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15 08:00최종 업데이트 20.10.15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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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일본 총리. ⓒ 연합뉴스

 
스가 요시히데 내각이 출범한 지 한 달이 흘렀다. 일단 출발은 좋다. 허니문 효과도 있었겠지만 NHK가 매월 실시하는 정기여론조사에서 출범 직후 지지율은 62%로 나왔다. 학술회의 추천자 임명 거부로 시끄러웠던 10월에도 불과 7%포인트 하락한 55%를 기록했다.

2018년부터 9월 퇴임 시까지 한 번도 과반 지지율을 넘지 못한 아베 내각과 비교한다면 탄탄한 지지율이며, 심지어 자민당이 정권을 재탈환한 2013년 1월의 아베 내각 지지율 63%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이르면 내년 초, 늦어도 가을에는 실시되는 중의원 총선거를 대비한 '임시내각' 성격이 짙었던 스가 정권이 오래 갈 가능성도 생겨났다. 내각의 얼굴인 스가 총리의 인기가 떨어지지 않는다면 굳이 총해산을 할 필요가 없다. 물론 지지율이 올라간다면 높은 지지율을 무기로 선제적 총해산을 감행할 수도 있지만, 스가 총리가 '일하는 내각'을 천명한 이상 이럴 가능성은 별로 없다. 지금 내각 인선으로, 그것이 퍼포먼스든 뭐든 일단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에 더더욱 그렇다.

'임시'인 줄 알았는데... 스가의 경쟁력

스가 내각은 외교적 성과와 거시적 경기 부양책 등에 초점을 맞췄던 전임 아베 내각에 비해 서민들이 실생활에서 체감할 수 있는 세세한 정책들을 많이 내놓고 있다. 일각에서는 포퓰리즘이라 비판하지만 통신비 인하, 공공기관의 인감문화 철폐 등은 매우 임팩트가 크다.

일본의 통신비 시장은 NTT가 주도하고 KDDI와 소프트뱅크가 따라가는, 일종의 '가격 카르텔'이 형성돼 있다. <마이나비>가 2016년 전국의 성인남녀 6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인터넷 회선 요금이 월 5181엔, 스마트폰 요금이 월 1만1841엔으로 집계됐다.

올해 3월 총무성 통계국이 발표한 4인 가족의 월 평균 생활비 33만 엔의 상세내역을 보면 통신비로 가구당 2만4000엔을 지출했다. 물론 스마트폰과 인터넷이 개인생활에 차지하는 비중이 워낙 크기 때문에 총 생활비의 7%에 달하는 이 통신비 고정 지출이 그렇게 크게 느껴지지 않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결정적인 문제는 통신비 요금체계가 어떻게 형성된 것인지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2019년 6월 총무성의 종합통신기반국 요금서비스과는 <모바일 접속료의 산정기준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통신비 인하를 주장하는 여론이 높아지자 통신시장을 독점하고 있는 NTT도코모, KDDI, 소프트뱅크 등 3개 회사의 원가 내역, 이윤율 등을 조사한 것인데, 가장 중요한 핵심 사안들은 전부 백지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총무성은 보고서 표지에 '빨간색 테두리 안의 내용은 자문위원들만 볼 수 있다'고 적어놨지만 어떤 식으로 통신비의 원가가 결정되고, 각 비용항목이 지금까지 어떻게 변해왔는지, 그리고 이윤은 어떻게 되는지 이 보고서로는 도저히 알 수가 없다.

반면 위의 통신 3사는 접속료 추이 그래프에 대해서는 지난 2010년에 비해 매년 엄청난 접속료 인하를 감행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즉 자기들이 해 온 좋은 실적은 일반에 공개하고 통신비 산정 기준 원가, 이윤 등에 관한 부분은 아예 공개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2019년 6월 총무성의 종합통신기반국 요금서비스과가 발표한 <모바일 접속료의 산정기준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보고서. 가장 중요한 핵심 사안들은 전부 백지다. ⓒ 박철현

  

ⓒ 박철현

 
게다가 이런 뉴스들은 일본 언론에 잘 보도되지 않는다. 이 보고서에 관한 기사 역시 찾아보기 힘들다. NTT도코모, KDDI, 소프트뱅크가 언론사의 가장 큰 광고주들이기 때문이다. 언론뿐만 아니다. 통신 3사를 감시, 규제할 위치에 있는 총무성 관료들은 이 회사들을 잘 건드리지 않는다. 가령 이 보고서만 하더라도 총무성이 통신비 개혁에 강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면 전체 내용을 일반에 공개했을 것이다. 빨간색 테두리 안의 민감한 내용이 밝혀지면 곤란한 쪽은 기업들이다. 총무성이 기업을 위해 알아서 기었고, 그 이유를 굳이 말하자면 관료들의 퇴직 후 생계가 아닌가 한다.

아무튼 이런 거대한 복마전에 '통신비 인하'를 내걸고 스가 총리가 뛰어들었다. 게다가 스가 총리는 '규제개혁'으로 유명했던 제3차 고이즈미 개조내각 시절 총무성 부대신으로 입각했고 제1차 아베 내각 시기엔 총무성 대신을 역임한 바 있어 이 부분의 개혁 필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서민친화 정책으로 인기몰이

또한 통신비 인하와 더불어 NHK 수신료도 인하될 가능성이 크다. 명분도 뚜렷하다. 그는 "코로나19 사태로 시민들의 생활이 어렵다"면서 "가계부담 경감을 위해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찾아야 한다"는 서민친화적 태도를 띠고 있다. 정부가 직접 시행할 수는 없지만 여론의 지지와 명분을 등에 업고 규제, 시정 방침을 내릴 수 있는 행정권한을 최대한으로 활용하겠다는 뜻이다.

도장 역시 마찬가지다. 차기 총리 후보로 거론되는 고노 다로 행정개혁담당상은 취임 일성으로 "도장문화는 존중하고 나도 (도장을) 좋아하지만, 행정 처리에서 도장과 팩스로 시간을 지체하는 건 말도 안 된다"고 밝혔고, 이 의견은 폭발적인 지지를 얻었다.
 

고노 다로 일본 행정개혁담당 대신 ⓒ EPA=연합뉴스

 
도장은 일본사회의 아이덴티티 중 하나이다. 도장을 찍은 사람에게 모든 책임을 지우거나, 혹은 모두가 도장을 찍었으니 아무도 책임을 지지 말자는 일본사회 특유의 정신적 문화에 혁혁한 공을 세우고 있는 중이다. 또한 자필 사인은 변조가 가능하지만 인감증명서, 혹은 인감카드에 등록된 도장은 변조가 불가능하다는 근거 없는 막연한 믿음도 작용했다. 이런 틀에 박힌 생각이 일본사회를 엄청나게 지체시켜 왔다.

간단한 사인 하나면 해결될 것을 도장 준비하고, 인주를 묻힌 후 찍고, 인감증명서와 대조하는 작업을 거친다. 이런 작업을 지금 이 순간에도 일본열도 곳곳에서 수천수만 명의 사람이 하고 있을 것이다. 십초씩만 계산해도 매일 몇 시간씩 그냥 낭비하고 있다.

팩스 역시 마찬가지다. 이메일은 해킹당하거나 개인정보가 유출될 위험성이 있으니 팩스가 훨씬 안전하며 책임소재가 분명하다는 신화가 2020년에도 굳건히 자리 잡고 있다. 오죽하면 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자를 팩스로 받아 며칠 후에나 집계자 통계를 내겠는가. 이 팩스 집계방식은 지난 2월 다이아몬드 프린세스호로 본격화된 일본의 코로나19 사태로부터 8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고노 다로의 이러한 발언은, 특히 젊은 층의 지지를 얻고 있다. 고노가 맡고 있는 행정개혁담당대신은 총무성이나 과학기술청처럼 자신이 부릴 수 있는 전담 성/청이 없는 일종의 특명대신이라 이러한 정책이 과연 어떻게 실현될지 궁금하긴 하지만, 일단 이런 발언이 나온다는 것 자체가 신선하다. 인터넷 최선진국인 한국 입장에서 보면 2020년에 무슨 소리냐고 할 수 있겠지만 이곳에서 십 수 년을 살고 있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실현불가능성이 더 크지만)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다. 디지털청 신설도 그렇다. 물론 디지털청 설립과 관련한 첫 회의에는 노트북 한 대 없이 나이든 참석자들만 앉아 있었지만, 어쨌든 이런 IT화는 일본정부가 그간 하지 않았던 새로운 시도다.

스가와 한일관계

이러한 스가 총리에 대해 <니혼게이자이 신문>은 '분산 프로젝트형 리더'라고 표현했다. 확실히 스가 총리는 자신이 직접 나서서 뭘 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프로젝트 리더들에게 권한을 주고 자유롭게 일처리를 하게 한다. 관저정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며, 이미 관료들을 휘어잡았다.

그의 관방장관 시절 라이벌이었던, 아베 총리의 최측근 이마이 다카야 비서관은 스가 내각이 들어서자마자 경질됐고, 아베 정권 후기 갖가지 실책을 일삼았던 이른바 경제산업성 인맥들은 모조리 흩어졌다. 관방장관 8년 재직의 경험을 살려 누가 적재적소에 배치되면 일을 잘 할 수 있을지 알 만하다. 프로젝트 과제를 선정해 정치인 출신 대신들이 책임지게 하고 실무관료를 총리가 배정해 준다면, 기존의 일본 행정과는 다르게 흘러갈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관료를 가장 잘 알고 컨트롤할 수 있는 스가 같은 정치인이 총리대신이 된 사례가 지금까지 없었기 때문이다.

스가 총리의 행보에 대해 한국 언론들은 징용공과 위안부 문제로 촉발된 한일관계의 악화에만 주목해 앞으로도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고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세밀하게 살펴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일단 스가 총리는 취임 이후 위안부 문제는 한 번도 거론하지 않았다. 또한 한중일 정상회담을 앞두고 "신일철주금 재산을 현금화 하면 한일관계가 엉망이 될 것이며 정상회담은 보이콧 할 생각"이라고 말한 바 있다. 역으로 생각하면 신일철주금의 현금화만 하지 않으면 된다라는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실제로 '신일철주금 현금화'가 멈춰 있었던 지난 한 달 동안 한일 정상 간의 전화 통화, 비즈니스 입국 허용, 입국시 격리조치 해제(일본입장에서는 싱가포르에 이어 두 번째) 등의 실무 차원의 양국 협의가 이뤄지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과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일본 총리의 9월 24일 전화회담. ⓒ 연합뉴스

 
앞서 말했듯 작년 한국수출규제 조치를 기획하고 입안했던 경산성 중심의 관저 실력자 이마이 다카야도 물러났다. 한일관계 복원은 당장 힘들겠지만, 그렇다고 스가 총리가 아베 전 총리와 똑같은 노선을 걸을 것 같지도 않고, 또 아무리 일본이 싫다고 해도 나라를 옮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왕 이웃이라면, 그리고 그 이웃의 수장이 아베 신조같은 극도의 역사수정주의자가 아니라면, 대화해서 나쁠 건 하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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