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3 11:06최종 업데이트 20.09.13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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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왕이 신라왕을 겸할 뻔한 시기가 있었다. 이것이 이론상 가능했던 시기가 있었다. 신라 진평왕 때가 바로 그때다.

신라 왕위 계승의 원칙적 형태는 왕자의 승계를 포함해 두 가지였다. 제2대 남해왕(남해차차웅)의 유언에서 그 두 가지가 언급됐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남해왕은 '내가 죽은 뒤에는 아들과 사위를 막론하고 나이 많고 어진 사람이 자리를 잇게 하라'라고 유언했다.


그에 따라 신라 왕실은 사위를 아들과 똑같이 대우했다. 또 양자 역시 친자처럼 대했다. 이로 인해 혜택을 입은 이들이 석탈해와 김알지의 후손들이다. 석탈해와 그 후손들은 사위와 사위의 자손 자격으로, 김알지의 후손들은 양자의 자손 자격으로 박씨 왕실의 대통을 승계했다.

박씨 왕실은 근친혼을 유지할 정도로 외부인에 대해 폐쇄적이었다. 이는 왕실 혈통에 다른 피가 섞이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런 박씨 왕실이 석씨·김씨를 가족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들이 새로운 세력을 이끌고 도래한 외부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을 힘으로 밀어낼 수 있었다면 남해왕의 유언이 나올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강력한 도래인 세력과 충돌하지 않고 왕권을 이어나가기 위한 부득이한 선택이었다고 볼 수 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위작 논란이 있는 필사본 <화랑세기>를 종합해 보면, 진평왕한테는 딸만 셋이 있었다. 천명공주·선화공주와 더불어 덕만공주(선덕여왕)가 바로 그들이다. 딸만 셋이었다고 해서 곧바로 후계 구도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딸한테 왕위를 물려줄 수도 있고, 사위한테 왕권을 넘길 수도 있었다.

세 딸 중에서 덕만을 제외한 두 공주는 결혼을 했다. 천명공주가 낳은 아들이 태종무열왕 김춘추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는 김춘추의 아버지가 김용춘이라고 한 반면, <화랑세기>에서는 김용춘의 형인 김용수가 아버지라고 했다. 따라서 <삼국사기>에 따르면 김용춘이 진평왕의 사위로서 왕위를 승계할 수 있었고, <화랑세기>에 따르면 김용수가 승계할 수 있었다.

김춘추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헷갈리게 된 것은, <화랑세기>에 따르면 천명공주가 두 당숙인 김용수·김용춘과 함께 살았기 때문이다. 이 중 김용수는 천명공주에게 당숙이자 남편이었다. 이 책의 제13대 풍월주 김용춘 편에 따르면, 천명은 공식적으로는 김용수와 결혼했지만 실질적으로는 김용춘과 시간을 더 많이 보냈다. 또 고백도 김용춘에게 했다. "첩이 본래 사모한 사람은 당신"이라는 고백을 받은 쪽은 김용춘이다.

김용춘과 무왕은 동서지간

김용수·김용춘 중에서 진평왕이 관심을 보인 쪽은 김용춘이다. <삼국사기>나 <화랑세기>에 따르면 진평왕은 김용춘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또 <화랑세기>에 의하면, 훗날 진평왕은 덕만공주를 후계자로 정할 때도 김용춘을 그 옆에 붙였다. 그래서 진평왕의 후계자로는 김용수보다 김용춘이 더 유리했다.

선화공주 역시 남편이 있었다. 그의 남편은 서동요의 주인공인 백제 무왕이다. 무왕은 왕자 시절에 선화공주와 결혼하고자 서라벌에 잠입해 아이들에게 뇌물을 주고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사귀어 맛둥 도련님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라는 민요를 퍼트렸다. 무왕은 결국 결혼에 성공했다.

바로 이 무왕도 진평왕의 사위이므로 남해왕의 유언에 따라 왕위계승권을 갖고 있었다. 무왕은 백제 왕위뿐 아니라 신라 왕위도 계승할 자격이 있었던 것이다.
 

선화공주와 무왕의 사연을 담고 있는 충남 부여군의 궁남지. ⓒ 김종성

 
딸만 있는 A재벌그룹과 아들이 있는 B재벌그룹 간에 결혼이 이뤄지면, A의 딸이 A그룹을 승계할 수도 있지만 B의 아들이 A그룹을 승계할 수도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B의 아들이 A·B 두 그룹을 다 승계할 수도 있다.

이런 일이 과거의 왕조시대에도 종종 있었다. 국제법학에서는 이런 나라를 '인적 동군연합(人的 同君聯合)'이라고 부른다. 1996년 발행된 이병조·이중범의 <국제법 신강>은 인적 동군연합을 "왕위계승법 등의 규정에 의하여 복수의 국가가 우연히 동일 군주를 추대하게 되나, 이들 국가 사이에는 전혀 법적 결합관계가 없으며 국제관계에서 개별의 독립국으로 행동하는 복합국가"라고 정의한다.

그런 뒤 1714~1838년의 영국과 하노버, 1815~1890년의 네덜란드와 룩셈부르크, 1855~1908년의 벨기에와 콩고자유국이 인적 동군연합으로 묶였다고 예시한다. 만약 무왕이 진평왕을 이어 신라 왕위까지 계승했다면, 백제와 신라도 인적 동군연합과 비슷해졌을 것이다.

진평왕의 사위가 신라 왕실에도 있고 백제 왕실에도 있는 당시의 상황은 두 왕실의 긴장 관계를 조성했다. 백제 왕족과 신라 왕족이 동서지간이 됐으므로 양국관계가 편안해야 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왕자 시절에 선화공주와 결혼한 백제 무왕이 등극한 뒤로는 양국관계가 매우 거칠어졌다.

백제 성왕이 신라 진흥왕과 동맹해 고구려로부터 한강 유역을 탈환했다가 진흥왕의 배신으로 한강 유역도 잃고 자기 목숨도 잃은 뒤에, 성왕의 장남인 위덕왕(재위 554~598)이 577년에 보복전쟁에 나섰다가 실패하고 도리어 궁지에 빠진 일이 있었다.

그 후 백제와 신라는 장기간의 대치 국면에 들어갔다. 긴장감이 흘렀지만, 별다른 충돌은 없었다. 선화공주와 무왕의 러브스토리가 등장한 것은 이 시기였다.
 

궁남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그런데 이런 평화 혹은 소강 국면을 깬 것은 무왕의 즉위다. 신라 왕실의 사위가 즉위한 뒤부터 신라에 대한 백제의 공격이 본격화됐다. 이렇게 된 이유를 역사학자 신채호의 <조선상고사>는 무왕과 김용춘의 경쟁의식에서 찾는다. 신채호는 이들의 주도 하에 벌어진 양국 전쟁을 '동서(同壻) 전쟁'으로 명명한다.

무왕 즉위 3년차인 602년, 무왕이 신라 아막성(전북 남원)을 공격했다. 이것은 양국이 전쟁 국면에 돌입하는 신호탄이었다. <조선상고사>는 무왕이 이렇게 한 것은 김용춘을 압박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한다.
 
"그는 즉위 후에 김용춘을 죽이기 위해 병력을 동원하여 신라를 쳤다. 김용춘은 처음에는 뒤에 숨어 진평왕의 진영에서 참모 역할을 하다가 나중에는 내성사신(궁궐 사무 관장)으로 대장군을 겸직하고 전쟁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로 인해 상호 간의 악전고투가 거의 매년 벌어지니 이것이 이른바 동서전쟁이다."
 
양국관계가 험악해졌다는 점은 전쟁의 발발 횟수뿐 아니라 신라 사회의 분위기에서도 감지된다. 유독 이 시기 신라에서는 전쟁과 관련된 영웅들이 많이 배출됐다. 진평왕 때 자기 아버지를 대신해 전쟁에 나간 동네 청년 가실(嘉實)과의 약혼을 끝까지 지킨 설씨 여성(설씨녀), 백제와의 전투에서 용감히 싸우다가 전사한 귀산·찬덕·해론·눌최 같은 신라 무사들이 영웅으로 부각됐다.

신라에서 영웅이 많이 나온 것은 백제군의 전력이 우세해진 상황에서 신라인들이 극력을 다해 싸웠기 때문이다. 전쟁에 이겨서 영웅이 된 게 아니라 장렬하게 전사했기 때문에 영웅이 된 것이었다. 신라군이 처절하게 싸웠다는 것은 상대편인 백제군도 극력을 다해 전투에 임했음을 뜻한다. 분위기가 이렇게 험악해진 이유에 관해 신채호는 무왕과 김용춘을 거론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두 사람의 탐욕적인 이기주의의 충돌에 불과했지만, 그들은 국가와 민족의 흥망을 위한 일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국내의 민심을 자극했다. 또 죽기를 각오하는 무사들을 끌어들이고자 명예와 작록(爵祿, 벼슬과 녹봉)을 앞세웠다. 그래서 한편에는 비애로 슬피 우는 인민들이 있고, 한편에는 공명에 춤추는 장수와 병사들이 적지 않았다."
 
동서 전쟁에서 공격성을 더 많이 보인 쪽은 무왕이다. 이 상황을 발판으로 무왕의 아들인 의자왕은 신라를 상대로 군사적 우위를 점했다. 김유신이라는 명장으로 인해 이따금 신라가 승리하기는 했지만, 660년에 당나라군이 신라군과 연합작전을 벌이기까지는 백제가 대체로 우세를 잡았다.

하지만 무왕과 김용춘의 대결이 무왕의 승리로 끝나지는 않았다. 무왕은 '인적 동군연합'의 군주가 되지 못했다. 신라 왕위는 선덕여왕의 차지가 됐다. <화랑세기>에 따르면, 선덕여왕의 등극으로 입지가 강해진 쪽은 김용춘이다. 김용춘도 완전한 승리를 거뒀다고는 볼 수 없지만, 적어도 신라 왕권과 관련해서는 무왕보다 훨씬 많은 수확을 거뒀다.

백제 사위 자극하지 않으려는 고육책

신채호는 진평왕이 김용춘을 택할 수 있었는데도 선덕여왕을 택한 이유와 관련하여 "덕만 즉 선덕대왕을 불러 왕태녀(王太女)로 삼고 김용춘을 중용하여 장래 명목상 권위는 선덕에게 있을지라도 실권은 김용춘에게 있도록 했을 것"이라며 "덕만에게 왕위를 준 것은 물론 서동의 감정을 자극하기 않기 위해서였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사위 김용춘에게 왕위를 넘기면 또 다른 사위인 무왕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진평왕이 선덕여왕을 선택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진평왕의 조치는 김용춘이 왕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하되 무왕을 자극하지 않는 절충적인 방식이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이 대결은 불완전하나마 김용춘의 승리로 끝났다. 김용춘은 직접 집권하지는 못했지만 선덕여왕의 배후에서 국정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또 김용춘의 아들 혹은 조카인 김춘추가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을 뒤이어 신라 왕통을 차지했다. 이런 면에서도 김용춘이 승리했다고 볼 수 있다.

신라 왕실은 석탈해·김알지 같은 외부세력에 대해서는 사위나 양자로 들이고 왕위계승권을 준 반면, 백제 무왕에 대해서는 사위로는 받아들이되 그 이상의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 이는 당시의 신라가 비록 열세나마 백제 군사력에 맞설 역량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석씨·김씨가 얻은 성과를 부여씨가 얻지 못한 것은 그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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