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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말에 퇴직을 했다. 2년 전 다시 일을 시작할 때부터 예정된 퇴직이었다. 실직 5개월째다. 코로나19, 유난히 길었던 장마, 폭염, 태풍까지. 모두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나도 마찬가지다. 코로나19의 상황에 따라 모임도 약속과 미루기를 반복했다. 답답한 방콕 생활이 언제쯤 끝이 날까? 평소 찾던 도서관도 휴관 중이라 몇 달째 가지 못하고 있다. 기저 질환이 있기에 밀집된 카페도 가기가 두렵다. 답답하면 주로 근처 공원을 산책한다.

계획했던 소설 쓰기는 수일 째 답보 상태다. 조금만 더 지나면 내가 창조한 세계 속의 인물들이 머리에 띠를 두르고 작가를 성토할 것 같다. 다행인 건 그 짧은 단편의 공간에 코로나19는 없다. 며칠 전 도서관 홈페이지에서 예약했던 책 세 권을 대출했다. 오늘은 수요일이다. 산책을 집 근처 공원이 아닌 좀 더 먼 곳으로 정했다. 책 한 권을 들고 한강으로 악셀을 밟았다. 코로나19 우울증을 벗어나기 위한 오늘의 미션은 한강에서 책을 읽고 라면 끓여 먹기다.

태풍 마이삭이 휩쓸고 간 골목 주차장 풍경
   
지난 9월 3일(목)아침 태풍 마이삭으로 골목에 주차되어 있던 차량 세대가 부서졌습니다.
▲ 태풍피해 지난 9월 3일(목)아침 태풍 마이삭으로 골목에 주차되어 있던 차량 세대가 부서졌습니다.
ⓒ 김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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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3일(목)아침 태풍 마이삭으로 인해 주차장 근처 주택 옥상에서 알루미늄 널빤지가 날아와 지붕이 내려 앉고 뒷유리가 부서졌습니다.
▲ 태풍 피해 지난 9월 3일(목)아침 태풍 마이삭으로 인해 주차장 근처 주택 옥상에서 알루미늄 널빤지가 날아와 지붕이 내려 앉고 뒷유리가 부서졌습니다.
ⓒ 김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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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일 아침 한반도를 강타한 태풍 '마이삭'은 내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그날 아침에 불어 닥친 강풍으로 골목 주차장에 있던 내 차가 부서졌다. 인접한 건물 옥상에서 알루미늄 널빤지가 날아와 주차장에 있던 차량 세 대를 덮쳤다. 내 차의 지붕이 움푹 내려앉았고 뒷유리는 박살이 났다.
   
그날 아침 잠이 덜 깬 몽롱한 정신으로 아수라장이 된 주차장을 보고 있는데 황망했다. 수리비는 얼마나 나올까, 보험처리는 될까, 보험에 자차는 들어 있던가, 이도 저도 안되면 폐차를 해야 하나. 부서진 차를 보는 심경이 복잡했다. 보험회사 직원이 오고 경찰이 왔다. 피해를 본 차들이 모두 같은 보험회사였다.  

태풍이 휩쓸고 간 아침의 난장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가던 길을 멈췄다. 두시간쯤 지나서 상황이 정리되고 부서진 차를 몰아 보험사 직원이 알려준 공업사에 차를 맡겼다. 예상대로 찻값보다 수리비가 더 나왔다. 다행히 다음 날 널빤지가 날아온 건물의 주인과 손해배상 합의는 잘 되었다.

차를 수리하는 데 일주일이 걸렸다. 내려앉은 지붕과 박살이 난 유리를 교체했다. 곳곳에 스크래치가 생긴 뒷문 한짝과 트렁크, 뒤 범퍼는 새로 도색을 했다. 앞뒤의 색깔이 다르다. 폐차까지도 생각했었는데 깔끔하다. 잘 관리하면 3년은 더 탈 수 있겠다.
      
무심했던 지난날의 청구서 그리고 차량 리콜 안내문

한 달 전 현대자동차에서 차량 리콜 관련 안내문을 받았다. 발신일은 훨씬 전이다. 책상 서랍을 열어 애써 미뤄 두었던 청구서를 열었다. 미납금, 연체료, 과태료, 무심했던 지난날의 실수들이 값비싼 비용으로 청구된다. 사악한 자본주의. 체납금을 한 번에 납부했더니 통장이 깃털처럼 가볍다.

한강으로 향하기 전 지정된 공업사에서 리콜 관련 수리를 받았다. 큰 문제는 아니다. 엔진 쪽 릴레이 키트 하나만 교체하면 된다. 자식아. 요즘엔 네가 나보다 더 아픈 것 같다. 그래도 너를 팔고 싶지는 않아. 매일 왕복 백 킬로미터를 달리고. 코로나19, 폭염과 한파, 태풍과 비바람 속에서도 나를 품어주었으니. 너의 종착지는 중고매매단지가 아닌 폐차장이 될 수 있도록 애는 써볼게.

셀프 주유소에서 기름을 2만 원어치 넣고 한강으로 달렸다. 분당 수서 간 고속도로와 강변북로를 달렸다. 높고 푸른 하늘, 확 트인 정경이 코로나 우울증으로 답답하던 마음을 조금은 풀어준다. 공간은 사람들의 심리에 영향을 준다. 내가 있던 공간은 내 마음의 크기다. 속도는 씽씽, 아니 살찐 거북이처럼 느렸다. 강변북로는 출퇴근 시간이 아닌데도 답답했다. 성남에서 고양까지. 왕복 백 킬로미터. 출퇴근 세 시간. 지난 2년 동안 어떻게 이 길을 매일 다녔을까. 금요일 퇴근길이 가장 힘들었다. 가장 혼잡할 때는 퇴근하는 데만 세 시간이 넘었다.  
 
한강 고수분지
▲ 한강 고수분지 한강 고수분지
ⓒ 김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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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고수분지다. 가을 초입의 강바람이 부드럽고 시원했다. 잔잔한 물결 위에 오리배가 일렬로 묶인 채 둥둥 떠 있다. 이 시간에 여길 왜 왔냐고? 말했잖아. 한강에서 보글보글 끓인 라면을 먹고 싶었다고. 컵라면 말고. 누군가 편의점에서 보글보글 끓여 먹던 장면이 잊히지 않았다. 한강. 내 집 근처엔 이렇게 확 트인 전경과 시원한 강이 없다. 서울에서 산다는 것, 한강이 내 삶에 가까이 있다는 것은 판타지다.

머무는 게 아닌, 스쳐 지나가야만 하는 곳을 향한 결핍이다. 필요를 위한 충족일까, 결핍이 주는 갈망일까? 욕망은 불편한 온도다. 욕망은 인간을 타오르게 한다. 한쪽은 뜨겁게, 한쪽은 차갑게. 나는 어느 쪽일까? 결핍을 채우기 위해 우리는 길에서, 버스에서, 지하철에서 '나인 투 파이브'를 외친다. 그런 삶에서 잠시 빗겨나 있는 것도 나쁘진 않다. 가능하다면 오래 빗겨나 있고 싶다. 심판이나 선수가 아닌 볼보이의 삶도 괜찮지 않을까? 타인들의 시선만 견딜 수 있다면.

한강 공원에서 라면 끓여 먹는 법을 배우다 

공원 어디선가 마스크와 개인위생을 강조하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역병이 창궐하던 백 년 전에도 사람들은 마스크를 썼을까? 바이러스를 몰랐을 텐데 썼을 것 같다. 인간은 눈에 보이지 않아도 믿을 수 있는 존재들이니까.

마스크가 필요 없던 세상이 그립다. 공원 편의점엔 금줄이 쳐져 있다. 편의점에서 라면을 못 끓인다. 휴게소 이마트에서 라면을 한 개 샀다. 기계 사용료 포함 삼천 원이다. 라면을 끓여 먹고 싶었다. 기계 앞에서 멈칫했다. 처음은 늘 몇 개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시작은 당혹감이다. 물을 먼저 넣어야 하나? 버튼을 먼저 눌러야 하나. 어떤 버튼을 누르지? 당혹감과 설렘, 신기함을. 그런데 이 라면 어떻게 끓이냐?

차갑고 냉철한 기계 앞에서 망설이고 있는데 뒤에서 사내 한 명이 오더니 사용법을 설명해준다. 고마웠다. 사용법은 정말 간단했다. 라면을 기계 위에 올려놓고 '일반라면'이 적힌 버튼을 한 번만 꾹 누르면 된다. 알고 나면 뭐든 쉽다. 알기 전까지가 당혹스럽다. 삼각함수나 라면 끓이기나, 알기 전부터 쉬운 건 없다는 것. 삼각함수는 수십 번 설명을 들어도 몰랐지만. 하루키의 말이 떠오른다. 설명하지 않으면 모른다는 건 설명을 해도 모른다는 것. 내겐 삼각함수가 그랬다. 라면 끓이는 법은 쉬웠다.
   
한강 공원 휴게소에서 에서 라면을 사서 끓여 먹었습니다.
▲ 라면 한강 공원 휴게소에서 에서 라면을 사서 끓여 먹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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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을 기계에 올려놓고 2분이 지났다. 원형 종이그릇에 담긴 라면이 보글보글 끓기 시작한다. 나무젓가락을 두 갈래로 쩍 가르고 한 손으로 휘휘 면발을 젖는다.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온다. 매콤한 라면 냄새가 수제 마스크와 그 속에 든 필터를 뚫고 막힌 코를 자극한다. 내 코는 항상 절반쯤 막혀있다.

다 끓인 라면을 조심스레 들고서 한강이 보이는 2층 테라스로 향했다. 마스크를 낀 사람들이 듬성듬성 테이블에 앉아서 강물을 응시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저들도 나처럼 경계의 바깥에서 왔을까? 나도 편한 운동복을 입고 올 걸. 테이블 하나를 끌어내 강 쪽으로 당겼다. 한강을 바라보며 라면을 후루룩 먹었다. 시원한 바람은 양념이다. 역시 별미다. 매운맛으로 선택하길 잘했다.

하루키와 야니체크의 신포니에타, 혜은이의 제3한강교

라면을 다 먹고 하루키 1Q84 3권을 읽는다. 이 지난한 소설의 끝이 멀지 않다. 하루키와는 작별하게 될까? 아니면 그가 창조한 또 다른 시공간으로 빠져들까? 강물을 보고 있으니 1Q84 속 야니체크의 '신포니에타'가 들린다. 하지만 죽은 왕녀를 위한 장송곡 같은 신포니에타는 몇 번을 들어도 내 취향은 아니다. 이곳에선 야니체크의 신포니에타 보다는 혜은이의 '제3한강교'가 더 어울린다.

그러나 나는 상관없는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을 읊조린다. 사랑하는 이와 스페인 그라나다의 언덕을 밟을 수 있을까? 이 소설의 끝에서 덴고와 아오마메는 만날 수 있을까? 비밀 조직 선구와 후카에리, 리틀피플, 공기번데기, 아자부 노인, 우시카와, 고마쓰. 나르시시즘을 한 소금씩 들이마신 것 같은 소설 속 인물들의 삶은 어느 결로 흘러서 결말을 맺을까?

코로나19와 비대면,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

내가 있는 곳, 보는 것, 듣는 것, 경험한 것들이 나를 완성한다. 이해 불가한 이들을 보면 그들이 살았던 삶의 궤적과 공간이 궁금해진다. 시간은 육체를 소멸시키고 공간은 정신을 지배하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영혼을 찾는다. 소멸하지 않고 잊히지 않기 위해서. 영혼은 자유니까. 나는 여전히 스스로 서툴고 타인에겐 미완성이다. 미완성인 나는 시공이 틀어진 '공기번데기' 속에서 나의 첫 번째 부활을 꿈꾼다. 세상에 벽돌 하나 쌓지 못하는 소설이 주는 긍정이다.

방콕 탈출 후 세 시간이 지났다. 집으로 향했다. 공원 주차장이 유료다. 착각은 자유지만 비용이 발생한다. 쿨 하지 않다. 나나 너나. 카드를 내민 나의 차가운 손을 반기는 건 그대의 따듯한 손이 아니다. 얇은 네모난 구멍이다. 언텍트, 비대면의 순간들.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 주차요금을 낸후 핸들을 잡고 악셀을 밟는다. 핸들의 묵직함이 좋다. 굽이굽이를 거쳐 강변북로를 탔다. 휴대폰 잔여 배터리가 십오 프로다. 집까지 도착 예정 시간은 57분이다. 강변북로는 여전히 느리지만 올 때보다는 빠르다. 도중에 문자가 하나 왔다. 기다리던 택배다. 악셀에 더 힘이 들어간다. 내일은 율동공원이다. 그곳은 주차요금이 세 시간 무료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김인철 시민기자의 <네이버블로그와 페이스북>에 실릴 예정입니다


태그:#한강, #코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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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 뉴스 시민기자입니다. 진보적 문학단체 리얼리스트100회원이며 제14회 전태일 문학상(소설) 수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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