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14 11:20최종 업데이트 20.10.14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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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거 명령을 받았던 베를린 평화의 소녀상이 행정명령 중지 가처분 신청으로 일단 강제철거 위기를 넘겼다.

독일 시민단체 코리아협의회(Korea Verband e.V.)가 미테구청과 베를린시 공공예술위원회의 허가를 받아 설치한 평화의 소녀상은 지난달 28일 제막 이후 일주일 만에 철거 명령을 받았다. 코리아협의회는 12일 철거 명령 중지 가처분신청을 제출했으며, 이에 따라 14일 기한의 철거 명령은 중지된 상태다. 법원 결정까지는 2주 정도가 걸릴 예정이다.

13일 열린 평화의 소녀상 철거 반대 시위에서는 슈테판 폰 다쎌(Stephan von Dassel) 미테구청장이 나와 이 기간을 이용해 논의를 이어가자고 밝혔다. 예술과 문화, 자유의 도시에 설치된 베를린 평화의 소녀상은 타 지역과는 또 다른 국면으로 이어질 것으로 기대된다.
 

베를린 평화의 소녀상 ⓒ 이유진

 
베를린 평화의 소녀상 세운 코리아협의회

베를린 평화의 소녀상 논란에 직면해 6년 전 기사를 다시 읽었다. 베를린 평화의 소녀상을 세운 코리아협의회 한정화 대표와 나눈 인터뷰 기사다. 한 대표는 그 당시부터 독일에 평화의 소녀상을 세울 계획을 밝히며 전범국의 역사를 가진 독일 내에서 활동하는 어려움을 털어놨다. (관련기사 : 독일 정치인들이 일본처럼 '망언' 하지 않는 이유 http://omn.kr/792s)


이후 6년 동안 활동 영역은 더 넓어졌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자행되는 전시 성폭력 문제, 소수 민족 여성에 대한 성폭력 문제에 연대했다. 한일간 민족주의 감정에 머물지 않고 베를린에서 전 세계 시민사회와 교류했다. 지역주민과 소통했고, 학교에서 청소년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뿐만 아니라 현재진행형인 여성 인권과 폭력의 문제를 이야기했다. 코리아협의회가 평화의 소녀상을 공공장소에 세울 수 있었던 힘이다.

9월 29일 평화의 소녀상 제막식에 참석한 이들을 보자. 이번에 철거 명령을 내린 미테구청의 재교육·문화·환경·자연·도로·녹지관리국 담당자인 자비네 바이슬러가 직접 참가해 축사를 했다. 나치의 여성 수용소였던 라벤스부르크 기념관 전 관장 인자 에쉬바흐, IS의 성노예 범죄 피해를 입은 야지디족 베를린 여성의원회 대표 니지안 귀나이, 연대하는 세계를 위한 재분배재단 여성분과 베레나 프랑케도 축사에 나섰다. 그 외 수많은 지역 시민단체 관련자들이 참가했다. 베를린에 서 있는 평화의 소녀상은 '한일전'을 상징하지 않는다. 세계 시민사회와 여성인권의 상징으로 확장되어 있다.
 

13일 베를린 코리아협의회 사무실에서 열린 평화의 소녀상 철거 반대 기자회견 ⓒ 이유진

 
미테구청의 철거명령이 부당한 이유

평화의 소녀상이 적법한 절차를 밟지 않고 세워졌다는 잘못된 정보가 떠돌지만 평화의 소녀상은 정상적인 절차와 허가를 거쳐 세워졌다. 미테구청과 시 공공예술위원회의 심사를 거쳐서 1년 간 설치하는 조건으로 허가를 받았다. 베를린 공공장소에 세워지는 예술작품은 보통 1년 기한으로 설치된 이후 평가를 거쳐 연장된다. 코리아협의회는 평화의 소녀상에 대한 맥락과 의미 등을 담은 13장짜리 신청서를 냈다. 허가와 설치 과정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제막식에는 미테구청의 담당자가 와서 축사까지 했다.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할까. 

평화의 소녀상 철거 공문이 떨어진 건 제막식 일주일 후인 지난 10월 7일. 일주일 내(14일)로 철거하지 않을 시에는 강제철거하고 그 비용을 단체에 청구하겠다는 내용이 담겼다. 1개월 내로 이의신청을 할 수 있지만 강제 철거 효력은 중지되지 않는다. 오직 법원의 행정명령을 통해서만 철거 명령 효력을 중지할 수 있다. 

미테구청은 '비문의 내용'이 한일 문제이며, 독일과 일본과의 관계에 부담을 초래했다고 철거 명령 근거를 댔다. 비문이 문제라면 비문 수정 및 교체를 요구하는 게 먼저다. 하지만 단번에 철거라는 결정을 내렸다. 기한도 일주일을 줬다. 독일은 철거 업체와 약속을 잡는 데만 일주일이 더 걸리는 곳이다. 관청의 명령이 얼마나 강압적이고, 한편으로는 다급했는지를 보여준다.

독일의 한 관청에서 도시 건축 허가 등을 담당하고 있는 문기덕씨는 13일 기자와 한 통화에서 "미테구청이 내린 즉시철거명령(Sofortige Beseitigungsanordnung)은 태풍에 나무나 건축물 등이 쓰러져 보행자에게 위협이 있을 때 취해지는 조치"라면서 "구청 또한 일본과의 외교 문제가 이유라고 밝힌 것처럼 굉장한 압력이 들어간 거라고밖에 이해할 수 없다. 운동의 방법이나 방향성을 떠나 독일정부와 지자체에 규탄할 일"이라고 설명했다.   

이는 평화의 소녀상뿐만 아니라 그 어떤 예술 작품이라도 문제의 소지가 크다. 정식 허가를 받아 설치한 작품에 대해 내려지는 폭력적인 공문을 문화예술계 쪽은 표현과 예술에 대한 억압으로 받아들인다.

베를린조형예술가연합(Berufsverband bildender künstler*innen berlin e.V.)은 12일 성명서를 내고 "정부와 민주주의 국가들이 예술의 자유를 위협하는 데 큰 우려를 표한다. 자유롭고 방해받지 않으면서 일할 수 있기 때문에 베를린은 예술과 문화에 있어 중요한 도시이며 이 자유를 지켜야 한다"면서 "공공장소의 예술작품은 다른 나라 정부의 압력에 의해 철거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13일 베를린에서 열린 평화의 소녀상 철거 반대 시위 ⓒ 이유진

 
독일과 일본의 외교관계

9월 28일 베를린 평화의 소녀상이 세워진 직후 일본 정부는 전 방위적 압박을 가했다. 29일 가토 가쓰노부 일본 관방장관은 "지극히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말했고, 지난 1일 모테기 도시미쓰 일본 외무상은 하이코 마스 독일 외무장관과 영상통화를 하며 평화의 소녀상 철거를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주독일본대사관도 베를린 시의회에 관련 의견을 전달했다. 한국과 독일 언론 보도를 통해 확인된 것만 이정도이니 배후에서 얼마나 많은 시도가 있었는지 가늠할 만하다.

미테구청의 철거공문에는 이러한 일본의 '노력'이 정확하게 반영되어있다. 

"독일과 일본 관계에 상당한 부담을 초래하였음"
"일본정부의 거센 반응이 있으리라고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
"우호적 관계에 있는 양국 간 역사적 사건에 대해 어떠한 일방적 판결도 내려서는 안 되고, 독일 군인들의 성폭력 범죄 역시 담겨야 한다는 것"
"독일연방공화국의 외교정책상의 이해관계..."
"이미 독일의 대일본 외교관계에 구체적인 문제가 발생했음"
"기존의 도시 간 협력관계도 위험에 처했음"


이쯤 되면 일본의 논리도 보인다. 평화의 소녀상을 한일 외교 문제, 나아가 평화의 소녀상이 설치된 국가와의 외교 문제로 압박하고, 해당 지역이 파트너십을 맺고 있는 일본 도시와의 관계로 압박한다. 미테구는 현재 히가시오사카, 쓰와노, 신주쿠 등 3곳과 파트너십을 맺고 있다. 외국 도시 중에는 일본과 가장 많은 파트너십을 맺고 있다. 

미테구청의 철거요구는 일본이 압박한 결과다. 시민사회 활동에 대해 일본 정부가 명시적으로 개입했고, 독일의 지자체가 두 손을 든 것이다. 슈페판 폰 다쎌 미테구청장도 이날 시위에서 "베를린 거주 일본 시민들로부터 많은 항의서한을 받았고, 연방정부와 베를린시의 거센 압박을 받았다"고 털어놨다.

문제는 이러한 일본 반응이 시간문제일 뿐 충분히 예측되었다는 점이다. 독일에는 이미 평화의 소녀상이 두 곳에 세워져 있다. 독일 레겐스부르크 인근 사유지 공원에 세워진 평화의 소녀상은 일본의 강력한 압박으로 결국 비문이 철거됐다. 그 평화의 소녀상은 그곳에 왜 서 있는지도 모르는 채로 비문 없이 서 있다. 

베를린 평화의 소녀상 비문을 보자. 
 
"2차 세계대전 때 일본군은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수많은 소녀들과 여성들을 끌고 가 성노예를 강요했다. 이 평화의 상은 소위 '위안부'의 고통을 기억한다. 1991년 8월 14일 침묵을 깨고 세계적으로 그러한 범죄의 재발을 반대하는 생존자들의 용기를 기리는 것이다. 이 상은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가 기부해 코리아협의회의 위안부 분과가 '평화의 소녀상 연합'과 함께 세웠다."

일본 정부가 비문을 문제 삼았던 지난 경험을 봤을 때 비문 내용을 좀 더 전략적으로 고민했다면 어땠을지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다.

미테구청은 철거공문에 '독일군의 성범죄도 다루어야 했다'는 입장을 두 번이나 밝혔다. (부당한) 철거 명령을 내리면서 윤리적으로 보이기 위한 면피용 문장이지만, 비문에 대한 고민은 분명 아쉽다. 코리아협의회의 행정명령 중지 가처분신청과 미테구청장의 이날 발언으로 볼 때 비문 내용 확장에 대한 논의가 이어질 것으로 기대된다.  
 

13일 오전 평화의 소녀상을 찾은 지역 주민 ⓒ 이유진

 
독일에서도 공감을 얻으려면

독일에서 민족주의는 파시즘과 연결된다. 순수 아리안족의 영역을 지키는 민족주의가 바로 나치의 근간이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독일 국기를 흔드는 것 자체를 불편해 했던 독일이었다. 평화의 소녀상 문제를 한일문제와 민족주의적 성향으로 해석하는 건 이곳에서 큰 공감대를 얻지 못한다.

독일은 일본과 같은 전범국가다. 일본에 비해서는 과거 청산을 훌륭히 해냈다고 평가하고 있지만, 그건 피해자 국가의 힘에 따른 결과일 뿐 독일 내에서도 비판적인 시선이 크다.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나치 부역자들에 대한 처벌은 당시 과거 청산이 충분하지 못했다는 부채감의 발현이고, 동시에 '우리가 모두 가해자였다'는 인식에서 그 문제를 계속 언급하는 것을 불편해한다. 독일은 시스템과 교육으로 그 불편함을 감수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독일 너희는 훌륭하게 과거청산 했으니, 일본에 똑바로 하라고 한마디 해줘'라는 자세는 독일에 부담일 수밖에 없다. 심지어 한국보다 훨씬 친하고 각별한 친구 사이에서 말이다. 베를린 평화의 소녀상을 '한일전' 혹은 독일 과거와 비교해서 다루는 것보다 여성 보편의 인권과 세계 시민사회의 의미로 다루어야 하는 이유다. 

코리아협의회도 정확하게 그 지점을 강조한다. 평화의 소녀상 설치 과정이 그랬듯 지키는 과정에도 연대의 손길이 이어진다. 코리아협의회가 진행하고 있는 공개서한 서명에는 라이프치히대학 일본학과, 트리어대학, 튀빙겐대학, 베를린자유대, 훔볼트대학 등 독일 대학은 물론 히로시마대학, 도쿠시마대학 등 일본 대학 소속 교수진, 사민당, 녹색당, 좌파당 등 현지 정당, 독일 과거청산을 다루는 기억책임미래 재단 전 이사장 등 주요 교육, 정치, 종교, 시민 사회 주체들이 모두 참여하고 있다.

13일 열린 '베를린, 용기를 내! 평화의 상은 머물러야 한다(Berlin, sei mutig! Die Friedensstatue muss bleiben)' 시위에서는 코리아협의회에 연대하는 다양한 단체들과 지역주민 300여 명이 모여 미테구청 앞으로 행진했다. 독일 현지 언론과 일본, 한국 미디어도 그 어느 때보다 큰 관심을 보였다. 베를린 평화의 소녀상이 촉발한 토론과 논쟁, 그것만으로도 이 평화의 소녀상은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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