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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명량'(2014) 중 이순신(최민식 분).
 영화 "명량"(2014) 중 이순신(최민식 분).
ⓒ (주)빅스톤픽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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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사태 와중의 추석 명절이라서 한국인들은 마음이 복잡하고 편치 않다. 이런 와중에 한국인들을 더욱 심란케 하는 게 있다. 8.15 광화문집회를 개천절에도 재현하겠다면서 고집을 피우는 극우단체들이 바로 그것이다. 완전히 똑같진 않지만, 임진왜란 2년 차에 48세의 이순신 장군도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었다. 

1592년 발발한 임진왜란 초기에 조선군은 계속 밀리고 밀렸다. 하지만 의병투쟁이 전세를 바꿔놨다. 이로 인해 일본군이 주춤하는 사이에 조선 관군은 전투력을 회복하고 명나라군까지 참전하면서 일본군이 밀리기 시작했다.

조명 연합군 체제 하에서 명나라는 초기의 평양성 수복 때와 달리 그 뒤로는 잘 싸우지 못했다. 경기도 벽제 전투에서 패한 뒤로는 어떻게든 빨리 마무리하고 철군할 생각만 했다. 그들은 전황이 유리해지는데도 일본의 휴전회담 제의를 받아들였다. 이로 인해 전쟁이 소강 국면에 접어들던 상태에서 1593년 7월 27일(음력 6월 29일) 논개가 순국했다.

논개의 순국이 있기 얼마 전인 1593년 2사분기부터 이순신 부대는 전투 기회를 잘 잡지 못했다.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드는 데다가 일본 수군이 이순신과 조선 수군을 피해다녔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수개월간 이순신은 군비 태세를 정비하면서 주로 전함 위에서 생활했다. 회의를 하거나 보고를 받는 일도 해상에서 처리했다. 사사로운 만남이나 술자리도 바다 위에서 가졌다. 이순신을 만나고자 하는 사람들은 배를 타고 이동했고, 이순신 역시 누군가를 만날 일이 있으면 배를 타고 움직였다. 선박이 숙소와 이동수단 역할을 겸했던 것이다.

일본과 싸워야 하는데... 보이지 않는 적까지 
 
 조명연합군의 평양성 탈환 모습을 묘사한 병풍.
 조명연합군의 평양성 탈환 모습을 묘사한 병풍.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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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에 이순신 부대는 또 다른 적군으로 인해 고통을 겪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 부대'였다. 1593년부터 창궐한 역병은 조선·명나라·일본 3국 군대를 동시에 괴롭혔다. 인간과 인간의 전투에 더해 인간과 바이러스의 전투까지 겹치는 혼전 양상이었다.

음력으로 선조 26년 8월 10일(양력 1593년 9월 4일)에 작성한 <왜군 정황에 관한 보고서>(陳倭情狀)에 따르면, 역병으로 인해 이순신 부대에서 사망자가 속출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전염병이 크게 번져 군영의 군졸들이 태반이나 전염돼 사망자가 속출하고 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이순신 부대 6200여 명 중에서 이때까지 사망한 사망은 600여 명이었다. 이 600여 명 중에서 전사자는 최고 150명이었다. 450명 혹은 그 이상이 전염병으로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이순신 부대의 전염병 피해는 그 후에 훨씬 커졌다. 그가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뒤인 1594년 2사분기에 충청·전라·경상 3도 수군은 2만1500명 정도였다. 역병 피해가 여전히 심했던 1595년 봄에 이 숫자는 4109명으로 감소했다. 병력의 80% 정도가 줄어들었던 것이다. 병력 감소의 주된 원인은 전염병으로 인한 병사였다. 명장 이순신도 보이지 않는 군대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이 시기에 이순신도 건강이 좋지 않았다. 1593년 추석 1개월 전에 전염병 같지는 않지만 지독한 몸살 같은 증상을 여러 날 겪었다. 음력 7월 14일 치(양력 8월 11일) <난중일기>에는 "몸이 몹시 불편하여 온종일 신음했다"는 대목이 있다. 그냥 아픈 정도가 아니라 신음을 내야 할 정도였다.

16일과 17일에도 몸이 몹시 불편했다. 18일에는 몸이 좋지 않아 온종일 누웠다 앉았다 했다. 추석 직전인 음력 8월 10일·11일·12일·13일에도 동일한 일이 있었다. 이런 속에서도 그는 정상적으로 업무를 처리했다.

"며칠만 더 늦었더라면..." 이순신의 걱정 
 
 <난중일기>로 대중에 알려진 국보76호 '이순신 난중일기 및 서간첩 임진장초'(李舜臣 亂中日記 및 書簡帖 壬辰狀草).
 <난중일기>로 대중에 알려진 국보76호 "이순신 난중일기 및 서간첩 임진장초"(李舜臣 亂中日記 및 書簡帖 壬辰狀草).
ⓒ 문화재청 현충사관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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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3년에는 양력 9월 9일이 추석이었다. 한가위가 임박해지는 시기에 이순신은 일본군과 바이러스(전염병)을 신경쓰는 건 물론이고 이따금 짬을 내 집안일에도 관심을 보였다. 인편을 통해 어머니 건강을 수시로 확인하고, 셋째아들 이면(이염)의 종기 치료도 확인했다.

<난중일기>에 따르면, 음력 8월 2일(양력 8월 27일)에는 "이염의 아픈 데에 종기가 생겨 침으로 쨌더니 고름이 흘러나왔는데, 며칠만 늦었어도 치료하기 힘들 뻔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이순신은 다음날 일기에는 "며칠만 더 늦었더라면 미처 구하지 못할 뻔했다는 것이다"라고 썼다. 이처럼 아버지의 애간장을 태운 셋째아들은 4년 뒤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결국 전사한다.

이러저러한 일로 신경을 써야 했던 이 시기 이순신은 마음이 복잡했다. 이런 심경을 보여주는 시가 있다. 추석 한 달 전에 쓴, 음력 계사년 7월 15일자(양력 1593년 8월 11일자) <난중일기>에 이런 시가 적혀 있다.
 
가을 기운 바다에 드니
나그네 마음 어지러워
홀로 뜸(篷) 밑에 앉으니(뜸은 대로 엮어 배를 덮는 것)
마음 속 생각이 너무 괴로워
달빛이 뱃전에 들어오니
정신이 맑아지고
잠도 이루지 못했는데
닭이 벌써 우는구나
  
그리고 원균

일본군과의 싸움에, 바이러스와의 싸움에, 게다가 집안일까지 겹쳐 편치 않은 이순신을 한 층 더 심란케 하는 것이 있었다.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기 전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있을 때에 경상우도 수군절도사를 지내며 이순신과 대립각을 세운 원균 때문이다.

처음부터 하급자로 만났다면 별 일이 없었을 수도 있는 원균이었다. 그런 원균을 동급자로 만난 뒤로 이순신은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원균이 적군인지 아군인지 헷갈릴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초반에 원균 부대 병사들이 이순신 부대의 전리품을 가로채려고 해상에서 공격을 가해 이순신 부하들이 부상을 입은 일까지 있었으니 그런 염려를 가질 만도 했다.

임진왜란 1년 전에 유성룡은 1년 뒤를 예견하기라도 한 듯 무명의 정읍현감 이순신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전격 발탁했다. 그런데 이 자리는 원균이 가기로 돼 있었던 자리다. 이처럼 이순신과 원균은 좋지 않은 인연으로 엮였다. 게다가 원균 부대가 전투 현장에서 이순신 부대를 공격하기까지 했으니... 이순신 입장에서는 원균을 불신하고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이순신이 원균을 멀리한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원균의 언어가 진실성이 거의 없을 뿐 아니라 이순신에게 불리한 말들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이순신은 그런 원균과 공조하면서 전쟁을 수행해야만 했다. 1593년 추석 전에 쓴 <난중일기>에 그로 인한 이순신의 심리 상태가 묻어 있다.
 
음력 7월 21일(양력 8월 17일): 원 수사가 하는 말은 극히 흉측하고 거짓되었다. 무어라 형언할 수 없음이 이와 같으니, 함께 하는 일에 후환이 없을 수 있겠는가.

음력 7월 28일(양력 8월 24일): 원 수사가 음흉하게 속임수를 쓰는 것은 아주 형편없다.

음력 8월 2일(양력 8월 27일) : 원 수사가 망령된 말을 하며 나에게 도리에 어긋난 짓을 많이 하더라고 (우수사 이억기가) 말했다.

음력 8월 7일(양력 9월 1일): 원 수사와 그의 군관은 평소에 헛소문을 잘 내니 믿을 수가 없다.
 
일본군과 역병 방역에 집중돼야 할 이순신의 정신력이 적군인지 아군인지 알 수 없는 원균으로 인해 많이 소모됐음을 느낄 수 있다. 이렇게 원균 때문에 이순신의 심기가 불편해진 상황에서도 1593년의 추석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오늘은 추석이다"로 시작하는 일기 
 
 영화 '명량'(2014) 스틸컷. 극중 이순신(최민식 분)과 수봉(박보검 분).
 영화 "명량"(2014) 스틸컷. 극중 이순신(최민식 분)과 수봉(박보검 분).
ⓒ (주)빅스톤픽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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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못 가는 물론이고 육지에 상륙도 하지 못한 이순신 부대에도 추석 분위기를 느끼게 할 만한 일들이 있었다. 추석 이틀 전인 음력 8월 13일(양력 9월 7일)에는 군량미 300석과 콩 300섬이 배달됐다.

다음날에는 평소 이순신(李舜臣)을 자주 찾던 방답첨사 이순신(李純信)이 손에 뭔가를 들고 왔다. 이순신의 하급자이자 아홉 살 연하인 방답첨사 이순신이 먹을 것을 들고 배에 올라탄 것이다.
 
(음력) 14일. 맑음. 방답첨사 이순신이 제사 음식을 갖추어 왔다. 우수사와 충청수사와 순천부사도 와서 함께 먹었다.
 
제사 음식이라고 한 걸 보면, 술과 떡과 햇과일 등을 갖고 온 모양이다. 다음날, 드디어 추석의 아침이 밝았다. 이날 이순신은 기분이 즐거웠던 듯하다. 이날은 아프지도 않았다. 손님도 많이 찾아왔다. '맑음'과 '오늘은 추석이다'라는 말로 시작하는 추석 당일의 일기는 아래와 같다.
 
"우수사, 충청수사 및 순천부사, 광양현감, 낙안군수, 방답첨사, 사도첨사, 흥양현감, 녹도만호, 이응화, 이홍명, 좌·우 도영공 등이 모두 모여 이야기했다."

술을 마셨다는 기록은 없다. 차 마시면서 시간을 보낸 모양이다. 방답첨사 이순신이 전날 갖고 온 술이 이 자리에는 나오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죽은 조상 앞에 술을 올려야 할 날에 그러지 못하는 처지를 감안해 음주를 자제했을 수도 있다. 추석 다음날인 16일에는 전날 빈손으로 왔던 광양현감이 음식을 싸들고 왔다.
 
"광양현감이 명절 음식을 준비해 왔다. 우수사, 충청수사, 순천부사, 방답첨사도 왔다. 가리포첨사, 이응화가 함께 왔다."
 
일본군과 역병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은 데다가 집안일에까지 신경을 써야 했던 1593년 추석 즈음, 이순신은 적인지 아군인지 헷갈리는 원균 때문에 심기가 크게 불편해 있었다. 이런 속에서도 선상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음식을 나누는 것으로 그는 전쟁 2년 차의 추석을 그럭저럭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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