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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중반을 지나며 고향에 대해 다시 생각해봅니다. 내가 살던 서울을 답사하며 얻은 성찰과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보려 합니다.[편집자말]
내 부모님과 형제들의 고향은 경상북도 상주다. 경주(慶州)와 상주(尙州)의 앞 자를 따서 경상도(慶尙道)가 되었듯이, 상주는 오래도록 중요한 지위를 가진 고을이었다.

주요 고속도로가 지나는 상주는 지금도 나날이 발전하는 도시다. 하지만 1970년대까지만 해도 경부고속도로가 지나는 김천과 공업 단지가 있는 구미와 달리 상주는 외진 농촌이었다. 그런 상주에서 오래도록 농사짓던 우리 가족은 약 60년 전 상경해 지금까지 서울과 수도권에 살고 있다.

우리 가족의 막내인 나는 1966년 서울 강북구 수유동, 당시에는 수유리라 불리던 곳에서 태어났다. 우리 가족에게 수유리는 낯선 외지인 서울에서 안정적인 주거 공간을 제공해준 곳이었고 도시에서 자란 나에게는 첫 고향이 된 곳이었다. 그런 수유리를 나는 틈날 때마다 답사하고 있다. 그런데 수유리를 걸을 때마다 어떤 질문 하나가 떠올랐다.

농민의 후예인 우리 가족은 어떻게 서울로 올라와 도시인이 되었을까?

농촌 바깥의 세상
 
오른쪽에 계신 분들이 나의 부모님이다. 1916년생인 아버지는 1930년대에, 1924년생인 어머니는 1940년대에 이 사진들을 촬영했다.
▲ 부모님 사진 오른쪽에 계신 분들이 나의 부모님이다. 1916년생인 아버지는 1930년대에, 1924년생인 어머니는 1940년대에 이 사진들을 촬영했다.
ⓒ 강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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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삼십 년 전에 돌아가신 부모님의 묘를 경북 상주의 문중 봉안당으로 이장했다. 문중 봉안당 앞에는 우리 집안의 역사가 담긴 기념비가 있었다. 거기엔 1600년대 중반 경상도 땅 상주에 정착한 강씨 성을 가진 어떤 할아버지와 그 자손들의 계보가 나와 있다. 

기념비에 나온 것처럼 사백 년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 가족은 최소한 180년 전부터 '경상북도 상주군 중동면'에서 살아온 듯하다. 집안의 여러 문헌과 행정 서류를 보면 내 고조할아버지가 1841년 중동면의 한 집에서 태어난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증조할아버지는 1874년, 할아버지는 1891년에 태어났다. 그리고 아버지도 1916년에 같은 집에서 태어났다. 그 주소가 내가 지금도 기억하는 나의 첫 본적(本籍)이다.

나의 증조부는 할아버지 형제를 분가시켰다. 작은할아버지는 중동면에 남고, 장남이었던 우리 할아버지는 아들인 내 아버지와 함께 읍내, 지금의 상주 시내로 나왔다. 상주 읍내나 중동면이나 농촌이긴 마찬가지였으므로 분가 후에도 할아버지의 주된 수입원은 농사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중동면보다 비교적 발전한 상주 읍내에서 새로운 세상에 대한 눈을 뜨게 됐다. 당시 상주에도 일제 침략과 함께 찾아온 '근대화'의 영향이 직간접적으로 미쳤던 모양이다. 특히 상주 출신으로서 서울이나 대구에서 공부하거나 일하는 또래들을 보며, 장손이었던 아버지는 가업인 농사에 대한 미련을 버리게 됐다. "상주에 있다간 평생 농사만 지을 것 같았지." 아버지가 말년에 가끔 내뱉던 독백이다.

아버지는 1939년 어머니와 결혼 후 큰누나를 낳고는 대처를 떠돌며 일을 했다. 농사는 작은아버지에게, 살림은 어머니에게 맡겼다. 1941년 태어난 큰누나와 1946년 태어난 형, 그리고 1949년 태어난 작은누나의 터울을 보면 상주와 외지를 오래도록 오간 아버지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해방과 전쟁의 혼란 속에서 아버지는 사업의 기회를 계속 엿보았다. 목돈이 생길 때마다 아버지는 상주의 논과 밭을 사들였고 그 소산으로 아버지의 사촌들과 친척 학생들을 상급학교까지 공부시켰다. 아버지는 우리 일가의 장손이라는 의무를 무겁게 생각했다고 한다.

고향을 떠나다
 
1950년대 말 혹은 1960년대 초 경상북도 상주 읍내의 집에서 촬영. 우리 가족과 작은 아버지 가족들이 함께 모였다. 이 사진 촬영 후 우리 가족은 서울로 이주했다.
▲ 가족 사진 1950년대 말 혹은 1960년대 초 경상북도 상주 읍내의 집에서 촬영. 우리 가족과 작은 아버지 가족들이 함께 모였다. 이 사진 촬영 후 우리 가족은 서울로 이주했다.
ⓒ 강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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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일가뿐 아니라 당신 가족의 미래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했다. 서울에서 사업을 벌여 성공한 상주 출신들을 보며 자극도 받았다. "네 형과 누나들만큼은 시골을 떠나 서울에서 공부하게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지."

그렇게 아버지는 홀로 서울로 올라와 새로운 기회를 모색하던 중 무역업에서 어떤 가능성을 봤다. 성과가 쌓이고 어느 정도 자리잡게 되자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상주의 살림을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오게 했다. 1960년대 초였다. 경상도 농민의 오랜 후예가 백년 넘는 가업의 틀을 벗어나, 서울이란 도시에서 새로운 도전에 나선 것이다.

우리 가족은 상경 초기 서울 여러 곳을 전전하다 겨우 수유리에 정착했다. 주거가 안정된 덕분일까. 1924년생인 어머니는 나를 42세에 임신했다. 당시로서는 매우 노산이었다. 덕분에 난 형제 중 유일하게 산부인과 병원에서 태어났다.

수유리 집에서 누나는 고등학교와 대학교에 다녔고, 형은 대학교에 다니며 아버지 사업을 도왔다. 형제들의 경상도 억양은 차츰 서울말처럼 변해갔고, 그렇게 우리 가족은 서울 변두리 수유리에서 '서울 사람'이 되어갔다.
 
1966년 동아일보에 연재된 이 소설은 당시 서울 풍속도를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 동아일보 연재소설 이호철의 <서울은 만원이다> 1966년 동아일보에 연재된 이 소설은 당시 서울 풍속도를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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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넓다.
아홉 개의 구(區)에, 가(街), 동(洞)이 대충 잡아서 삼백팔십이나 된다. 동쪽으로는 청량리 너머로 망우리, 동북쪽으로는 의정부를 바로 지척에 둔 수유리, 우이동, 서쪽으로는 인천 가도 중간의 영등포 끝, 동남쪽으로는 한강 건너의 천호동 너머, 서남쪽으로는 시흥까지 이렇게 굉장한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넓은 서울도 삼백칠십만이 정작 살아 보면 여간 좁은 곳이 아니다. 가는 곳마다, 이르는 곳마다 꽉꽉 차 있다. 집은 교외에 자꾸 늘어서지만 연년이 자꾸 모자란다.
 
이호철의 장편소설 <서울은 만원(滿員)이다>에 나오는 구절이다. 1966년 동아일보에 연재된 이 작품은 1960년대 중반 서울의 풍속도를 종합적으로 재현했다는 평을 듣는다. 위 구절에서는 1963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확장된 서울의 경계와 늘어나는 이주민으로 인해 인구밀도가 높아진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소설에서는 삼백칠십만 명도 많다고 묘사했는데, 서울 인구는 계속 늘어 1988년에는 1천만 명이 넘어간다. 서울에서 많이 태어나기도 했지만 지방에서 많이 이주하기도 한 것이다.

서울, 새로운 고향
 

사람들은 왜 오래도록 터 잡고 살던 고향을 떠나 서울 등 도시로 몰려들었을까. 1960년대와 1970년대 한국 소설의 '고향'에 대한 이미지를 연구한 박찬효에 따르면 "전쟁과 분단은 '탈향(脫鄕)'을 추동하는 중요한 원인이었으나 가난, 전근대성 등의 내부적 원인 역시 탈향을 이끌어낸 잠재적 요인"이었다고 한다. 이런 사회현실이 많은 문학작품에 반영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생활상이 잘 드러난 김승옥의 <무진기행>, 이호철의 <서울은 만원이다>, 최일남의 <서울의 초상> 등을 보면 주인공들은 내 아버지처럼 출세를 위해 혹은 먹고살 새길을 찾아서 서울로 올라간다. 서울에서의 삶이 녹록지 않아도 그들은 다시 고향으로 내려갈 수 없다. 고향은 이미 도시만큼이나 낯선 곳이 되었고, 다른 한편 고향은 도시에서 실패한 뒤에나 도망갈 수 있는 최후의 방어선이나 다름없어졌기 때문이다. 현실도 문학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소설의 주인공들처럼 많은 이주민이 도시를 안식처로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고향으로 불쑥 내려갈 수도 없었기에, 그들이 머물던 도시를 새로운 고향으로 만들어 갔다. 이주민들은 향우회나 동문회처럼 고향을 떠올릴 수 있는 곳을 만들었고, 매일 얼굴 맞대는 이웃과 일터의 동료들과는 도시를 매개로 한 인간관계를 맺었다. 그렇게 이주민들은 서울 등 도시에서도 삶의 터전을 새롭게 일구며 적응해갔다.
 
1960년대에 300만 명이 넘은 서울 인구가 1990년대에는 천만 명이 훌쩍 넘어간다.
▲ 남대문 시장(1972) 1960년대에 300만 명이 넘은 서울 인구가 1990년대에는 천만 명이 훌쩍 넘어간다.
ⓒ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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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리가 그런 곳이었다. 일 나가거나 공부하러 간 가족을 낮이나 밤이나 기다려 주는, 그래서 언제나 돌아가 편히 몸을 누일 수 있는 그런 곳이었다.

서울 중심부에서 옮겨오거나 지방에서 올라온 이주민들이 모여 산 수유리는 그들을 따뜻하게 품어주는 고향과도 같은 곳이 되어갔다. 그렇게 수유리는 점차 많은 이에게 제2의 고향으로 자리 잡았을 것이다. 그리고 수유리에서 태어난 경상도 농민의 후예인 내게는 첫 고향이 되어주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강대호 시민기자의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태그:#어느 도시인의 고향 탐구, #수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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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중반을 지나며 고향에 대해 다시 생각해봅니다. 내가 나고 자란 서울을 답사하며 얻은 성찰과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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