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2 11:58최종 업데이트 20.09.12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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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점승은 이제 사회복지사, 중독치료전문가로 우뚝 섰다. ⓒ 민병래


문점승은 몸을 일으켜 창 밖을 바라보았다. 언제 병실에 들어왔는지 기억이 없다. 멀리 은행나무는 새벽 찬비 탓인가 마른 가지들이 똑똑 부러진다. 창틀에는 젖은 낙엽 두어 장이 위태롭게 매달려 있다. 그는 여윈 팔을 들어 창문을 열었다. 찬 바람이 날카롭게 맨살을 파고든다. 문점승은 진저리치면서 한 뼘 간격으로 창문을 가로지르는 쇠창살을 만져보았다. 손아귀에 꽉 들어차는 굵기다.

2005년 3월, 문점승은 서울 성동구의 용비교 밑에서 응봉산을 바라보며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응봉산을 뒤덮은 개나리는 술 한 잔이 들어가면 물결쳤고 또 한 잔이 들어가면 날갯짓을 하고 다시 한 잔이 들어가면 커다란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올랐다.


땅을 베개 삼아 하늘을 이불 삼아 거리를 헤맨 지 벌써 몇 해이던가? 다시 문점승은 막걸리병을 땄다. 나비는 하늘 높이 오르며 함께 가자고 문점승에게 손짓을 한다. 나비가 멀어져 어슴푸레 보일 때 문점승은 비틀대며 일어났다. 그때 갑자기 나비가 땅 밑으로 곤두박질쳤다.

이렇게 쓰러진 문점승을 그의 형이 긴급 치료를 받게 한 후 청량리에 있는 한 정신병원에 입원을 시켰다. 폐쇄 병동 신세가 벌써 세 번째다. 문점승이 정신이 들어 병실 창살을 만졌을 때는, 정신을 잃은 지 6개월이나 지난 가을날 어느 아침이었다.

아내가 떠나가고 노숙계에 입문하다

"'너네 아빠 술 취해서 길거리에서 잔다'고 애들이 놀릴 때 창피했어요. 아빠는 술 먹으면 동네 강아지들하고 싸워서 엄마랑 같이 끌고 올 때가 많았어요. 아빠가 술 먹고 일도 안 나가서 엄마가 여관에 다니며 청소를 했어요. 엄마 도와주려고 주유소에도 가보고 신문 배달도 하려고 했는데 어려서 안 된다고 해 속상했어요."

판사의 물음에 아들은 또박또박 대답했다. 문점승은 초등학교 5학년 아들이 하는 얘기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저 녀석이 저렇게 말을 야무지게 했나? 지 엄마가 시켰나?" 돌아보니 아내는 그저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2003년, 이혼 소송에 출두하라는 마지막 통보를 받고 나간 법정에서 아들의 증언은 판사의 마음을 움직였다. 법정을 나서니 어느새 아들과 애 엄마는 종종 걸음으로 멀어져갔다.

경남 진주가 고향인 문점승은 중학교 때 풋술을 배워 술꼬가 터진 인생을 살았다. 가을 추수 때 문점승의 아버지는 벼 베기를 마치고 막걸리를 사발에 철철 넘치게 따라 한 잔을 마셨다. 벌컥벌컥 들이키니 막걸리는 입술 옆으로 흘러내렸고 아버지는 '캬' 하며 손등으로 입술을 훔쳤다. 논두렁에서 일손을 돕던 문점승에게 그 모습은 눈이 부시게 다가왔다.

이웃집 수확을 도와주러 아버지가 걸음을 옮기자 문점승은 막걸리를 한 대접 그득 따라 한 모금씩 마셨다. 한 번도 쉬지 않고 들이키니 멀리 아버지의 뒷모습이 기우뚱거렸고 나중에는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했다. 그가 깨어난 곳은 다음 날 아침, 집이었다.

진주중학교 운동장에 모여 입대를 하는 날, 친구들은 기차로 갔지만 그는 술에 곯아 떨어져 다음 날 혼자 헌병대 지프차를 타고 춘천에 있는 103 보충대에 들어갔다. 입대하는 날부터 관심 사병이 되었고 제대할 때는 승리부대 15사단의 꼴통이 되었다.

1988년 결혼해서 제주도로 신혼여행 간 날, 군대 선임을 만나 밤새 술을 먹고 그를 끌고 아내가 있는 여관방에 들어가 잠을 자기도 했다. 성수동에 신접살림을 차리고 그는 술독에 빠져 살았다. 성수동 작은 공장에서 밀링이나 선반으로 쇠를 깍던 그는 점심에 반주로 시작해 야근이 끝나면 세 병이고 네 병이고 끝이 없이 마셨다.

문점승이 술에 취해 골목길에 들어서면 동네 강아지들이 몰려나와 으르렁거렸다. 뚝섬에서 원정 온 개도 있었다. 문정승은 발로 내지르고 소리 지르다 제풀에 지쳐 길거리에 누워 잠들었다. 아내와 아들이 "동네 창피하다"고 끌어다 집에 눕힌 게 부지기수, 다음 날은 해장술을 먹는다고 회사를 안 나갔다. 98년 아내는 지친 나머지 애들을 데리고 떠나버렸다. 

아내가 떠나간 후, 그는 술 한 병을 옆에 차고 아침이면 성수동을 출발, 중랑천과 뚝섬 일대를 돌아다녔다. 어느 날은 서울역까지 진출했다. 그곳에서 노숙인들과 오랜 벗을 만난 듯 술잔을 나누었다. 이름도 알 필요 없고 나이도 상관없고 서울역에 온 연유도 묻지 않고, 단지 술을 주고받고 취하면 쓰러져 자는 '노숙계', 그는 기꺼이 입문했다. 성수동에 방은 그대로 있었지만 빈 집에서 혼자 먹는 술은 맛이 없어 서울역에 아예 둥지를 틀었다.

그렇게 몇 해를 보내니 쉰도 안 된 그에게 간경화와 황달, 알코올성 당뇨에 조울증이 찾아왔다. 복수까지 차올라 어느 날은 술병을 꺼내려 진열장을 열다가 쓰러지기도 했다.

노숙인을 위한 성프란시스 대학에 입학하다

"문점승씨, 성프란시스대학에 한 번 들어가 볼래요?"
"네, 그게 뭔데요?"
"노숙인 다시서기센터장 임영인 신부님이 노숙인을 위해 만든 인문학학교예요."


문점승은 용비교에서 쓰러져 입원했던 청량리 정신과병원에서 은인을 만났다. 그는 대학교수였다가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학교에서 쫓겨나고 폐쇄병동에까지 입원했던 인물이다. 나중에 재활에 성공한 후, 알코올중독 환자를 위해 살겠다고 중독치료 상담사가 되었다.

문점승은 그의 손에 이끌려 '단주모임'에 참여했고 처음으로 "다시 태어나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그의 권유로 정신병원에서 퇴원 후 알코올중독자 재활시설 '감나무집'에 입소, 공동체생활을 하던 중에 감나무집 소장으로부터 '성프란시스대학' 입학을 권유받은 것이다.
 

성프란시스대학 4기 졸업식 때 문점승. ⓒ 문점승


문점승은 2008년 4기로 입학했다. 수업 첫날 그는 입학 동기생들과 "인문학이 밥이 되냐 돈이 되냐"를 놓고 열띠게 얘기를 나눴다. 첫 수업을 마치고 서울역에서 연남동 '감나무집'으로 돌아갈 때 지하철에서 '예술사교재'를 펼쳤다. 승객들 시선이 쏠리고 발음이 어려웠지만 '알타미라 동굴벽화'라고 또박또박 읽었다.

그리고 철학 교재 '소크라테스 국가론'을 꺼냈다. 무슨 소린지 모르지만 첫 장을 크게 읽었다. 승객들 시선이 더욱 쏠렸다. "내가 대학에 다니다니... 야간고등학교 졸업장을 겨우 받은 내가..." 그는 '국가론'을 큰 목소리로 읽다가 그만 내려야 할 홍대입구역을 지나치고 말았다.

문점승은 박경장 교수와 함께 하는 글쓰기 수업을 좋아했다. 초등학교 이래 처음 하는 작문이었다. 살아온 얘기를 적어보니 술 얘기가 전부다. 한 줄 한 줄 써가니, 신혼 첫날 여관방에서 밤새 자신을 기다렸던 아내 얼굴과 98년 아내가 떠나가면서 남긴 편지가 생각났다. 한 장을 다 채우니 이혼 법정을 울린 아들의 목소리가 되살아나고 두 장을 마저 채우니 눈물, 콧물이 종이에 번져 간다.

문점승은 "나는 알코올 중독 노숙인이다. 극복하고 새 삶을 살겠다"고 쓴 글을 기꺼이 발표했다. 다른 노숙인들도 살아온 얘기를 털어놨다. 문점승은 박수를 쳤고 박수를 받았다. 태어나 처음 하는 발표, 처음 받아보는 박수, 내게도 칭찬해주는 친구와 학우들이 있다니! 심지어 교수님까지 '잘했다'고 격려를 해줬다. 그때 응봉산에서 봤던 개나리 물결, 거대한 나비가 되던 그 물결이 떠올랐다. 아! 내가 나비가 되려는가? 

성프란시스대학 풍물패 '두드림'에도 가입했다. 일주일에 한 번 천호동에 있는 향린교회에 가서 유은하, 유은진 두 선생에게 배웠다. 북을 두드리면 술 한 병씩이 게워지는 느낌이었다. 이 북을 얼마나 치고 꽹과리를 얼마나 두드려야 술로 흘려보낸 시간을 되살릴 수 있을까? 그는 치고 또 쳤다. 서울역광장에서 '두드림'이 노숙인을 위해 펼친 풍물공연에서 그는 북채를 높이 들고 마냥 뛰었다. 이날 맑은 땀방울이 등 뒤에서 샘처럼 솟았다. 
 

2008년 서울역에서 있었던 "세상에 희망을 전하다"는 문예한마당에서 '두드림'의 풍물공연. 가운데가 문점승. ⓒ 문점승


감나무집을 나와 홀로 서다

성프란시스대학을 마치고 그는 감나무집에서 나와 홀로서기를 시작했다. 2009년 인천 동수역 근처에 쪽방을 얻었다. 혼자 살면서도 '단주'를 할 수 있다는 자존감이 생겼다. 그동안 잔잔한 유혹은 하루에도 몇 번씩 오고 갔다. 그래도 청량리 정신과병원에서 퇴원한 이래 4년간 한 모금도 술을 안 댔다.

그런데 이 쪽방에서 위기가 찾아왔다. 2008년 인문학 과정을 다닐 때 '성프란시스대학' 교수님들 권유로 요양보호사, 중독치료 전문가 자격증을 땄다. 또 사이버대학에서 2년간 사회복지학을 공부해 전문학사가 되었다. 2009년에는 사회복지사 1급 자격증을 땄다. 네 번 떨어지고 다섯 번 도전 끝에 이룬 결실이었다. 교수님들과 4기 동기생들이 격려해 준 덕분이다.

하지만 많은 자격증에도 불구하고 취직이 안 되었다. 이력서를 마흔 군데 넘게 넣었지만 "나중에 전화 드릴게요, 역경을 딛고 일어서셨네요"라는 말이 전부였다. 알코올상담센터나 중독통합센터의 시설장들이 대부분 사십 대들이니 오십 대에 접어든 문점승을 쓰는 게 쉽지는 않을 터였다. 수입은 기초생활수급자로서 받는 14만 원과 다시서기센터에서 3시간 아르바이트로 받는 돈이 전부여서 방세 내기도 바빴다.

이런 상황에서 어느 날 우울증이 찾아왔다. "나는 결국 안 되는 놈인가?" 하는 체념이 온몸을 휘감으며 눈앞에서 술병이 어른거렸다. 딱 한잔, 정말 한잔만으로 이 마음을 달래고 싶었다. 어두컴컴한 쪽방에서 불도 안 켠 채로 몇 시간을 씨름했다. 소주를 넘길 때 나는 '캬' 소리, '콸콸콸' 막걸리가 쏟아지는 소리, 맥주병을 따는 '쉭' 소리가 방안에 떠다녔다. 눈에는 응봉산의 나비가 어른거렸다.

허벅지를 찌르고 자기 뺨을 갈기며 버티던 문점승은 단주모임으로 자신을 이끌었던 사회복지사에게 황급히 전화를 걸었다. 그는 전화를 받자마자 "술 마셨어?"하고 문점승에게 물었다. "아직"이라는 대답에 "잘했어, 한 방울도 안 되는 거 알지?"하며 당장 만나자고 했다. 그의 손에 이끌려 인천 제물포병원에 입원했다. 삼일 정도 지나서야 다소 안정을 찾았다.

아빠 집으로 가요, 엄마하고 동생이 있는 집으로
 

소양호에서 만난 문점승 그는 춘천 예현병원에서 사회복지사로 일을 한다. ⓒ 민병래


"아빠, 나예요. 아빠 집 옆에 놀이터 있죠? 거기로 잠깐 나오세요."

취직이 여의치 않는 문점승에게 다시서기센터에서 공공근로를 알선해주었다. 서울역 노숙인 상담업무였다. 하루 8시간 근무하고 어느 정도 급여를 받았다. 2012년에는 연남동에 있는 방 두 칸짜리 노숙인 자활 주택에 입주했다.

덕분에 다소 안정된 생활을 이어가던 어느 날 밤, 뜻하지 않게 아들의 전화가 걸려왔다. 2003년 이혼 법정에서 본 이래 한 번도 보지 못하고 통화도 못한 아들이다. 내가 여기 사는 건 어떻게 알았을까? 무슨 까닭에 이 밤에 왔을까? 문점승은 서둘러 나갔다.

십여 년 만에 보는 아들, 가로등을 등지고 있어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의젓한 청년의 풍채였다. 다가가니 녀석은 담배를 비벼끄고 술 냄새를 풍기며 대뜸 말했다.

"아빠, 나 결혼해요. 엄마랑 동생이랑 외할머니네 근처 화천에서 살고 있으니 같이 가요. 갈래요? 안 갈래요?"

공원 벤치에서 아들은 소주를 마시고 문점승은 담배를 피며 밤새 얘기를 나눴다. 엄마는 화천에서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 그 일을 하고 있고, 자기는 중학교 때 엄마랑 헤어져 친구 집에서 대학 때까지 얹혀살았고, 동생은 간호대학에 들어갔고, 외할머니가 학비를 대 주셨고... 끝없는 얘기가 이어졌다.

10월의 쌀쌀한 밤공기가 느껴질 때 어디선가 조막만 한 길고양이 한 마리가 다가와 문점승의 허벅지에 파고들었다. 가로등이 깜박 졸고 새벽 별도 아슴해질 때 문점승과 아들은 손을 잡고 일어섰다. 해장라면을 끓여 먹고 함께 짐을 쌌다. 이불 한 채, 옷 몇 가지, 거리에서 주워 온 책상, 전기밥솥, 성프란시스대학 교재, 글쓰기 노트, 트럭 한 대분도 안 되는 살림살이였다. 
   
얼큰한 순댓국에 친구들과 소주 한 잔 할 거야

화천에 가서 가족과 재회한 후 문점승은 다행히 춘천 예현병원에 취직이 되었다. 삼백 병상이 넘고 상주 의사가 여섯 명인 제법 큰 요양병원이다. 벌써 6년째 근무하고 있다. 

이곳에도 알코올중독증 환자들이 있다. 이들이 탈출해서 병원 뒷산을 넘어가면 찾느라고 여간 애를 먹는 게 아니다. 서울역에서 공공근로를 할 때, 거리에 있는 알코올 중독자들을 상담해서 치료센터에 들여보내는 일을 했다. 입소시키고 서울역으로 돌아오면 그들이 자신보다 먼저 와 있는 모습을 여러 번 목격했다. 이들 중독자들은 자신이 환자임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받아들여도 탈출을 시도한다. 겨울에 눈 속으로 맨발인 채 도망 나간 환자까지 있었을 정도니...

문점승은 2005년부터 16년째 단주중이다. 본인이 중독을 겪었기에 문점승이 이들을 대하는 태도는 각별하다. 자신이 재활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성프란시스대학 교수들에게 받은 것처럼 그들을 격려하고 다독인다. 즐겁지만 고되기도 하다. 병원에서 힘들었던 날은 퇴근 무렵에 소주병이 삼삼하게 눈앞에 어른거린다. 목젖은 스스로 꼴깍꼴깍한다. 묘하게도 이런 날은 어김없이 딸에게서 전화가 온다.

"아빠 나 오늘 저녁 먹고 가. 엄마한테 잘 말해줘. 얼큰한 순댓국에 친구들하고 소주 한잔 할 거야. 아빠는 안 되는 거 알지. 집에 가서 엄마하고 밥만 맛있게 먹어!"

이쁜 딸이 웬수같은 말만 골라서 한다.
그래도 달콤하다.
 

예현병원 앞에서 문점승 그는 이곳에서 사회복지사로 일한다. ⓒ 민병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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