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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권변호사 시절의 노무현
 인권변호사 시절의 노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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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탄핵소추안 가결 날

2004년 3월 12일은 국회에서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통과된 날이다. 그날 나는 백범 암살범 안두희를 10여 년간 끈질기게 추적한 권중희 선생과 함께 미국 워싱턴D.C. 근교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재미동포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으로 암살 배후 문건을 찾다가 귀국하는 날이었다. 우리 두 사람이 미국에 머무는 40여 일 동안 재미동포 자원봉사자들은 그림자처럼 따르면서 영어가 서툰 우리의 불편함을 보살펴줬다.

그날 아침도 그들은 우리 숙소에까지 와서 공항까지 배웅했는데 평소와 달리 눈자위가 벌겋고 눈물을 글썽였다. 간밤에 고국에서 날아온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데 대한 울분 때문이라고 했다. 그날 저녁 그곳 동부의 동포들이 노무현 탄핵소추 반대 시위를 연다고 했다. 우리는 비행기 표 예약으로 참석할 수 없었다.

그날 우리 두 사람은 워싱턴을 떠나 5시간(시차로 3시간) 뒤 로스앤젤레스 국제공항에 닿았다. 그곳까지 마중 나온 LA동포들도 한결같이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 통과에 대한 울분을 토했다. 다음날 그곳 LA동포들이 탄핵 저지 대책 간담회를 베푼 바, 그 회의에 참석했다.

왜 고국을 떠나 미주에 있는 동포들조차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에 비분강개를 금치 못했을까. 나는 그 대답을 한 재미 언론인(진천규 미주 한국일보 기자)에게 물었다. 그의 대답이었다.

"역사의 후퇴로 반통일 세력들의 농간에 놀아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노무현, 그는 세상을 바꾸려고 했다. 하지만 두터운 기득권층의 완강한 반대로 마침내 대통령직까지도 위협을 받고 있었다. 그러자 국내외 진보 및 뜻있는 젊은 세대들이 그를 보호하고자 나선 것이다.
  
 LA 동포들이 간담회를 마친 뒤 '우리의 소원'을 합창하고 있다.
 LA 동포들이 간담회를 마친 뒤 "우리의 소원"을 합창하고 있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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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림사건'

노무현 변호사가 인권변호사 '노변'으로 변신한 이야기를 그의 고백 에세이집 <여보, 나 좀 도와줘>에서 들어본다.
'부림사건'은 내가 재야 운동에 뛰어들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다. 그리고 내 삶에서의 가장 큰 전환점이기도 했다. (중략) 부림사건에는 사실 '사건'이 없다. 무슨 저항의 움직임이 구체적으로 있었던 것이 아니라 억지로 엮어낸 조작된 사건이었다. 1979년에 이흥록 변호사가 양서조합을 만들었는데, 그 회원들이 대부분 잡혀 들어갔던 것이 전부이다.

내가 그 사건의 변론을 맡게 된 것은 이흥록 변호사의 응원 요청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검사가 김광일 변호사를 그 사건에 함께 엮겠다고 협박하는 바람에 김 변호사가 그 사건을 변론할 수 없어 손이 모자란다는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 나는 사건의 내용이나 성격을 파악하기는커녕 시국에 대한 최소한의 인식도 가지고 있지를 못했다. 그럼에도 선뜻 변론에 나선 것은 무엇이든 두려워하지 않고 피하지 않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데 막상 '부림사건'의 내용을 파악해 보니 이건 너무나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무 것도 아닌 책들, 예를 들어 <전환시대의 논리>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우상과 이성> 같은 책을 읽었다는 게 죄가 되었다.

돌잔치에 모인 몇 사람이 정부를 비판한 몇 마디는 정권 전복 기도로 둔갑했다. 탁구장에서 탁구를 치며 한 얘기, 여름철 계곡에서 놀며 한 얘기, 두 사람이 다방에서 한 얘기까지 모두 불법집회요, 계엄 포고령 위반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붙잡혀 들어간 사람 중 한 젊은이를 교도소에서 접견을 하게 되었다. 그는 57일간이나 경찰에 구금되어 매 맞고, 조사받고, 통닭구이 등 온갖 고문을 당했다. 그러나 그 학생의 가족들은 전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걸개그림 속의 노무현
 걸개그림 속의 노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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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어머니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행방불명되자 문득 3.15 부정선거 때 마산 앞바다에서 시체로 떠오른 김주열이 떠올라, 부산 영도다리 아래에서부터 동래산성 풀밭까지 아들의 시체를 찾겠다며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온 부산 시내를 헤매고 다녔다는 것이다. 그 학생을 내가 처음 접견했을 때 그는 경찰의 치료를 받아 고문으로 인한 상처의 흔적을 거의 지운 후라고 했다.

얼마나 고문을 당하고 충격을 받았는지 처음에는 변호사인 나조차도 믿으려 하질 않았다. 공포에 질린 눈으로 슬금슬금 눈치를 살피는 것이었다. 한창 피어나야 할 젊은이의 그 처참한 모습이란...

눈앞이 캄캄해졌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상상조차 해 본 일이 없는 그 모습에 기가 꽉 막혔다. 분노로 인해 머릿속이 헝클어지고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다. 도저히 스스로 걷잡을 수 없을 만큼 큰 충격이었다.

정말 이것만은 세상에 꼭 폭로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져 먹고 변론을 시작했다. 통닭구이 등의 고문과 무수한 매질, 접견은커녕 집으로 연락조차 없었던 일, 아들을 찾아나선 그 어머니의 처참했던 심경 등을 낱낱이 적어 법정에서 따져 물었다. 방청석은 울음바다가 되었다. - <여보, 나 좀 도와줘> 209~211쪽 축약

 
  
 평소의 노무현
 평소의 노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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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지탄(風樹之嘆)

여기까지 책을 보면서 키보드를 두들기던 나는 그 시절 부산에서 있었던 아버지의 사건이 떠올라 참회의 눈물을 훔쳤다(관련 기사 : "시뻘건 난로를 뒤집어쓰고 싶더라", 2004.09.16.)

나무는 고요히 머물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은 봉양하고자 하나 부모님은 기다려 주시지 않네.
한번 흘러가면 쫓아갈 수 없는 것이 세월이요
가시면 다시 볼 수 없는 것은 부모님이시네.


풍수지탄(風樹之嘆)의 고사를 뒤늦게 읊조리지만 이미 다 흘러간 옛날이야기다. 다시 노무현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본다.
 
'부림사건'은 내게 있어 또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때까지 나는 독재와 고문에 대해서만 분개해 왔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부림사건이 진행되고 있는 와중에도 학생들은 나에게 독점자본에 의한 노동 착취와 빈부 격차의 모순 같은 문제를 이해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읽다가 붙잡혀 온 책들을 읽기를 권했다. 바쁜 데다가 경황이 없어 잘 읽히지 않았다.

(중략) 그러나 나는 그때 그들로부터 많은 감명을 받았다. 그리고 그들의 관심사에 관해서도 차츰 눈을 뜨게 되었다. 훗날 그들이 석방되어 나올 때쯤에는 나도 꽤 많은 책을 읽고 있었으나, 그 보다는 그들의 순수한 열정과 성실함이 나를 운동으로 끌어들인 것 같다. - <여보, 나 좀 도와줘> 213쪽 축약

 

덧붙이는 글 | * 이 기사는 노무현 고백 에세이 <여보, 나 좀 도와줘> 외 여러 문헌과 당시의 신문보도 등을 종합 참고하여 쓴 기사임을 밝힙니다.


태그:#노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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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 교사생활 후 원주에서 지내고 있다. 장편소설 <허형식 장군> <약속> <용서>, 역사다큐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사진집<지울수 없는 이미지> <한국전쟁 Ⅱ> <일제강점기> <개화기와 대한제국> <미군정 3년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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