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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산 정약용 초상화.
 다산 정약용 초상화.
ⓒ 이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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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조선)인들은 옛적부터 차를 즐겨마셨다. '차례(茶禮)'를 지내기도 하였다. '다례'라고도 하는 이 행사는 음력 설날이나 초하루날과 보름달ㆍ명절날ㆍ조상 생일 등에 간단한 음식과 차(다)를 차려놓고 제를 올리는 의례를 말한다.

정약용은 젊은시절부터 차를 즐겼다. 스물 한 살 때에 지은 시가 전한다.

 백악곡의 새 차가 새잎을 막 펼치니
 마을 사람 내게 주어 한 포 겨우 얻었네
 체천의 물맛은 맑기가 어떠한가
 은병에 길어다가 조금 시험해본다네. (주석 1)


조선시대에 차는 양반계층의 기호식품이 되었다. 그만큼 귀했기 때문에 일반 백성들은 접근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차례'는 차 대신 술로 대체되었다. 그리고 차츰 사찰의 제례행사용으로 제한되기에 이르렀다. 우리나라의 차 문화는 정약용이 중흥주이고 추사(김정희)→초의(의순)로 이어진다.

다산이 본격적으로 차를 마시기 시작한 것은 강진으로 유배 온 지 4년 후, 백련사에서 아암(兒菴) 혜장(惠藏, 1772~1811) 선사와 교유를 갖게 되면서부터다. 그간 울화가 쌓여 맺힌 답답한 체증을 치료하기 위해서였다.

1801년 말에 강진으로 귀양 온 다산은 처음에 동문 밖 샘물 곁 주막집 뒷방에 옹색한 거처를 정했다. 이곳을 다산은 동천여사(東泉旅舍)로 불렀다. 막상 혜장선사와의 첫 만남은 그로부터 4년 뒤인 1805년 여름에 이루어졌다. (주석 2)

 
다산초당 정약용 선생이 유배하며 기거하시던 곳
▲ 다산초당 정약용 선생이 유배하며 기거하시던 곳
ⓒ 이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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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이 야생 차나무가 많아 다산 또는 차산으로 불리는 이곳에 있던 초당에서 지내게 된 것은 그에게는 모처럼의 행운이었다. 뿐만 아니라 차를 계기로 하여 승려들과도 인연을 맺게 되었다.

전라도 해남군 대흥사에는 서산대사의 수충사가 있어서, 여기에는 대대로 학문하는 스님을 끊임없이 배출하였는데, 한국의 육우(陸羽)라 일컬어지는 초의(草衣) 장의순(張意恂,1786~1866) 스님도 이곳 출신이다. 당시 정약용은 강진도암에,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 1856)는 제주도에서 각각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다. 이들 3인은 선후배간의 존경과 돈독한 우정, 지리적 조건으로 서로 자주 만났고, 다 같이 깊숙하고 고요한 산간에서 차를 통하여 인생의 쓴맛ㆍ단맛을 음미하였다.(…) 해남군 대흥사의 학문 스님 아암에게 차를 배우게 되었고 그에겐 주역을 가르쳤다. (주석 3)

그가 아암에게서 차를 배웠다는 것은 착오인 것 같다. 그를 만나기 훨씬 전부터 차에 대해 쓴 시가 더러 있기 때문이다.

"초의는 다산의 손때 묻은 제자다. 초의가 다산초당을 처음 찾은 것은 1809년이었다. 당시 다산이 48세, 초의가 24세였다. 초의가 차를 배운 것은 물론 다산에게서였다. 15세 때 출가한 이후, 초의는 근 9년 가까이 영호남을 주유하며 선지식을 찾아 참구했다.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대단하다는 명성을 듣고 찾아가 보면 모두 가짜였다. 그러던 그가 다산을 만나 급속도로 그 학문과 인품에 빨려 들어가는 과정은 초의의 시집 속에 너무도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주석 4)
 
 추사 김정희 선생이 다산 정약용 선생을 위해 쓴 현판 글씨.
 추사 김정희 선생이 다산 정약용 선생을 위해 쓴 현판 글씨.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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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이 남긴 글 중 어느 것 하나라도 소중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 없지만, 마흔 네 살 때인 1805년 겨울 백련사의 아암 혜장선사에게 차를 보내달라는 「걸명소(乞茗疏)」는 이 방면의 걸작으로 친다.

                걸명소

 나는 요즘 차를 탐식하는 사람이 되었으며
 겸하여 약으로 삼고 있소
 차가운데 묘한 법은
 보내 주신 육우 다경 3편이 통달케 하였으니
 병든 큰 누에(다산)는 마침내
 노동(盧仝)의 칠완다(七碗茶)를 마시게 하였소
 정기가 쇠퇴했다 하나 기모경의 말은 잊을 수 없어
 막힌 것을 삭이고 헌데를 낫게 하니
 이찬황(李贊皇)의 차 마시는 습관을 얻었소
 아아, 윤택할진 저
 아침에 달이는 차는 흰 구름이 맑은 하늘에 떠있는 듯 하고
 낮잠에서 깨어나 달이는 차는
 밝은 달이 푸른 물 위에 잔잔히 부서지는 듯 하오
 다연에 차 갈 때면 잔구슬처럼 휘날리는 옥가루들
 산골의 등잔불로서는 좋은 것 가리기 아득해도
 자순차의 향내 그윽하고
 불 일어 새 샘물 길어다 들에서 달이는 차의 맛은
 신령께 바치는 백포의 맛과 같소
 꽃청자 홍옥다완을 쓰던 노공의 호사스러움 따를 길 없고
 돌솥 푸른 연기의 검소함은 한비자(韓非子)에 미치지 못하나
 물 끓이는 흥취를 게 눈, 고기 눈에 비기던
 옛 선비들의 취미만 부질없이 즐기는 사이
 용단봉병 등 왕실에서 보내주신 진귀한 차는 바닥이 났소
 이에 나물 캐기와 땔감을 채취할 수 없게 마음이 병드니
 부끄러움 무릅쓰고 차 보내주시는 정다움 비는 바이오
 듣건대 죽은 뒤, 고해의 다리 건너는데 가장 큰 시주는
 명산의 고액이 뭉친 차 한 줌 몰래 보내주시는 일이라 하오
 목마르게 바라는 이 염원, 부디 물리치지 말고 베풀어주소서. (주석 5)


그는 차를 좋아하면서 직접 제조한 차 역시도 일품이었다. 매사에 한번 붙들었다 하면 최고수준에 이르는 성실성과 탐구열이 그렇게 만들었다.

다산이 마셨던 차는 어떤 형태였을까?

다산차는 일반적으로 떡차였다. 1830년 다산이 제자 이시헌에게 보낸 편지에 떡차 만드는 방법이 자세하게 나온다. 삼증삼쇄, 즉 찻잎을 세 번 찌고 세 번 말려 곱게 빻아 가루를 낸 후, 돌샘물에 반죽해서 진흙처럼 짓이겨 작은 크기의 떡차로 만들었다. 다산은 유배 이전에 지은 시에서 이미 차의 독한 성질을 눅게 하려고 구증구포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구증구포든 삼증삼쇄든 다산차가 찻잎을 쪄서 말리는 과정을 여러 차례 반복해서 차의 독성을 중화시키고, 가는 분말로 빻아 반죽해서 말린 떡차였음은 분명하다. (주석 6)


정약용은 우리나라 차문화의 중흥주의 반열에 올랐다. 한 연구가는 다섯 가지 이유를 들었다.

첫째 다산은 강진 유배 전부터 차를 즐겨 마신 다인이며, 둘째 다산의 차에 대한 이론이나 지식은 혜장이나 초의를 만나기 전부터 확립되어 있었으며, 셋째, 다산은 차의 이론가로 그치지 않고 종다(種茶), 전다(煎茶), 제다(製茶), 음다(飮茶)에서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소용이 되는 실천가이자 교육자였으며, 넷째 해배된 후에도 다생활을 계속 했고, 다섯째 자신의 다도관이 확립되어 있었다는 것을 중시하고 있다. (주석 7)


주석
1> 정민, 『새로쓰는 조선의 차 문화』, 140쪽, 김영사, 2011.
2> 앞의 책, 142쪽.
3> 이성우, 『한국식품문화사』, 255~256쪽, 교문사, 1990.
4> 정인, 『새로 쓰는 조선의 차 문화』, 14쪽, 김영사, 2011.
5> 윤동한, 앞의 책, 234~235쪽.
6> 정민, 앞의 책, 15쪽.
7> 윤동한, 앞의 책, 234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다시 찾는 다산 정약용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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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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