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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07년에 제작된 '맹자집주대전'. 맹자가 여러 인물과 문답한 내용을 기록한 '맹자'에 송나라 주희 등의 학자가 풀이를 덧붙인 책이다.
 1807년에 제작된 "맹자집주대전". 맹자가 여러 인물과 문답한 내용을 기록한 "맹자"에 송나라 주희 등의 학자가 풀이를 덧붙인 책이다.
ⓒ 서울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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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나라 선왕이 물었다. "상나라 탕왕이 하나라 걸왕을 추방하고, 주나라 무왕이 상나라 주왕을 정벌했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맹자가 답했다. "전해오는 문헌이 있습니다." 선왕이 말했다. "신하가 자기 임금을 죽이는 것도 가능합니까?" 맹자가 말했다. "생명을 사랑하는 마음(仁)을 해치는 사람을 '도적'이라 부릅니다. 올바름(義)을 해치는 사람을 '잔악하다' 말합니다. 잔악한 도적은 '한 사내'(一夫)라 부릅니다. 저는 한 사내에 불과한 주왕을 '베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임금을 '시해했다'고 말하는 것을 들어본 적은 없습니다." - <맹자>(孟子), '양혜왕 하'(梁惠王下)

지금으로부터 약 2300년 전, 맹자는 20년 넘게 '주유천하'(周遊天下)라 하여, 세상을 돌아다니며 당대 최고 권력자들을 만나 정치를 논합니다. 이때 그는 유학의 핵심 가치를 거스르며 통치하는 자는 왕이 아니라, 그저 평범한 인간일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다수가 원하지 않는 길을 홀로 고집하기에 왕좌에서 끌어내야 한다는, 혁명의 정당성을 설파하는 대목인데요. 이처럼 유학에서는 '왕 같지 않은 왕', 즉 철학이 없는 정치를 해 백성에게 고통을 주는 무능한 군주를 '한 사내'라는 의미의 '일부'(一夫), 혹은 독재자를 가리키는 '독부'(獨夫)라고 불렀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도 독부에 대한 언급이 다수 발견됩니다.
 
임금이 일찍이 세자(양녕대군)에게 걸·주가 독부가 된 까닭을 물으니, 세자가 대답하였다. "인심을 잃은 때문입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걸과 주는 온 세상의 주인이 되었어도 인심을 잃어서 하루아침에 독부가 되었다. 하물며 나와 네가 인심을 잃게 되면 반드시 잠시도 이 자리에 있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소홀히 할 수 있겠느냐?" - 태종실록 5년 8월 19일
 
당시 12살이던 양녕대군에게 태종이 왕좌의 위태로움을 강조하는 대목입니다. 아무리 만인이 우러러보는 임금이고 세자이지만, 떠받치는 민심이 떠나면 와르르 무너지는 사상누각임을 그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통치의 명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신료·백성의 목소리를 듣는 시늉이라도 할 수 밖에 없었겠지요.

세종이 말년에 '독재자'가 됐다?

그런데 재위 "당시에 해동요순(海東堯舜)이라 불렸다"는(세종실록 32년 2월 17일), 즉 덕이 높다고 추앙받는 고대 중국의 요임금과 순임금에 비견되던 세종은 말년에 독부가 되고 맙니다. '내불당 사건'이 바로 그 계기입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내가 현명함과 덕이 없어서 모든 일을 이치에 맞게 의논하지 못하고, 불당을 세우겠다는 고집도 고수해 마음을 돌이키지 못한다... 임금과 신하 사이에 뜻이 맞지 않는 것이 이미 많다...온 집현전 관리가 사직하여 떠나가고, 유생 또한 (학교에 대자보를 붙이고) 뿔뿔이 흩어져 갔으니... 내가 이제 독부가 되었구나. 임금에게 허물이 있으면 신하 된 자가 버리고 갈 수 있는 것인가?" - 세종실록 30년 7월 23일
 
 문소전이 표기된 「경복궁도景福宮圖」 중 일부. 임진왜란으로 인한 소실 전, 경복궁 내 건물의 배치 모습을 그렸다.
 문소전이 표기된 「경복궁도景福宮圖」 중 일부. 임진왜란으로 인한 소실 전, 경복궁 내 건물의 배치 모습을 그렸다.
ⓒ 서울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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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민간에서는 불교를 신봉했지만, 조선의 국시(國是) 곧 공식적인 국가 통치 원리는 유교입니다. 그런 나라의 임금이 궁궐 안에 불당을 짓겠다고 하니, 관료·유학자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겠지요.

이에 앞서, 세종은 창덕궁에 있던 문소전을 경복궁으로 옮기며, 그 안에 있는 불당을 철거한 바 있습니다(세종실록 15년 1월 30일). 그것은 문소전에 태조를 포함한 조상의 신주를 모시며, 그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불당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15년 후에 다시 궁 안에 불당을 세우겠다고 전격 발표하며, "앞서 돌아가신 임금(태종)이 세운 것이어서, 법도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세종실록 30년 7월 17일)이라는 효의 논리를 내세웁니다.

이에 대해 임금의 비서실인 승정원 곧 세종의 의중을 가장 잘 이해할 신하들마저 반발하고, 심지어 관료의 집단사직과 학생들의 동맹휴교가 이어집니다. 지식인 집단이 연합해 자신에게 등을 돌린 상황. 그러니 "내가 이제 독부가 되었구나"라고 자조적인 말을 할 밖에요.
 
임금이 말하였다. "경들이 불교를 나쁘다고 하며 말을 합하여 나를 비판하니, 내가 심히 아름답게 여긴다. 어진 임금이라면 반드시 경들의 말을 따르겠지만, 나는 덕이 없으니까 따를 수가 없다." - 세종실록 30년 7월 19일

임금이 말하였다. "정승(현재의 총리) 천 명이 말하더라도 내 뜻은 이미 정해졌으니, 어찌 따를 리가 있는가... 일이 의심나는 것은 여러 사람과 의논하지만, 의심이 없는 것은 (임금이) 독단으로 하는 것이다. 너희들은 내가 신하에게 제재를 받아서 스스로 가부를 결정하지 못하는 줄로 생각하는가?" - 세종실록 30년 7월 18일

'임금이 일일이 신하한테 허락 받아야 하나' '나는 인성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니,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 다소 억지스러워 보일 수 있는 말을 한 이는 다름 아닌 세종입니다. 그야말로 '배째라'식 발언인데요. 아래와 같이, '토론을 즐긴다'는 평가를 들었던 그였기에, '반전 있는 남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성균 생원(성균관 입학 자격이 부여된 생원시의 합격자) 방운 등이 글을 올렸다... "우리 주상 전하께옵서는... 덕이 높으시나 (그에 만족하지 않고 정진하고자) 더욱 토론을 즐겨하셨나이다." - 세종실록 16년 4월 11일
 
과거에는 신료의 의견을 경청하는 자세를 취하더니, 지금은 왜 그러지 않느냐고 세종에게 반발하는 대목입니다. 아직 관료가 되기 전인, 요즘 식으로 보자면 사법고시·행정고시 혹은 공무원임용시험 1차 합격자 정도의 수험생이 따지는 말 속에는 군신공치(君臣共治), 즉 임금과 신료가 머리를 맞대고 함께 의사결정을 해나간다는 유교의 정치 원리를 담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의논의 정치'를 표방하지만, 실제로는 왕권을 제약하는 신하의 논리일 수 있습니다.

불교사찰 수리에 반발한 관료들
 
 1562년에 문정왕후의 지시에 따라 금으로 제작한 회암사의 <약사삼존도(藥師三尊圖)>.
 1562년에 문정왕후의 지시에 따라 금으로 제작한 회암사의 <약사삼존도(藥師三尊圖)>.
ⓒ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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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또한 세종의 불교 정책에 대한 저항이 있을 때였습니다. 약 100년 전에 지은 회암사를 세종이 대대적으로 수리하려 하자, 관료 및 학생 집단이 불교의 폐단을 지적하며 수리를 반대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종은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는데요.

유교 국가의 통수권자인 세종이 사찰을 수리 혹은 재건립하려는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세종이 불교 신자이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다수의 연구에 의하면, 성리학의 도그마를 깨려는 시도라는 설도 강한 지지를 받습니다. 대체로 당시 조선의 지식인은 성리학만이 유일한 진리의 세계에 속한다고 봤으므로 성리학에 대한 비판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불교·도교·풍수지리 등 성리학 외의 사상 체계는 이단이라는 신념에 매몰돼 있었기 때문입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부처를 숭배한다고) 임금을 비판하는 자 대개는 줏대가 없어서, 어떤 이는 조정에서 의논하고 물러간 뒤에 '이것은 내 뜻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어떤 이는 임금더러는 하지 말라 하면서 자기는 하고, 어떤 이는 자기 마음은 그렇지 않으나 아내가 고집해서 제지하지 못하는 자가 있다." - 세종실록 30년 7월 19일

임금이 말하였다..."요즈음 간사하고 못난 선비는 집에서는 부처에게 공양하며 중에게 시주하고, 집 밖에 나가서는 겉으로 부처를 배척하는 말을 하는 자들이 많다." - 세종실록 31년 6월 16일

세종이 보기에, 당시 관료·지식인이 이단을 배척하며 내세운 신념은 가짜였습니다. 깨달음에 근거한 주체적인 개인의 주장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위해 진영논리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집단행동일 뿐이었습니다. 암묵적인 집단의 압력을 느껴 그들의 규범에 따르는, 심리학에서 말하는 동조현상(conformity)의 발로입니다. 이를테면 '왕따'가 되기 싫어서 '왕따'를 하는 비주체적 행동인 것이지요.

게다가 그들은 말과 행동이 다른 모순적 태도를 보였습니다. 남이 안 보는 집에서는 부처에게 기도하며, 밖에 나와서는 부처를 배격하는, 자기모순에 눈감는 비겁한 집단이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자유로운 소통을 통한 합리적 방안의 도출은 불가능해집니다.

그들의 이분법적이며 모순적 세계관에 의한 불관용은 불교 논쟁뿐 아니라, 훈민정음 창제 즈음에도 발견됩니다. 이때 또한 세종은 관료·지식인 집단과 대립합니다.
 
집현전 부제학(집현전의 실질 책임자인 정3품 관리) 최만리 등이 글을 올렸다... "중국에라도 (훈민정음 창제 소식이) 흘러 들어가서 혹시라도 비난하는 자가 있사오면, 어찌 큰 나라를 섬기고 중국 문화를 따르는 데에 부끄러움이 없사오리까... 언문을 만든 것은 (문명국) 중국을 버리고 스스로 오랑캐와 같아지려는 것"... 임금이 말하였다... "일전에 (정4품 관리인 집현전 직전) 김문이 '언문을 제작함에 불가할 것은 없습니다'라고 했는데, 지금은 도리어 불가하다 한다. 또 (종4품 관리인 집현전 응교) 정창손은... '어찌 꼭 (삼강행실을) 언문으로 번역한 뒤에야 사람들이 (충신·효자·열녀를) 모두 본받을 것입니까?'라고 말했다. 이따위가 어찌 선비의 이치를 안다는 자의 말이겠느냐?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가짜 선비로구나." - 세종실록 26년 2월 20일
 
 목판본 「삼강행실도 언해」. 세종시대에 한문으로 간행한 「삼강행실도」에 한글 번역을 붙여 1581년에 펴냈다.
 목판본 「삼강행실도 언해」. 세종시대에 한문으로 간행한 「삼강행실도」에 한글 번역을 붙여 1581년에 펴냈다.
ⓒ 국립한글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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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독자적 문자를 만든 일은 선진 문명과 단절한 미개인과 같은 짓이며, 혹시라도 중국에 이 소식이 들어가면 외교적 마찰이 생길 수 있다는 관료들의 주장을 세종은 어느 정도 짐작했던 모양입니다. 훈민정음 창제를 매우 극소수의 신하와 '비밀 프로젝트'로 진행한 것을 보면 말이지요.

위의 실록 기사는 조선 최고의 학문 기관이자, 세종의 '싱크탱크'인 집현전에 소속된 관리들을 비판하는 세종의 발언입니다. 중국 문명을 수용하지 않으면 '오랑캐'라는 이분법적 세계관은 여기에서도 여지없이 작동합니다. 사대주의 세계관에 매몰돼 우리의 문화를 배척하는 자가, 그리고 자기 소신 없이 훈민정음 창제에 대한 찬반 입장을 쉽게 바꾸는 자가 당대 조선 최고의 학자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세종은 '독부'라는 손가락질을 각오하고라도 외롭게 의사결정을 해나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무엇이 중한가

이처럼 '독재자' 세종은 합리적 소통 과정을 거치지 않고 궁궐에 불당을 세웠으며, 조선의 문자를 창제했습니다. 그는 목적 달성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냉철한 마키아벨리즘의 소유자였던 것일까요? 대체로 유교의 군신공치 원칙을 준수하며 '토론을 즐기는 임금'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그이지만, 토론하고 질문하고 기다려주고 경청하는 소통의 형식적·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하며 모든 일을 처리할 수 없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상대의 이념적 성향, 사안의 중대성 등을 고려한 전략적 판단으로 보입니다.

몇몇 보수단체가 개천절 도심 집회를 신청했고, 법원의 조건부 허가를 받아 결국 강행했습니다. 이미 광복절 집회에서 코로나19의 폭발적 재확산이 일어나, 약 두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전국적 여파가 가시지 않았습니다. 다수의 국민이 여전히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사회적 비용을 치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부는 개천절 집회에 대해 강력 대응을 예고해왔습니다.

실제로 개천절 당일, 정부는 경찰 버스를 동원해 광화문을 봉쇄했습니다. 그러자 일부 보수 야당 및 단체에서는 대통령에게 독재자 프레임을 씌웁니다. 경찰 버스로 만든 차벽에 '재인산성'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정부가 언론·집회의 자유를 탄압한다고 주장합니다. 더 나아가 보수야당의 원내대표는 "광화문 광장에는 사실상의 코로나 계엄령이 선포되었던 것"이라고 반발합니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몇몇 보수단체는 곧 다가올 한글날에도 집회를 예고합니다.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한 그들의 정치적 행동에 '민주적' 대처라는 것이 어디까지 가능할까요? 방역은 그리고 국민의 생명은 정치적 논쟁의 영역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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