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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강점기 군산 본정통(조선은행 군산지점과 미두장 건물도 보인다)
 일제강점기 군산 본정통(조선은행 군산지점과 미두장 건물도 보인다)
ⓒ 군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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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군산의 메인스트리트(본정통) 모습이다. 나가사키 18은행 군산지점(현 근대미술관) 앞에서 찍은 것으로 보인다. 왜장(倭將)의 투구를 연상시키는 좌측 지붕은 조선은행 군산지점 건물(현 근대건축관), 뾰족한 철탑이 인상적인 오른쪽 건물은 미두장(미곡취인소)이다. 당시 군산은 본정통을 중심으로 남쪽에 전주통, 북쪽에 해안통이 뻗어 있었다.

"미두장은 군산의 심장이요, 전주통(全州通)이니 본정통(本町通)이니 해안통(海岸通)이니 하는 폭넓은 길들은 대동맥이다." - 채만식 소설 <탁류>(26쪽)에서

소설 <탁류>는 "이 대동맥 군데군데는 심장 가까이, 여러 은행들이 서로 호응하듯 옹위하고 있고, 대동맥 전후좌우에는 중매점(仲買店)들이 전화줄로 거미줄을 쳐놓고 앉아있다"고 덧붙인다. 1924년 군산상업회의소가 조사한 군산부 지가(地價) 통계에도 미두장과 본정통 부근은 군산에서 땅값이 가장 비싼 지역으로 나타난다.

일본인 지도에 표기되지 않은 '해안통'
 
 쌀이 산처럼 쌓인 군산항 모습(1920년대)
 쌀이 산처럼 쌓인 군산항 모습(1920년대)
ⓒ 동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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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는 1920년대 군산 부청이 발행한 관제엽서 사진이다. 군산 세관 부근에서 동쪽을 바라보며 찍은 사진으로 3차 축항공사 기공식(1926) 이전 내항(內港) 모습이다. 죽성 포구(째보 선창)를 병풍처럼 감싼 석산(石山)이 원형에 가깝게 남아있고, 조선은행 군산지점 건물 옆으로 동령산(동령고개) 자락이 보여 1924년경 찍은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내항 부근의 공식 지명은 빈정(濱町), 이곳을 중심으로 오른쪽은 동빈정(東濱町), 왼쪽은 서빈정(西濱町)이라고 했다. 빈정은 1917년 제작된 군산부 지도에 서빈정(지금의 해망동)과 함께 등장하기 시작한다. 옥구군 경포리에 속했던 죽성 포구(째보 선창)는 1932년 군산부에 편입되면서 '동빈정(금암동)'이란 지명을 얻는다.

사진 오른쪽 도로는 <탁류>에 등장하는 '해안통'이다. 해안에 가장 근접한 도로라서 그렇게 부르지 않았나 싶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일제가 제작한 지도에 '빈정'만 보이고 '해안통'이란 지명은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광복 후에도 회자됐던 지명임에도 지도에 표기되지 않은 이유는 조선인 사이에서만 통용된 지명이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100년 전 신문에서 만난 조선인 업체들
 
 1920년대 초 군산 본정통과 빈정에 존재했던 조선인 조합과 업체들
 1920년대 초 군산 본정통과 빈정에 존재했던 조선인 조합과 업체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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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빈정에는 쌀 25만 가마를 한꺼번에 보관할 수 있는 상옥창고 세 동(棟)과 세관지서 출장소(세관 감시소), 도선대합소(渡船待合所), 회조업 사무실(回漕業: 해상화물 하역 및 운송을 전문으로 하는 업체), 부두화물역(내항 인입선 화물취급소), 철도 화물창고 등이 자리했다. 그중 부두화물역과 회조업 사무실, 화물창고 등은 해안통 도로변에 있었다.

본정통과 빈정은 일본인 거점지역으로 사업체는 대부분 일본인이 운영했다. 그들은 조선은행, 나가사키 18은행, 식산은행 등 일제가 설립한 금융기관을 등에 업고 부를 축적해나갔다. 그처럼 일본인들이 부를 쌓을수록 조선 백성의 삶은 더욱 고달프고 궁핍해지는 식민지 경제체제였다. 그럼에도 당시 조선인이 운영하는 상회와 조합이 여러 곳 발견된다.

옛날 신문(1920~1925)에 등장하는 조선인 업체와 조합은 상업운송점(商業運送店), 군산객주조합(群山客主組合), 덕창호(德昌號), 부민상회(阜民商會), 남신상회(南信商會), 금팔상회(錦八商會), 인흥상회(仁興商會), 어상조합(漁商組合), 대화상회(大化商會), 군산신흥조합(群山新興組合) 등이 있다. 해륙물산을 위탁 판매하는 객주와 전화를 보유한 업주도 눈에 띄었다.

노동자들 모주 한 사발로 허기 달래
 
 군산화물역(군산근대역사박물관 주차장 부근에 있었음)
 군산화물역(군산근대역사박물관 주차장 부근에 있었음)
ⓒ 군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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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해안통 도로변에 있었던 '부두화물역'이다. 인부들이 기차 화물칸에서 내린 짐을 트럭에 옮겨 싣고 있다. 이삿짐 등 일반 생활용품도 취급했던 부두화물역은 광복과 함께 폐쇄됐으나 마루보시(丸星), 미창(米倉) 등이 수화물 작업장으로 사용하다가 1970년대에 건물이 헐렸다. 이후 2012년경 군산근대역사박물관 주차장 공사로 시설이 모두 철거된다.

부두화물역은 일제가 더욱 많은 쌀을 실어 나르기 위해 1931년 8월 1일 영업을 개시한 군산항역 대안으로 개설한 화물역이었다. 군산세관 부근(현 한국전력 군산지점 뒤편)에 있었던 군산항역은 태평양전쟁이 막바지로 치닫기 시작하는 1943년 12월 모든 운송 기능을 '부두화물역'에 넘겨주고 문을 내린다.

1930년대 군산항 부두 노동자는 1500~2000명 정도. 3000명을 넘어서는 때도 있었다. 부두화물역은 넓은 마당을 확보하고 있었음에도 노점상과 막일꾼(노가다)으로 항상 붐볐다. 떡장수, 팥죽장수, 모주장수도 많았다. 일감을 기다리다 지친 지게꾼과 구루마꾼들은 머리에 흰 수건을 두른 아낙이 가득 퍼주는 팥죽과 모주 한 사발로 허기를 달랬다.

일본인 거점 지역이던 내항 주변, 문화공간으로 탈바꿈
 
 장미동 피난민촌 모습(1950년대)
 장미동 피난민촌 모습(1950년대)
ⓒ 군산 근대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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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과 함께 군산은 '수탈의 도시'란 치욕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러나 또 다른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점령군으로 들어온 미군이 모든 행정을 집행하는 '미군정'이 시작된 것. 거리에는 3·8선을 넘어온 월남민(따라지 인생)이 넘쳐났고, 곳곳에 하꼬방이 들어서기 시작했으며 쌀더미가 산처럼 쌓였던 내항에는 미군 항만사령부가 들어선다.

악명 높았던 미두장은 광복 후 원불교 교당으로 사용되다가 한국전쟁 때 화재로 잿더미가 된다. 전란을 겪은 본정통, 전주통, 해안통 등은 마구잡이 폭격으로 거대한 물웅덩이가 생겨 통행이 어려울 정도였다. 대형 선박이 드나들던 부두도 대부분 파괴되고 상옥창고를 비롯한 내항 시설물들도 박살나거나 흉물스러운 모습으로 변했다.

1·4후퇴 때 미군 수송함(LST)을 타고 군산으로 내려온 피난민은 5만여 명. 그중 절반은 타지로 분산되고 절반은 소룡동(솔곶이)·해망동 일대와 삼학동·흥남동·선양동·오룡동 등 군산의 고지대에 정착했다. 구암초등학교와 명산동 유곽에 집단으로 수용되기도 했으며 서래산 아래와 공설운동장, 내항 쌀창고 주변(장미동)에 피난민촌을 형성하기도 했다.

일본인 거점 지역이었던 내항 주변(빈정, 해안통, 본정통)은 광복 후 장미동(藏米洞)으로 개칭된다. 2차선이었던 본정통은 4차선으로 확장되고 지명도 '해망로'로 바뀌었다. 일제의 비인간적인 착취와 감시에 시달려야 했던 조선인 노동자들. 그들의 애환이 서린 내항 지역은 근현대사 교육과 체험이 가능한 복합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주차장으로 변한 부두화물역 부근(오른쪽 도로는 예전 해안통. 도로 뒤편으로 구 조선은행 지붕이 보인다)
 주차장으로 변한 부두화물역 부근(오른쪽 도로는 예전 해안통. 도로 뒤편으로 구 조선은행 지붕이 보인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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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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