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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5일 일요일, 칠레에서는 국민투표가 열렸다. 내용은 첫째 제헌에 대한 찬반을 묻는 것이었고 두 번째로 새로운 헌법의 작성 주체를 기존 국회를 배제한 제헌의회에 맡길지 아니면 기존 국회와 선출된 시민대표를 반반 섞은 혼합형으로 할지를 묻는 것이었다.

지난해 10월부터 시작된 칠레 항쟁에서 민중들의 요구로 제헌이 추진됐다. 투표율 약 51%로 제헌 찬성이 약 78%로 제헌이 가결됐고, 헌법 작성 주체도 기존 국회를 배제한 제헌의회 안이 78.9%로 가결됐다. 이로서 칠레 민중들은 자신들이 증오하는 기존 헌법 소위 '피노체트 헌법'을 역사 속으로 보내버렸다.

이로 인해 칠레의 좌파진영과 그 지지자들은 결과에 환호하고 있다. 좌파 진영의 대표적인 대권 주자 다니엘 자두에 또한 자신의 페이스북에 칠레를 더 나은 나라로 바꿀 수 있는 기회라며 투표 결과에 환호했다.

그렇다면 소위 피노체트 헌법이라고 불리던 칠레의 기존 헌법은 어떻게 탄생한 것일까? 그리고 이 제헌투표는 역사적·사회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아옌데의 죽음과 함께 시작된 신자유주의와 피노체트 헌법

1970년, 칠레에는 세계 최초로 혁명이 아닌 선거를 통해 사회주의 정부가 들어서게 된다. 대통령으로 당선된 살바도르 아옌데(1908~1973)는 구리 산업 국유화와 아동 무상급식, 토지개혁 등 좌파적 정책들을 시행한다. 남녀 동일임금, 전국민 생활임금제, 국가 차원의 공교육 보장, 사회보장 확대 등 민생정책도 추진했고 컴퓨터를 활용해서 경제정책에 도입하려고 하는 등 당시 기준으로는 참신했던 실험을 단행했다.

당시 칠레는 지금처럼 빈부격차가 매우 극심한 나라였다. 중진국이었으나 국민의 생활은 그 정도를 따라가질 못했다. 아옌데의 정책으로 과거보다 민생이 조금씩 해결되기 시작하자 아옌데 정권에 대한 지지율은 상승하게 되고 1971년 지방선거에서 승리하게 된다.

이에 칠레 우파들은 위기의식을 느끼게 된다. 거기에 아옌데 정권의 국유화 정책으로 피해를 본 미국 또한 아옌데 정권을 곱게 보지 않았다. 특히 쿠바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려고 하는 아옌데의 외교정책을 보고 미국은 아옌데를 적극적으로 견제하기 시작했다. 칠레 우파와 미국은 상호 협력을 통해 아옌데 정권을 흔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칠레에 대한 경제 제재와 구리 재고 방출을 통한 칠레 구리 산업에 타격을 가하는 방식으로 아옌데 정권을 흔들려고 했으나 이러한 경제적 공격에도 불구하고 아옌데 정권이 유지됐다. 그러자 미국은 피노체트를 지원하며 쿠데타를 종용했다. 피노체트는 결국 쿠데타를 일으켜 민주적으로 선출된 아옌데 정권을 무너뜨린다. 아옌데는 끝까지 저항하다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피노체트 군부정권은 집권하자마자 아옌데의 모든 정책을 무효화 시켜버렸다. 그리고 칠레는 미국의 시카고 학파 경제학자들에 의해 신자유주의 정책 실험장이 됐다. 칠레는 그렇게 최초의 신자유주의 국가가 된 것이다. 1980년에 만들어진 헌법 소위 피노체트 헌법은 그러한 신자유주의 칠레를 명문화한 문서였다. 

피노체트 헌법 내용에는 국가가 국민에게 복지를 해야할 의무가 '없다'. 국민에게 의료와 교육을 제공할 의무를 명시하지 않고 국가의 개입을 제한시켰다. 이는 세계 최초의 신자유주의 헌법이었다.

실험장이 된 칠레는 국유화 조치된 산업들을 다시 민영화했다. 그리고 아옌데의 복지정책들도 민영화하거나 폐기했으며, 인간 생활에 가장 중요한 교육과 연금, 의료마저 민간의 손에 넘겨버렸다. 공적 영역은 사라지고 독점자본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렇게 칠레는 사적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의 천국이 됐다.

칠레는 1989년 민주화를 통해 피노체트를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가 만들어낸 헌법 자체를 없애지 못했다. 민주화 세력들이 권력의 민간이양과 헌법 존치를 타협한 것도 있지만 이후에도 계속 제헌 등을 시도할 때 마다 우파들의 강력한 반대로 인해 실패했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시작점에서 신자유주의 헌법을 무너뜨리다

피노체트 헌법으로 인해 칠레의 신자유주의는 계속 생명력을 얻었다. 민영화된 연금회사는 노동자들이 낸 기여금보다 훨씬 낮게 연금을 지불했으며(남성 기준 기여금 대비 38%만 지불하고 있다고 한다), 민영화된 교육은 살인적인 등록금으로 빈익빈 부익부를 강화시켰다. 의료도 계속 민영화 상태였고, 노동과 관련된 법률들 또한 자본에게 유리하게 유지됐다. 민주화 된 이후에도 칠레는 한 동안 그 헌법의 마수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이로 인해 민주화 이후에도 칠레는 현재에도 빈곤율이 45%에 다다르고 지니계수 또한 0.45로 OECD 국가에서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하는 나라가 됐다. 이런 신자유주의를 개혁하기 위해 학생과 노동자들이 싸우고 개혁 정권이 집권하기도 했지만, 피노체트 헌법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그러다 2019년 10월, 지하철 요금 인상 정책이 아옌데 죽임 이후 46년간 참아왔던 칠레인들의 분노를 터트리게 했다. 지하철 요금 인상에 반대하는 집회는 점점 칠레의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한 저항으로 나오게 됐고, 이는 제헌을 요구하는 수준으로 격상된다.

당연히 칠레 우파들은 이들의 요구를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억압하면 억압할 수록 분노한 칠레 민중들이 투쟁에 참여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시위 조직력이 강해지고 더 이상 억누르면 상황이 더 악화될 것 같아지자, 결국 우파 정부인 피녜라 정권은 칠레 민중에게 항복선언을 하게 된다. 

처음에는 정책 철회를 선언하고 대국민 사과를 했고, 노동시간 단축, 의료보험과 연금 개선, 최저임금 인상 등을 제시했다. 그러나 칠레 민중들은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요구하며 제헌을 주장했다. 결국 피녜라 정권이 요구를 수용하면서 마침내 제헌을 묻는 국민투표가 열리게 됐다.

10월 25일 국민투표를 거쳐 피노체트 헌법은 드디어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또한 미국 경제학자들에 의해 실험장이 된 칠레는 국민투표를 통해 이 나라의 주인이 누구인지 전 세계에 알렸다.

칠레는 아옌데의 죽음 이후 47년을 기다려 왔다. 아옌데의 죽음은 남미 사회에 큰 충격이었다. 그의 죽음은 더 나은 사회를 만들고자 한 민중들의 의지를 폭력으로 꺾어버린 사건이었고, 미국이라는 외세 강대국에 의해 조국의 주권이 농락당한 사건이었다.

고로 이 국민투표는 평범한 의사결정 행위가 아니다. 미국 경제학자들과 기득권층에 의해 강제로 신자유주의의 실험장이자 첫 시작지가 돼야 했던 칠레는 이 국민투표를 통해 그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리고 2008년 이후 생명력을 잃었다고 비판 받는 신자유주의 또한 자신의 시작점에서 심판받았다. 

앞으로 제헌의회가 어떻게 꾸려질 지 그리고 헌법을 어떤 내용으로 만들어 나갈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한 가지 추측할 수 있는 것은 10월 초 여론조사 기관 Cadem에서 발표되었던 여론조사에서는 칠레인이 생각하는 칠레의 정치경제모델로 사회민주주의를 선택한 비율이 68%로 나왔다. 과연 칠레인들의 꿈은 이뤄질 수 있을까? 앞으로 가장 관심 가지고 볼 부분이다. 신자유주의가 시작되었던 나라에서 신자유주의를 끝내고 어떤 사회로 갈 지 말이다.

태그:#칠레, #개헌, #국민투표, #피노체트 헌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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