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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중반을 지나며 고향에 대해 다시 생각해봅니다. 내가 살던 서울을 답사하며 얻은 성찰과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보려 합니다.[편집자말]
나는 1973년 수유동에 있는 한신초등학교에 입학했다. 한국신학대학교, 지금은 수원으로 옮긴 한신대학교가 세운 사립 초등학교다.

입학식 날, 강당으로 들어서자 대여섯 명 아이들이 한데 모여있었다. 나랑 같은 교복을 입고 있었지만 그 아이들은 좀 달라 보였다. 짧은 머리의 남자아이들과 똑단발의 여자아이들. 여느 입학생들보다 피부가 까맣고 거칠던 그 아이들은 눈에 확 띄었다.

그중 몇몇과 한 반이 됐고 그 아이 중 하나와 난 짝이 되었다. 왠지 기죽어 보이던 그 아이는 집이 굉장히 멀었다. 내 짝은 아침 일찍 동네 친구들, 그리고 언니 오빠들과 스쿨버스를 탄다고 했다. 그렇게 버스를 타고, 한강을 건너고, 서울 시내를 거치고도 한참을 와야 학교에 도착한다고 했다.

내 짝과 그 동네 아이들은 어떤 이유로 집 근처 학교가 아닌 멀리 있는 학교에 다니게 됐을까. 그것도 사립학교에. 거기엔 차별과 배제의 역사가 숨어 있었다.

내곡동 '에틴저 마을'에서 온 친구
   
서울 서초구 내곡동 헌인마을 이 곳은 예전에 한센인들의 정착촌인 '에틴저 마을'이 있었다.
▲ 서울 서초구 내곡동 헌인마을 이 곳은 예전에 한센인들의 정착촌인 "에틴저 마을"이 있었다.
ⓒ 강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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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미감아(未感兒)'라는 단어를 들어 보았는가? 사전적 의미로는 "병따위에 아직 감염되지 아니한 아이"를 의미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한센병 부모에게서 태어났지만 한센병에 걸리지 않은 아이를 한때 미감아라고 불렀다.

우리나라에는 예전에 한센병을 치유한 사람들이 모여 살던 마을이 전국에 있었다. '음성 나환자촌'이라고도 불렀는데, 서울 서초구 내곡동의 헌인마을도 그중 한 곳이었다. 한 마을에서 가족을 이루고 살았으니 아이들은 계속 태어나고, 그 아이들이 학령기가 되면 학교에 가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당시 지역사회는 한센인과 그 가족들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1969년 서울 성동구 내곡동(당시엔 지금의 강남 3구가 성동구였다)에 있던 음성 나환자 정착촌 '에틴저 마을'의 학령기 아동 5명이 인근 '대왕국민학교'에 입학하려 했으나 문제가 생겼다. 에틴저는 그 마을에 도움을 준 외국인 선교사의 이름이다.

당시 보건사회부 장관이 발행한 '미감아증명서', 즉 '이 아동은 한센병에 걸리지 않고 건강하다는 증명서'를 첨부해 입학을 허가한다고 했으나 학부모들이 들고 일어났다. <조선일보> 1969년 4월 26일자에 실린 '또 미감아(未感児) 울리는 분별없는 등교 거부' 기사는 대왕국민학교 전교생이 등교 거부하고 있다고 전한다.

기사 제목의 '또'라는 단어에서 보듯이 한센병 자녀들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움직임은 그 이전부터 계속 있었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는 한센인 자녀 중 감염되지 않은 아이들을 '미감아 보육원'에 수용하기도 했다.

한센인 시인 '한하운'은 <경향신문> 1962년 3월 17일자에 기고한 '나병은 상품이 아니다' 칼럼에서 한센인 차별 정책을 비판하며, 특히 한센인 자녀 교육 문제 해결을 촉구한다.
 
특히 등교 문제에 있어서 아직도 반대를 받고 있는데 시급히 등교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거절된 교육에서 군에 입대한 모순을 시정 하여야 한다.
 
한하운은 한센인 자녀들에게 학교는 가지 못하게 하면서 군대는 가라고 하는 모순을 지적한 것이다. 이렇듯 한센인 자녀들이 학령기가 되어 인근 학교에 입학하려고 하면 항상 지역사회의 극렬한 반대가 있었다.

1969년에도 서울의 대왕국민학교뿐 아니라 경기도 용인에서도 등교 거부하는 학교가 있었다. 문제가 점점 커지자 당시 문교부 장관이 자기 딸을 대왕국민학교로 전학 보내고 각계각층이 나서 계몽 활동을 벌여도 학부모들을 설득하기는 힘들었다. 대신 새로운 학교의 설립이 대안으로 떠올랐다. 마침 미감아와 일반 아동을 통합 교육하겠다고 나서는 데가 있었다. 바로 한국신학대학교였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돼 1969년 6월 22일 한국신학대학 병설 한신국민학교가 개교했다. 1969년에는 미감아 아동들만 교육했으나 1970년부터는 일반 아동들도 모집했다. 1973년에 나와 함께 입학한 내 짝도 한강 건너 멀리에 있던 내곡동 에틴저마을에서 온 미감아였다.

여전히 '관리' 당하는 한센인

당시 일들을 좀더 알아보기 위해 한신초등학교를 방문했다. 강북구 수유동에 있던 학교는 도봉구 쌍문동으로 옮긴 지 오래였다. 40년 가까이 근무한 강종국 교장은 그 아이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1991년 마지막 한 아이가 졸업한 뒤로 미감아 합동 교육은 종료됐습니다. 비록 한 명이었지만 학교에서 큰 관심을 보였던 기억이 납니다."

강 교장은 학교 자료를 여럿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초창기 학교 설립에 관한 내용과 미감아 교육에 대한 자료도 있었다. 그 중 20년 넘게 내곡동 '에틴저 마을'의 아이들을 통학시킨 스쿨버스 기사가 마지막 한 명 남은 아이를 자신의 승용차로 통학시켰다는 이야기가 인상 깊었다.
 
헌인마을, 한센인 정착촌의 옛 흔적 예전에는 축사였을 곳에 가구 공장들이 들어섰다. 교회 탑 너머 멀리 롯데타워가 신기루처럼 보인다.
▲ 헌인마을, 한센인 정착촌의 옛 흔적 예전에는 축사였을 곳에 가구 공장들이 들어섰다. 교회 탑 너머 멀리 롯데타워가 신기루처럼 보인다.
ⓒ 강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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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센병 정책을 연구한 사회학자 김재형의 논문 '한센병 치료제의 발전과 한센인 강제격리정책의 변화'에 의하면, 한센인을 격리하며 차별한 역사는 오래됐다. 한센인을 관리하던 '전염병 예방법'이 1963년 개정돼 '강제 격리' 조항은 폐지됐지만 완치된 "음성환자 중에서도 돌아갈 곳"이 있거나 "정부에서 마련한 정착촌"에 거주할 사람들만 퇴원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 정착촌 중 지금의 서초구 내곡동에 내 짝과 친구들이 살던 '에틴저 마을'이 있었다. 부산대학교 김려실 교수는 논문 '1970년대 생명정치와 한센병 관리정책'에서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권은 한센인들을 자신들이 세운 정치적 준거에 따라 관리했다"고 한다.

예전에는 "강제 수용소에서 격리"했다면 이제는 "특수지역으로 분류된 농장으로 이주"시켜 "농업이나 축산업"에 종사하게 했다는 것이다. 이 논문은 "1980년대 초반 한센인 축산단지가 국가 축산업의 상당 부분을 점유했다"고도 밝힌다. 하지만 경제적 성공이 한센인에게 '정치적 시민권'을 부여하지는 않았다.

격리된 시설에서는 벗어났지만 한센인들은 정착촌에서도 관리 대상이 됐다. 현재도 한센인들은 집에서 통원 치료를 한다 하더라도 질병관리청의 '한센인 관리지침'에 의해 관리받는 대상이다.

차별과 배제의 아픔에도...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

우리나라에는 2019년 말 현재 9288명의 환자가 있다. 그중 약 61.7%인 5728명이 집에서, 30%인 2783명이 한센인 정착 마을에서, 8.3%인 777명이 보호시설에 살고 있다. 정착 마을은 2020년 현재 전국에 82개가 있으며 보호시설은 전국에 5개소가 있다.

한센병은 BCG만 제때 접종해도 99.9% 예방할 수 있고, 발병한다 하더라도 치료제 '리팜피신' 600mg을 단 한 번 복용하면 3일 이내에 99.9% 전염력이 소실된다고 '국립소록도병원' 관계자는 밝힌다.
 
재개발의 꿈 서초구 내곡동 헌인마을은 재개발의 꿈을 꾸고 있다.
▲ 재개발의 꿈 서초구 내곡동 헌인마을은 재개발의 꿈을 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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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인교회 한적한 헌인마을을 오래된 교회가 지키고 있었다.
▲ 헌인교회 한적한 헌인마을을 오래된 교회가 지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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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다녀온 서울특별시 내곡동 헌인마을, 옛 에틴저 마을은 지금은 쇠락한 가구단지로 보였다. 이곳뿐 아니라 전국의 한센인 정착촌은 가구단지로 변한 곳이 많다. 도시 인근 축산업에 규제가 많아지자 축사를 영세한 가구 공장에 임대한 것이다. 헌인마을은 현재 재개발의 꿈을 꾸는 사무실과 예전엔 축사였을 가구 공장들이 한데 모여 있다.

그리고 오래전 내 친구들과 가족들이 다녔을 교회가 동네를 지키고 있었다. 교회 목사는 에틴저 마을에 살던 사람들 대부분이 다른 곳으로 떠났지만 아직 교회에 나오는 교인들도 여럿 있다고 전해주었다. 차별과 배제의 아픔을 겪었던 한센인과 그 가족들은 어디에선가 열심히 살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에틴저 마을 이야기를 알고 계신 분께서는 제 이메일로 연락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계속 취재할 예정입니다. 이 기사는 강대호 시민기자의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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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중반을 지나며 고향에 대해 다시 생각해봅니다. 내가 나고 자란 서울을 답사하며 얻은 성찰과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보고 있습니다. 40년 넘게 살던 아파트를 떠나 산 아래 옥상집에 사는 경험과 동화 공부를 하는 이야기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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