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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먼동이 트기 시작한다. 한 달 전 예약한 곰배령(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진동리 소재)을 가기 위해 서둘러 차에 오른다. 도심을 벗어나 달리는 차는 한가롭기 그지없고, 저 멀리 보이는 물안개는 몽환의 세상으로 나를 인도하는 듯하다. 

곧은 도로를 달리다 구불구불 산길로 접어든다. 포장은 잘 되어 있지만, 코너링이 필요한 재미있는 도로가 이어지고, 지나는 집마다 한 폭의 그림이라 감상에 빠지다 보니 어느새 주차장에 도착한다. 생태관리센터 가까운 곳에 주차하고, 차 문을 열자 상쾌한 아침 공기가 폐부 깊숙이 들어와 세포들을 하나하나 깨운다.
 
입구 표지판에 설피마을에 대한 설명이 적혀있다.
▲ 곰배령 입구 표지판 입구 표지판에 설피마을에 대한 설명이 적혀있다.
ⓒ 이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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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를 보니 오전 9시 20분이다. 입산 예약 시간은 10시, 여유가 있다. 주차장 앞쪽에 빨간 이정표가 있어 다가가니 '환영 천상의 화원 곰배령'이라 적혀 있고, 아래에는 설피라고 쓰여있다.

곰배령은 겨울이면 눈이 많이 내려 눈길을 걸으면 무릎 이상 빠져 걷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어른들의 지혜로 '설피'라는 도구를 만들었다. 이것을 신고 다녀야 발이 눈에 빠지지 않고 편하게 걸을 수 있었다. 그래서 이곳을 설피 마을이라고 한다.

기념으로 사진 한 장 찍고 보니 생태관리센터에 벌써 줄이 서기 시작한다. 서둘러 짐을 챙겨 대열에 합류해 차례를 기다렸다. 신분증을 맡기고 입산 허가증을 받고 나니 드디어 출발이 실감 난다.

점봉산 생태관리센터를 지나자 바위를 굽이쳐 흐르는 맑고 시원한 계곡이 나타났다. 바위에 올라 맑은 물 바라보니 산천어 몇 마리가 노니는 모습이 한 폭의 그림을 연상케 한다. 살며시 손 내밀자 겁도 없이 꼬리만 살랑살랑 장난을 친다.

다람쥐 구경, 야생화 구경... 어느새 정상이다 

조금 더 오르니 이정표가 웃으며 반긴다. 등산객을 맞이하는 펜션을 알리는 이정표로, 숙박 예약을 하면 사장님이 차를 태워 이곳까지 데려다준다고 한다. 펜션을 예약하지 않았기 때문에 곰배령 끝 집 방향으로 방향을 정해 나아간다. 조금 더 오르자 쉼터가 나타났다. 도토리묵, 나물 전, 막걸리, 라면 등등 종류대로 진열되어 사람들을 맞이하고, 근심도 해결할 수 있게 해우소도 준비되어 있다.

요깃거리는 나중을 기약하고, 화장실을 들러 다시금 걸음을 재촉하니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나타난다. 다리에서 바라보는 계곡물은 너무도 맑아 달려가 한 모금 마시고 싶은 생각마저 들게 한다. 다리를 건너니 입산 허가증을 검사한다. 왜 이곳에서 검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연이 있지 않나 싶어 조용히 입산 허가증을 제시했다. 검사원은 형식적으로 확인하더니 가도 된다고 한다. 

이제부터가 시작인가 싶어 마음의 준비를 한다. 그런데 가도 가도 평지를 걷듯 고비가 없다. 약간 아쉬워하는 차에 쉬어 갈 수 있도록 의자들을 만든 나무들을 발견한다. 몇몇은 벌써 곰배령을 찍고 내려오다 쉬고 있는 듯 시원하게 물도 마시고 이야기도 하며 즐거운 모습이다.

그곳을 지나쳐 좀 더 가니 즐비해야 할 나무보다도 바닥이 눈에 가깝다. 고개를 들고 보니 오르막이다. 등산의 묘미는 오르막이니 이제부터 시작이다 싶어 열심히 오른다. 숨이 차오르고 땀이 방울 저 떨어질 때쯤 주변엔 산나물들이 지천으로 널려 그들만의 꽃을 피워 자태를 뽐내고 있다. 아직 정상도 아닌데 이곳에 머물다 내려갈까 하는 마음도 든다. 숨이 차니 사진을 찍을 생각도 없이 계속해서 올라간다.
 
곰배령을 오르는 도중 만난 야생 다람쥐
▲ 다람쥐 곰배령을 오르는 도중 만난 야생 다람쥐
ⓒ 이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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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 땅이 움직이는 듯싶어 자세히 보니 다람쥐다. 마실 나왔는지 식사하러 나왔는지 뭔가 바쁘게 움직인다. 이리저리 기웃기웃 왔다 갔다 하더니만 무언가를 입에 물고 나타난다. 바위에 웅크리고 앉아 두 손 입에 대고 볼록한 입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앙증맞은 두 손으로 야물딱지게 잡아 조그만 입으로 오물오물 껍질을 벗기더니 한 입 베어 물어 맛있게 식사를 한다. 다람쥐의 귀여운 행동을 보며 미소가 배어 나온다. 다람쥐와 잠시 놀다 보니 살랑살랑 마파람에 땀을 식히고 다시금 오르다 보니 어느새 정상에 다다른다.

탁 트인 시야에 넓은 광장이 눈에 들어온다. '야생화 군락지'. 이름 모를 야생화들이 빼곡히 자라나고 그들이 다칠세라 가운데로 길을 내어 사람은 즐기고 야생화는 보호하는 상생을 실천한다.

가운데는 곰배령이라는 바위에 새긴 글자를 이고 있는 표지석이 자리하고 있다. 표지석을 지나 오른쪽으로 가자 안내도가 있다. 설악산 대청봉과 점봉산이 바라보이는 이곳 '천상의 화원'이다. 인위적으로 조성하지 않고, 자연이 만들어 더욱 아름다운 곳이다. 이곳은 곰의 배를 닮았다 하여 곰배령이다. 

애환이 서린 고개였던 곰배령 
 
곰배령에 도착하면 바라보이는 전경
▲ 곰배령 정상 곰배령에 도착하면 바라보이는 전경
ⓒ 이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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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이 길을 산행으로, 관광으로 넘고 있지만, 그 옛날 사람들에게는 이곳은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길이었다. 옛날에는 인제에서 콩 자루를 지고 양양에 팔아 그 돈으로 양양에서 소금이나 해산물을 사서 등에 지고 머리에 이고 이 고갯길을 넘어 인제 장날에 물건을 파는 방법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새벽에 곰배령을 넘어 양양에 갔다 설피 마을에 도착하면 날이 저물기 일쑤였다고 한다. 밤길에 넘는 곰배령은 어둠으로 무서워 긴장하지 않고 넘기는 힘들었고, 저 멀리 곰배령 정상에서 누군가 담배 한 대 피워 물면 그 냄새가 십 리를 날라왔다고 한다. 곰배령을 오르는 이에게 '누군가가 있다'는 안심을 주고, 힘을 주었다고 한다. 그렇기에 이 길은 이곳 사람들에게는 삶이요 전쟁터 그 자체였다. 풍광을 즐기는 여유는 없던, 애환이 서린 고개였다. 

한참을 머물면서 천상에 빠져 노닐다가 배꼽시계 알람 소리에 아쉬움 뒤로하고 발길 돌려 내려온다. 한참을 쉬지 않고 내려오니 다시금 만나는 쉼터. 피로도 풀 겸, 요기도 할 겸 테이블에 짐을 푼다. 참나물 전과 도토리묵 한 접시, 막걸리를 주문하니 자글자글 전 굽는 소리에 나도 몰래 침을 삼킨다.

주문 메뉴로 한 상 차려지고, 막걸리 한 사발 부어놓으니 진수성찬 따로 없다. 배고픔에 서둘러 막걸리 한 사발 숨도 쉬지 않고 목젖을 흔들어대니 나오던 땀이 들어가고 피로가 가시는 듯하다. 참나물 맑은 향이 코끝을 간지럽히니 한 젓가락 베어 물고, 탱글탱글 도토리묵은 고소함에 어느새 사라진다. 한참을 쉬어놓고도 모자란 듯 엉덩이는 떨어지기 싫어한다. 억지로 일어나 배낭을 챙겨 주차장으로 내려온다.
 
주차장에서 아래로 내려오면 만나는 계곡. 발을 담그면 시리듯 차가운 물이 피로를 풀어준다.
▲ 계곡 주차장에서 아래로 내려오면 만나는 계곡. 발을 담그면 시리듯 차가운 물이 피로를 풀어준다.
ⓒ 이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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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움에 주차장을 지나 계곡으로 들어선다. 산에서 내려오는 맑은 물에 참지 못하고 신 벗어 발을 담갔다가 화들짝 놀라 물러선다. 뼛속까지 시려오는 찬 기운에 땀이 밴 등짝에도 찬바람이 지나간다. 다시금 발을 담가보니 그래도 참을 만하다.

저 멀리 열목어가 이리저리 노닐고, 버들개 한 떼가 무리 지어 지나가면 어느새 무겁던 발은 새로운 기운이 솟아난다. 짐을 꾸려 차에 싣고 한 바퀴 둘러보니 아직도 해는 머리 위에 밝은 빛을 뿌리고 나뭇가지에 매날린 참새들 재잘재잘 노래를 부른다. 새들의 아름다운 배웅으로 기분마저 날아갈 듯 가벼워진다.

*입산 정보
곰배령은 예약제로 운영되고 있으며, 산림청 홈페이지에서 매일 450명, 마을 대행 예약 450명으로 1일 입산 인원이 제한되어 있다. 예약 시 입산 시간을 지정해야 하는데 하절기(10월 31일까지)에는 9시, 10시, 11시 3회만 입장 가능하다. 곰배령 예약은 매주 수요일 오전 9시 예약할 수 있고, 4주 차까지 예약이 가능하다. 자세한 예약 사항은 산림청 홈페이지(
링크)에서 예약 및 예약 확인할 수 있다.

태그:#곰배령, #설피마을, #다람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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