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드라이브> 포스터

영화 <드라이브> 포스터 ⓒ (주)풍경소리

 
 *이 기사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드라이버(라이언 고슬링)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낮에는 자동차 정비소에서 일하며 영화 촬영장에서 자동차 스턴트를 하고, 밤에는 범죄자들의 도주를 도와준다. 그는 우연히 이웃집에 사는 여인 '아이린(캐리 멀리건)'을 만나 그녀와 사랑에 빠진다. 그녀의 남편 '스탠더드(오스카 아이작)'가 교도소에서 출소한 후에도 아이린의 곁을 떠날 수 없었던 그는 스탠더드의 작업을 도와주기로 결정하지만, 그들의 작업은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자신은 물론 아이린과 그녀의 아들마저 위험에 처하게 되자 드라이버는 그들을 지키기 위해 한때 동업자였던 갱단과 맞선다.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 때 흔히 사용되는 방법 중 하나는 기존에 알려진 이야기를 빌려오는 방식이다. 전체적인 구조나 흐름의 틀은 유지하면서도 인물 간의 관계나 사건의 순서나 인과관계를 조금씩 바꾸면서 새로운 이야기처럼 느끼도록 하는 것이다. 이때 우화나 속담, 격언처럼 중의적 혹은 다의적인 의미를 지닌 모티브들이 더해지면 더 깊고 강렬한 스토리가 탄생하기도 한다. 2011년에 개봉해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한 영화 <드라이브>도 마찬가지다.
 
 영화 <드라이브> 스틸 컷

영화 <드라이브> 스틸 컷 ⓒ (주)풍경소리

 
<드라이브>의 스토리는 사실 '뛰어난 운전실력을 범죄에 활용하는 한 남자가 우연히 만난 여성과 사랑에 빠지고 그녀를 지키기 위해 죽음을 무릅쓴다'는, 꽤 익숙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이러한 스토리는 마틴 스콜세지의 <택시 드라이버>나 에드가 라이트의 <베이비 드라이버>, 심지어 부분적으로는 <트랜스포머>와 같은 영화에서도 만날 수 있을 정도로 자주 사용된다. 그러나 <드라이브>는 절제의 미학을 통해 익숙한 스토리와 소재들을 매력적으로 조합하고 포장하며 차별화시키는 데 성공한다.

영화는 자신의 절제미를 첫 장면부터 보여준다. 은행 강도와 곧장 이어지는 경찰과의 추격전으로 이루어진 오프닝 시퀀스만 얼핏 보면 이 작품은 과격한 액션 영화다. 하지만 시퀀스를 보다 보면 영화가 예상과 조금씩 다른 길을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영화는 자신을 쫓는 경찰차가 어디에 있는지, 드라이버가 핸들을 어느 방향으로 꺾는지, 차는 어디로 가는지만 보여줄 뿐, 그 외에 슬로 모션이나 화려한 드라이빙 스킬 같은 것은 보여주지 않는다. 시간 약속과 관련해서 자신만의 명확한 규칙을 지니고 그 규칙을 절대 깨지 않는 드라이버처럼, 오프닝 시퀀스의 액션은 기교나 화려함 없이 필요한 장면만 보여주는 절제미가 이 영화의 핵심임을 암시한다.

아이러니한 것은 드라이버의 규칙이 무너지고 그의 계획이 꼬이면서 절제미가 파괴될 때 영화의 액션은 가장 빛난다는 사실이다. 우선 오프닝 이후에 등장하는 이 영화의 액션은 타란티노 감독의 영화를 보는 듯 유혈이 낭자하다. 그러나 타란티노 영화에서는 잔인한 액션에 주로 유머가 가미되어서 충격이 덜한 것과 달리, <드라이브>는 사람 머리가 터지고 칼에 베인 목에서 피가 쏟아지는 장면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이때 언제나 조심스럽고 사려 깊은 남자였던 캐릭터도 돌변한다. 그는 폭력적인 범죄와 액션의 세계에 전혀 위화감 없이 들어선다.

또한 액션에서 볼 수 있는 절제미와 그것의 파괴는 로맨스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영화는 단번에 아이린을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나눠서 보여준다. 드라이버는 아이린을 엘리베이터에서 지나치듯 흘끗 한 번 보고, 엘리베이터 안에서 가볍게 인사하고, 마트에서 우연히 같은 열을 지나며 다시 만난다. 이 때마다 영화는 아이린의 정면 대신 뒷모습, 옆모습, 진열장 너머로 가려진 모습만 보여주며 드라이버의 망설임을 자연스럽게 담아낸다.

하지만 드라이버의 망설임은 그의 절제가 무너지기 때문에 더욱 빛난다. 아이린의 일상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애쓰는 순간 그는 고장 난 그녀의 차를 발견한다. 절제의 미학이 무너지는 이 순간 전형적이고 뻔할 수 있는 로맨스는 영화를 보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운명적인 사랑이야기로 변모한다.

이러한 절제미의 파괴라는 연출적 특징은 전혀 다른 성질의 장면들이 함께 들어설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기도 한다. 엘리베이터에서 드라이버가 그녀에게 키스하고, 동시에 자신과 그녀를 죽이러 온 갱을 무자비하게 처리하는 상반된 분위기의 장면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감정선 안에서 물 흐르듯 이어질 수 있는 이유다. 더 나아가 영화는 절제미를 파괴했다가도 이내 다시 되찾으면서 마치 끓어오를 뿐 완전히 끓지는 않은 독특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실제로 피 튀기는 장면이 수없이 나오는 와중에도 드라이버의 마지막 액션은 가능한 한 피를 보지 않는다. 아이린과 드라이버의 마지막 대화 역시 직접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전화기 너머로 이루어진다. 

한편 자동차를 사랑하는 한 남자의 우연히 만난 여성과의 전형적인 로맨스는 '개구리와 전갈'이라는 오래된 우화를 만나면서 새롭게 재해석될 기회를 잡기도 한다. 이는 드라이버가 범죄나 살인을 저지를 때 입는 흰 점퍼 등에 그려진 전갈을 카메라가 시작부터 끝까지 거듭 포착하는 이유다. 후반부에 드라이버는 자신을 죽이려던 '버니(앨버트 브룩스)'에게 전화해 자신이 이미 그의 동료를 죽였다면서 이렇게 말한다.

"전갈과 개구리가 나오는 우화 알지? 친구는 강을 건너지 못했다." 
  
이 대사는 '개구리와 전갈' 우화를 살짝 비튼 대사다. 우화에서 개구리는 강을 건너려는 전갈을 태워주지만, 전갈은 강을 건너는 사이 개구리의 등에 독침을 쏜다. 왜 독침을 쏘냐고 묻는 개구리에게 전갈은 "그게 내 본성이야"이라고 말하면서 개구리와 함께 강 밑으로 가라앉는다.
 
 영화 <드라이브> 스틸 컷

영화 <드라이브> 스틸 컷 ⓒ (주)풍경소리

 
이때 영화는 전갈을 주인공의 등 위에 위치시키면서 우화의 내용을 살짝 비튼다. 그의 옷이 가질 수 있는 두 가지 의미를 중첩시키는 것이다. 그의 등 위에 전갈이 올라타 있다고 본다면 그는 자신이 태워준 범죄자들에게 찔려서 자신의 삶을 잃고 새로운 도시를 전전하는 개구리다. 반대로 만약 그가 전갈이라면 그의 본성은 범죄이고, 그렇기에 그는 자신과 잠시라도 함께 하거나 사랑하는 이들이 다칠 수밖에 없는 것을 알고 도망 다니는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일까. 드라이버는 사업을 함께 하기로 거래했던, 그러나 이제는 서로를 죽이려고 하는 버니를 만나 그에게 찔리고 또 그를 찌른다. 이렇듯 주인공에게 주어진 개구리 혹은 전갈의 서사는 별다른 설명 없이도 그 자체로서 그의 액션과 로맨스에 개연성과 설득력을 부여하면서 분명 절제하지만 뜨거운 이 영화에 깊이를 더한다.

로맨스 영화나 드라마에서 흔히 접하는 대사 중 하나가 "너 변했어"라는 말이다. 하지만 이 대사는 그다지 적절하지 않은 표현이다. 그는 사랑이 식어서 변한 것이 아니라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얼음이 녹았다가 어는 것처럼 사랑을 할 때 잠시 변했다가 다시 본래의 모습을 찾을 뿐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사람들은 사랑을 낭만적으로 여기지만 동시에 내심 경계하고 두려워한다. 섣불리 다가가지 않으며 망설인다. 사랑에 빠지게 되면 자신이 변하고, 자신의 주변이 변하고, 자신이 원래 달리던 경로에서 벗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망설임을 마주하는 순간, 사실 사람들은 이미 직감한다. 사랑에 빠졌다고. 그래서 우리는 때로 경로에서 벗어나 그 끝을 알 것만 같은 새로운 길을 달린다. <드라이브>는 바로 그 길 위에 서 있는 한 남자, 마치 한 마리의 개구리 혹은 전갈과도 같은 한 남자의 이야기를 잔잔한 격정 안에 담는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원종빈 시민기자의 개인 브런치(https://brunch.co.kr/@potter1113)에 게재한 글입니다
영화리뷰 드라이브 라이언 고슬링 캐리 멀리건 재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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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읽는 하루, KinoDAY의 공간입니다. 서울대학교에서 종교학과 정치경제철학을 공부했고, 지금은 영화와 드라마를 보고, 읽고,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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