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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마침 저번에 산 오렌지색 후디가 있네! 그거 입고 가면 되겠다."

아들과 함께 옷장에서 밝은 오렌지색 후디를 꺼냈다. 1973년 당시 6살이었던 필리스 웹스타드(Phyllis Webstad)도 세인트 조셉 미션 기숙학교에 첫 등교하던 9월 어느 날 오렌지색 셔츠를 입고 있었다. 가난했던 캐나다 원주민 가정에서 새옷이란 꿈꾸기 어려운 것이었지만 할머니는 아끼고 아껴 필리스에게 반짝이는 오렌지색 셔츠를 사주었다. 그러나 기숙학교에 도착하자마자 셔츠를 빼앗기고 대신 교복을 입어야 했다. 필리스는 그 반짝이던 셔츠를 다시는 볼 수 없었다. 오렌지색을 보면 감정을 무시당하고 아무에게도 보살핌을 받지 못했던, 자신이 쓸모없는 존재라 느껴졌던 그곳에서의 기억이 떠오른다고 한다.

인권, 다양성, 평등 같은 가치를 중시하는 이미지의 캐나다에도 그와는 정반대의 어두운 역사가 있다. 과거 프랑스와 영국이 식민세력을 넓히고자 각축전을 벌였던 땅 캐나다에는 본래 수천 년 동안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유럽에서 건너와 캐나다라는 나라를 설립한 이들은 터줏대감이었던 원주민들에 대한 '동화' 혹은 '말살' 정책을 폈다. 1831년부터 1996년까지 정부 후원으로 캐나다 전역에서 운영되었던 '인디언 기숙학교'는 원주민 아이들을 그들의 문화에 동화시키기 위한 정책의 일환이었다.

어린 원주민 아이들은 가정과 공동체로부터 강제로 분리되어 기숙학교에서 생활해야 했다. 캐나다 정부가 세운 교육 시스템 하에서 원주민 고유의 언어와 문화적 관습은 철저히 금지됐다. 원주민의 문화와 관습 및 정신적 유산은 열등하다는 전제하에 자행된 일이었다. 아이들은 제대로 된 먹거리와 입을거리, 잠자리를 제공받지 못했고 정서적, 신체적, 성적 학대와 방임에 시달려야 했다. 부모와 공동체에게서 마땅히 받아야 할 돌봄을 박탈당한 채 아이들은 그렇게 원주민으로서 고유의 정체성을 잃어갔다. 기숙학교 생활을 한 15만 명의 아이들 중 4천 명 넘는 아이들이 도중에 사망한 것으로 추산된다. 그리고 현재 약 8천 명의 생존자가 있다.

인디언 기숙학교에서 학대 받았던 아이들

<I am Not a Number(나는 번호가 아니에요)>라는 그림책은 저자의 할머니이자 기숙학교 학생이었던 '아이린 쿠치 두피(Irene Couchie Dupuis)'의 실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기숙학교에서 아이린은 자랑이었던 긴 머리를 잘리고 이름 대신 759라는 번호를 부여받는다. "내 이름은 아이린 쿠치예요." 작은 목소리로, 하지만 떨리는 손을 들키지 않으려 두 손을 꼭 모아잡고 부러 고개를 높이 든 채 말하는 아이린에게 수녀는 답한다. "여기서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아. 모든 학생들은 번호로 불린다!" 또한 원주민 언어를 사용했다는 이유로 뜨거운 석탄이 든 요강에 손을 데이게 하며 수녀는 말한다. "이렇게 하면 여기서 영어로만 말해야 한다는 걸 배우게 될 거다. 너는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겨야 해…"

"네가 누구인지 절대로 잊지 말거라." 헤어지던 날 엄마의 마지막 말이 아이린의 귀에 쟁쟁했다. "나는 아이린 쿠치야. 잊지 않을 거야." 눈물 흘리며 스스로에게 속삭여보지만, 한 번도 자신의 언어를 부끄러워한 적이 없었던 아이린은 자신이 누구였는지, 어디서 왔는지, 그동안 알아왔고 소중히 여겼던 모든 것들이 천천히 사라져감을 느낀다.

기숙학교에서 충격적인 경험을 하고 돌아온 아이들은 가족과 공동체로부터의 지원을 기대했지만, 그들만의 관습과 문화와 전통은 식민주의에 의해 이미 무너져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상황에서 개인적인 혹은 가족간의 부작용이 여러 형태로 나타났다. 슬픔, 가난, 가정 폭력, 약물 남용, 가족과 공동체의 해체, 정신적·신체적 문제와 같은 식민주의의 악영향은 불행히도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원주민들은 자신들이 겪었던 끔찍한 일들과 그 지속적인 영향에 대한 공식적인 사과를 요구해왔다. 그리고 2008년 6월 11일, 마침내 당시 캐나다 연방총리였던 스티븐 하퍼가 캐나다인들을 대표해 원주민 기숙학교 시스템에 대한 공식 사과문을 발표했다.

"인디언 기숙학교 어린이들에 대한 처우는 우리 역사의 슬픈 단면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동화정책이 잘못된 것이며 엄청난 해악을 야기했음을, 우리나라에서 더는 설 자리가 없음을 시인합니다… 정부는 그동안 사죄가 없었다는 사실이 치유와 화해에 걸림돌이 되어왔음을 인정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캐나다 정부와 모든 캐나다인들을 대표해 인디언 기숙학교 제도에 대해 원주민 여러분께 사과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여러분은 오랜시간 회복을 위해 노력해왔고 이제 우리는 진정으로 그 여정에 함께 하겠습니다. 캐나다 정부는 진심으로 사죄드리며 이 나라 원주민 여러분들의 용서를 구합니다."

스티븐 하퍼의 사죄는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고 화해를 향해 나아가는 역사적이고 상징적인 일로 여겨졌다. 하지만 일부 원주민들은 긍정적 변화를 일으키기 위한 의미있는 약속들이 부족했다는 것, 기숙학교 외의 수많은 부당함에 대한 해결책이 필요하다는 것 등을 이유로 사과문에 부족함이 많다고 여겼다. 무엇보다 연방정부가 운영하지 않았던 뉴펀들랜드와 라브라도 지역 기숙학교에 대한 사과가 빠져있었다. 결국 최초의 사과문과 보상합의서에서 제외됐던 지역 원주민들에게 5천만 달러를 지급하라는 결정이 내려졌다. 그리고 2017년 11월 24일, 이전 사과문의 부족함을 메꾸기 위한 연방총리 저스틴 트뤼도의 두 번째 사과문 발표가 있었다.

"오늘 우리가 잘못했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그것으로 여러분께 끼친 피해를 없던 일로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기숙학교에서 일어났던 일들이 더이상 홀로 짊어져야 할 짐이 아님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들 내면의 아이에게 마침내 쉼을 줄 수 있는 치유가 오늘 시작되기를 바랍니다… 캐나다 정부와 원주민 사이의 화해는 어려운 과정이며 여전히 진행중임을 압니다… 하지만 사죄하고 과거를 인정하며 용서를 구함으로써, 하나의 국가로서 우리가 화해와 치유의 여정을 함께 해나갈 것을 희망합니다. 기숙학교를 만든 역사를 지울 수는 없지만, 그것이 미래를 결정짓도록 해서는 안됩니다. 원주민과 비원주민이 함께 원하는 미래를 만들어가는 역사의 다음 장에 모든 캐나다인들의 참여를 촉구합니다."

2013년부터 시작된  '오렌지 셔츠 데이' 운동    
 
 9월 30일, 캐나다인들은 인디언 기숙학교라는 아픈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 오렌지색 셔츠나 액세서리를 착용한다.
 9월 30일, 캐나다인들은 인디언 기숙학교라는 아픈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 오렌지색 셔츠나 액세서리를 착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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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해를 위한 한 방편으로 2013년에는 '오렌지 셔츠 데이(Orange Shirt Day)' 운동이 시작됐다. '모든 어린이는 중요하다(Every Child Matters)'를 모토로 삼는 이 운동은 인디언 기숙학교에서 생활했던 학생들의 경험을 기리고 기억하기 위함이다. 기숙학교 입학 첫날 오렌지 셔츠를 입었던 필리스 웹스타드의 경험을 바탕으로 제정되었기에, 이날에는 많은 이들이(특히 학교를 중심으로) 오렌지색 셔츠나 액세서리를 착용한다. 그리고 캐나다 곳곳에서 인디언 기숙학교에 대한 인식을 고취하는 토론이 벌어진다. 올해는 코로나 여파로 관련 행사들이 온라인 상에서 열렸지만, 어쩌면 그때문에 더 많은 이들이 필리스 웹스타드의 연설을 듣고 대화를 나눌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관계의 개선을 위해서는 상처 입은 자에 대한 공감과 이해, 상처 주었음을 인정할 수 있는 정직함과 용기, 그리고 행동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노력, 이 모두가 필요하다. 너무 오랜 어둠의 세월이 흘렀지만, 캐나다인들은 마침내 상처 입은 자의 마음을 이해했고 상처 주었음을 인정했으며 변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오렌지 셔츠 데이' 같은 행사를 통해 과거를 결코 잊지도 반복하지도 않겠다는 의지를 다지고 있고, 정부 차원에서의 원주민 지원도 여러 방면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늦었지만 역사를 잊지 않은 이 민족에게 진정한 화해와 치유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캐나다의 '오렌지 셔츠 데이'를 지나면서 제주 4.3사건에 대해 공식 사과하던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 역시 과거에 대한 반성, 화해, 그리고 밝은 미래를 이야기했다. 사과와 반성 없이는 화해와 치유로 나아갈 수 없고, 그것 없이 밝은 미래가 있을 수 없는 까닭이다.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대통령으로서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유족과 제주도민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과거 사건의 진상을 밝히고 억울한 희생자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일은 비단 그 희생자와 유족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대한민국 건국에 기여한 분들의 충정을 소중히 여기는 동시에, 역사의 진실을 밝혀 지난날의 과오를 반성하고 진정한 화해를 이룩하여 보다 밝은 미래를 기약하자는 데 그 뜻이 있습니다… 물론 정부의 사과가 모든 문제를 매듭짓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제주 4.3사건에 대한 해결의 가닥은 잡힌 것이라고 봅니다. 과거의 역사를 정리하고 이제는 미래를 함께 생각합시다."

우리나라에서 국가권력에 의해 자행된 비극은 비단 제주4.3사건만이 아니다. 잘못된 과거를 제대로 된 인식과 사과 없이 묻어버리지도, 되풀이하지도 않겠다는 '오렌지 셔츠 데이'의 다짐이 우리에게도 적용되어야 하는 이유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오렌지색 셔츠 입은 선생님과 아이들을 보며 그 흔한 어구가 종일 머릿속을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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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년째 손 맞잡고 함께 걷는 한 남자, 그리고 꽃같고 별같은 세 아이들과 함께 캐나다 런던에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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