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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동백나무 옆에 한 문구점이 있다. 문구점은 오래된 가옥과 함께 붙어 있는데 그곳엔 주인인 젊은 여성이 혼자 산다. 이름은 '포포'. 문구를 팔지만 워낙 시골인데다 그 종류도 많지 않아 문구를 사러 오는 사람은 거의 없다(그 흔한 샤프 펜슬도 없을 정도다). 그녀는 편지를 대필하는 일로 생계를 이어간다. 글씨를 쓰는 것을 넘어서 직접 편지를 써준다. 의뢰인의 마음에 빙의해서 그 사람의 목소리로 마음을 전한다.

소설 <츠바키 문구점>의 줄거리는 이처럼 단순하다. 포포는 어린 시절, 선대(할머니)로부터 강제로 서도를 익힌다. 사춘기 시절에는 편지를 대필해주는 선대의 직업에 반발한 적도 있다. 엄하고 무섭기만 했던 선대가 세상을 뜬 후 포포는 그 일을 이어받는다. 포포는 남의 편지를 써주는 일이 '사기'라며 평가절하했지만, 다양한 사람들의 편지를 대신 써주면서 그 일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깨닫게 된다.

소설 속에는 편지를 써달라고 찾아오는 사람의 사연도 참으로 다양하다. 누군가 죽었음을 알리는 조문 편지, 자신의 결혼을 축하해준 하객들에게 보내는 이혼 알림 편지, 남편이 살아 있다고 생각하는 치매 아내에게 보내는 남편(을 대신한) 편지, 오랜 벗에게 절교를 알리는 편지, 돈을 빌려달라는 요구에 정중히 거절하는 편지까지... 일본 사람들은 이런 편지까지 다 쓰고 사나 싶을 정도로 소소하고 세밀한 사연들이다.

대필가란 동네 제과점 같은 존재  
 
 책 <츠바키 문구점>
 책 <츠바키 문구점>
ⓒ 위즈덤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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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포는 편지를 대필하기 전 그 사람이 되어본다. 그 사람의 마음으로 돌아가 그 사람이 내는 영혼의 목소리를 받아 적는다. 다른 사람을 대신해 편지를 쓴다는 것은 정신의 공명줄이 울려야 가능한 일이며 그 사람의 입장을 이해하고 공감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숭고하고 거룩한 일 같지만, 대필업은 그저 의뢰인의 요구에 부응하는 직업이라는 작품 속 선대의 말은 또 한편으론 철저한 직업인으로서의 마음가짐을 엿보게 한다. 흔하디 흔한 통속소설이라면 대필을 하다가 사랑에 빠졌다거나 슬픔에 젖었다는 설정도 있을 법 하건만, <츠바키 문구점>은 그런 점에서 깔끔하고 단정하다.
 
"자기가 직접 만든 것이 아니어도 제과점에서 열심히 골라 산 과자에도 마음은 담겨있어. 대필도 마찬가지야. 자기 마음을 술술 잘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은 문제없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을 위해 대필을 하는 거야. 그 편이 더 마음이 잘 전해지기 때문에. 네가 하는 말도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세상이 좁아져. 옛날부터 떡은 떡집에서,라고 하지 않니. 편지를 대필해주길 바라는 사람이 있는 한, 우리는 대필업을 계속해나간다, 단지 그것뿐이야." 선대가 선대 나름대로 열심히 무언가 소중한 것을 전하고자 한다는 걸 느꼈다... 무엇보다 제과점을 예로 들어서 알아듣기 쉬웠다. 대필가란 동네 제과점 같은 존재구나, 하고 어렴풋이나마 이해했다. - p.54
 
사치도 이런 사치가 없다

편지라고 하면 그저 선물가게에서 파는 예쁜 편지지를 골라, 연필이나 볼펜을 사용해서 사연을 쓰고 봉투를 풀로 붙인 뒤, 흔하디 흔한 우표를 붙여 우체통에 넣은 기억밖에 가지지 못한 나로서는 <츠바키 문구점>의 포포가 선사하는 다양하고 럭셔리한 편지의 세계에 그저 눈이 돌아갈 정도다.

편지지를 고르고, 필기도구를 선택하고, 봉투를 정하고, 우표를 붙이는 것 하나까지 상대와 상황과 경우에 맞게 꼼꼼하게 따지고 선택하는데, 이 소설을 읽다보면 '편지의 또다른 세계'를 만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사치도 이런 사치가 없다. 돈만 많이 쏟아부은 사치가 아닌, 편지를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 모두를 배려하고 생각한 선택이자 미적 안목과 품격까지 골고루 갖춘 미적 사치이다. 예를 들어 이런 대목.
 
...조문 편지를 쓸 때 먹은 평소와 반대 방향인 왼쪽으로 돌며 가는 것이 원칙이다... 그리고 조문 편지를 쓸 때 주의사항은 '자주, 다시, 거듭, 되풀이해서'같은 불경스러운 단어를 쓰면 안된다는 것이다. 또한 죽음이 거듭해서 찾아오는 것을 꺼린다는 의미로 추신도 달지 않는다... 조문 편지는 평소보다 훨씬 연한 색의 먹으로 쓴다. 먹색을 옅게 하는 것은 슬픈 나머지 벼루에 눈물이 떨어져 옅어졌다는 의미다... 보통 일반 편지는 두 겹으로 된 봉투를 사용하지만 조문의 경우에는 불행이 두 번 겹치지 않도록 한 겹짜리를 사용한다. 물론 봉투도 편지지와 같은 흰색이다. 장례식에 갈 때 화장이나 액세서리를 화려하게 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 p. 33~35
 
편지 한 장 쓰는 데 형식과 절차, 규범이 너무 까다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행위로 나타나는 결과물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상대를 생각하고 배려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그 형식과 절차를 지키려는 마음이 더 중요한 게 아닐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편지는 마음을 전하는 글이 맞다.

작품 속에서 선대는 매우 깐깐하고 고집 세고 엄격한 사람으로 나오는데, 그러한 선대도 이탈리아의 한 친구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자신의 마음을 터놓았다는 것을 포포는 나중에야 알게 된다. 그 편지 속에 담겨 있는 선대의 인간적인 고민과 고뇌, 손녀 포포에 대한 사랑과 걱정... 선대의 편지를 읽고서 포포는 비로소 선대와 화해를 할 수 있게 된다.

올 가을엔 손 편지를 써봐야겠다

손글씨로 쓴 편지가 희귀해졌다. 어느 순간부터 우편함에는 각종 고지서와 홍보 전단지들로 가득 찼다. 아니, 이제는 고지서나 청구서 등도 전자메일로 받기 때문에 우편함에 그것조차 쌓이는 일은 줄어들기 시작했다. 우편함은 적적해졌다. 속이 허해졌다. 쓸쓸할 것이다. 자신의 근황이나 이야기, 하고 싶은 말도 sns로 쉽고 간편하게 나눌 수 있는 세상. 그 몇 줄의 글조차 귀찮다면 이모티콘으로 대신하기도 한다. 이런 세상에 <츠바키 문구점>의 이야기는 청동 이끼가 낀 먼 옛날의 유물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마음이 편안하고 참으로 따뜻했다. 그리고 잊고 있었던 한 통의 편지가 떠올랐다.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이었는데 그때도 무척 비가 많이 왔다. 며칠 동안 집을 비운 뒤 돌아왔더니 대문에 걸려 있던 우편함에 편지봉투 하나가 구겨진 채로 있었다. 비를 흠뻑 맞은 뒤, 며칠째 우편함에 처박혀 있었던 편지였다. 봉투 겉면에는 수신자와 발신자가 모두 지워져 있었다. 아마도 발신자는 수성펜으로 편지를 썼으리라.

내용을 보면 알겠지 싶어 봉투를 뜯어보았더니 총 3장으로 구성된 편지지는 백지 상태였다. 빗물에 글씨가 모두 지워졌다. 행여 힌트가 될 만한 단어라도 혹시 남았을까 싶어 눈을 불을 켜고 샅샅이 보았지만, 빛바랜 펜 자국만 나이테 같은 기하학 무늬를 그리며 얼룩져 있었다. 그 편지 때문에 나는 며칠을 끙끙댔다. 수신자와 발신자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심증상 나에게 온 편지 같았지만, 그게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도 알지 못한다.

<츠바키 문구점>을 읽으며 그 편지가 떠올랐다. 그 편지는 아직도 내게 닿지 않은 편지다. 나는 알지 못하는 사연이다. 석 장씩이나 썼다면 뭔가를 진지하게 얘기했을텐데... '장마 시기였던 그 당시 기상상태를 고려했더라면 볼펜이나 유성펜으로 썼더라면 좋았을 걸'이라는 부질없는 생각도 들었다. 그 후로 나는 편지를 쓸 때 수성펜을 쓰지 않는 습관이 생겼다. 물론 지금은 그러한 편지도 쓰지 않는다. 올 가을에는 누군가에게 손 편지를 한번 써봐야겠다. 펜이 종이에 닿는 그 순간, 잉크가 종이에 번지듯 가슴이 울컥할 것 같다.

츠바키 문구점

오가와 이토 지음, 권남희 옮김, 예담(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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