개성은 물론 남쪽으로도 내려가 진주, 대구, 부산, 전주, 제주 등지의 보통학교(초등학교) 학생들까지 시위에 나섰다.

신간회 간부 김병로(金炳魯)·허헌(許憲)·황상규(黃尙奎) 등은 광주를 방문하여 학생 항쟁의 진상을 파악한 후 12월 13일 서울에서 민중 대회를 열 준비에 돌입했다. 광주 학생 운동의 열기를 더욱 확산시키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일제의 탄압으로 대회는 열리지 못했고, 한용운(韓龍雲)·조병옥(趙炳玉)·권동진(權東鎭)을 비롯해 신간회와 근우회 등의 회원 91명이 일제에 검거되었다.

전국으로 확산된 광주학생독립운동

광주고보 학생들은 12월 10일 다시 문을 연 학교가 1930년 1월 9일과 10일 2학기 시험을 실시하자 4학년 이하 모두 백지 답안지를 제출했다. 학교 측은 65명을 퇴학시켰다. 19일에는 2학년 학생 전체 자퇴 운동을 전개하려다 4명이 또 퇴학되었다. 광주여고보에서도 1월 10일 이후 백지 동맹을 시도하다가 주동 학생 2명이 퇴학당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1930년 1월 개학 이후 다시 온 나라로 확산되었다. 1월 15일 보성전문학교를 비롯한 서울 학생들이 광주 학생 지원과 일제의 살인 정책을 규탄하면서 시위를 벌이고 동맹휴학 투쟁을 전개했다. 3월까지 계속된 학생 독립운동에는 전국 방방곡곡 320개 학교, 당시 중등학교 이상 재학생 8만9천여 명의 60%인 5만4천여 학생들이 '광주 학생 운동'을 벌였다. 1642명이 체포되었고, 퇴학 582명과 무기정학 2330명의 피해자가 발생했다. 광주학생운동은 "3·1운동 이후 최대의 대일 민족항쟁이었다.(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회관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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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생독립운동을 기리는 후배들의 정성

광주에는 서구 학생독립로 30의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과 기념탑 외에도 자랑스러운 선배를 가졌다는 자부심을 과시하고 싶은 고향과 학교 후배들이 건립한 조형물이 여럿 있다. 당시 학교 건물이 광주광역시 기념물 26호로 지정된 전남여고(동구 제봉로 158번길 8)에는 1959년과 2017년에 각각 세워진 '학생독립운동 여학도 기념비'와 '광주학생독립운동 여학도 상(像)'이 있고, 광주일고(북구 독립로 237번길 33), 광주자연과학고(북구 능안로 30), 광주교대(북구 필문대로 55)에도 서로 다른 형상을 한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이 있다. 광주일고 기념탑 앞면에는 '우리는 피 끓는 학생이다. 오직 바른 길만이 우리의 생명이다'라는 뜨겁고 강건한 외침이 새겨져 있다.

학생독립운동으로 구속된 광주 학생들 중 대구형무소에 투옥되었다가 출옥한 지사들은 1931년 6월 16일 대구 달성공원에서 단체 기념사진을 찍었다. 대구경북학생산악연맹은 1959년 이래 해마다 팔공산에서 광주학생운동을 기리는 60km 등반 대회를 열어 2020년 62회째를 개최했다. 왜 대구경북에서 광주학생독립운동을 기리느냐 식의 어리석은 질문을 하지 말라. 우리는 모두 한 나라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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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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