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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려지지 않은 맨우리말 중에 참 말맛이 좋으면서도 실용적인 것들이 많습니다. 우리말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사용되고 사랑받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낱말과 그에 얽힌 에피소드를 버무려봅니다. [편집자말]
이 초등학교도 큰비에 잠겼었다. 그후 아이들은 전염병에 걸려 학교에 잘 오지 않았다.
▲ 캄보디아 끄라쩨의 끄로꼬 초등학교 교실 이 초등학교도 큰비에 잠겼었다. 그후 아이들은 전염병에 걸려 학교에 잘 오지 않았다.
ⓒ 김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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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54일, 역대 최장이라는 기록을 남기고 장마가 끝났다. 살면서 한국에서 이렇게 많은 비를 본 적은 없었다. 구름이 껴도 비가 오고, 해가 나도 비가 오고, 비가 다 떨어졌을 것 같은데도 비가 왔다. 십 년 전 캄보디아에서 생활하던 2년 간, 파견봉사 동기들끼리는 그런 말을 자주 했다.

"이 비를 한국 사람들이 보면 얼마나 놀랄까?"

우기에 한번 스콜이 쏟아지면 길에 허벅지 높이까지 물이 차는 건 당연했다. 나는 수도에 살았지만 중심가의 4차선 도로에도 물이 찼다. 캄보디아 아이들은 신이 나서 뛰어들었다. 온갖 것들이 섞여있을, 커피처럼 탁한 흙탕물에서 아이들은 발가벗고 물장구를 쳤다.

수도가 아닌 시골마을은 한 번 큰비가 왔다 하면 마을의 반 이상이 잠기는 일이 다반사였다. 아름드리 야자수들이 다 쓰러지고 나무집은 썩어 들어갔다. 2층에 세 들어 살던 파견동기 H는 1층이 물에 잠겨 몇 주 동안이나 집 안에 갇혀 있었다. 메콩 강의 돌고래가 유명한 마을이었다. 피할 곳이 없었던 사람들의 차가운 몸은 돌고래처럼 수면을 떠돌았다고 했다.

H가 가르치던 학생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어디서 구한 스티로폼을 타고 와서는, 천진난만한 얼굴로 선생님도 같이 수영하자며 졸랐다고. 동기를 구조하러 오는 사람은 없었고, 결국 물이 다 빠지고서야 집 밖에 나갈 수 있었다. 그후 아이들은 알 수 없는 전염병에 걸려 피부가 엉망진창이 되었고, 출석부에는 자꾸 빨간줄이 그어졌다고 한다.

"꼭 우기 같아."

2020년 여름 우리는 단톡방에서 그런 대화를 나누었다. 도로를 달리다 눈앞에서 산사태를 보았다는 무용담에 입을 떡 벌렸다. 그리고 여기는 한국이다. 비가 오면 경기장이 바다가 되고 지하철역에 파도가 치는 한국에 살고 있는 것이다. 아무도 이런 식의 세계화를 추구하진 않았을 텐데.

지금, 비는 더이상 낭만이 아니다
 

무더기비: 폭우(暴雨). 한꺼번에 많이 내리는 비.

폭우, 집중호우의 순우리말은 '무더기비'라고 한다. '무더기'라는 말이 가슴에도 우두둑 뭔가를 쏟아붓는 것 같다.

모든 일이 직접 피부로 겪기 전까지는 결국 남의 일인 법인지, 캄보디아 수도에서만 생활했던 나에게 무더기비는 특별한 비였다. 올여름을 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정신을 놓을 듯 더운 날이면, 기습적으로 찾아왔다가 시치미 떼듯이 사라지는 스콜이 기다려졌다.

한국의 여름날처럼 뭉게구름이 많은 것이 캄보디아의 하늘이지만, 유독 뭉게구름이 심상치 않게 아래로 쌓이고 공기가 숨 막히도록 답답해지면 어김 없이 곧 장대 같은 물줄기가 쏟아졌다. 집에 있을 때 스콜이 오면 두꺼운 판초우의를 입고 옥상에 올라갔다. 그리고 맞은 자리가 아플 만큼 거센 빗발의 맛을 최대한 온몸으로 느끼곤 했다. 힘겨웠던 외국생활에서 가장 선명하게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지금, 무더기비가 가슴에 '우두둑' 쏟아놓는 것은 낭만만은 아니게 되었다.

앞으로 해수면이 1m 상승할 경우 이탈리아 베네치아는 완전히 사라지고 3m까지 올라가면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미국 마이애미 등 해안가 도시들이 소멸한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내가 살고 있는 부산의 송도와 김해 일부가 물에 잠기게 된다.

뒤늦게 알았지만 우리가 캄보디아에 머물 때 찾아왔던 마을 홍수도, 당시 지역민들에게는 놀라운 일이었다. H가 일하던 학교의 교감 선생님께서는 이렇게 물에 잠기는 일을 자신도 살면서 별로 겪어보지 못했다고 말씀하셨다.

그는 교감 선생님의 말씀을 이렇게 더 전해 왔다. 중국이나 한국, 일본의 공장들 때문에 날씨가 바뀐다는 걸 뉴스에서 보았다고, 캄보디아에는 아직 공장이 많지 않고 우리는 공장이 어떤 나쁜 역할을 하는지 배우거나 겪어보지 못해서 더 무섭다고, 진짜로 굴뚝에서 나오는 이상한 연기와 물이 사람을 해치느냐고.
 
아름다운 강이지만 물이 불었을 때는 마을까지 같은 풍경으로 껴안아 버렸다.
▲ 캄보디아 끄라쩨 메콩 강의 풍경 아름다운 강이지만 물이 불었을 때는 마을까지 같은 풍경으로 껴안아 버렸다.
ⓒ 김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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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변화'(climate change)가 아닌 '기후위기'(climate crisis), '지구온난화(global warming)' 대신 '지구가열(global heating)'이라는 용어를 쓰자는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다. 생각해 보면 진작 그랬어야 하는데, 싶은 부분이다. 한국판 그린뉴딜 정책에 실효성과 위기의식이 부족하다는 비판들도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다.

나는 장바구니를 챙겨 다니면서도, 음료에 금방 불어 우그러지는 종이빨대를 아직도 어색해하는 소시민이다. 그래서 한결같이 빚진 마음이다. 그 빚진 느낌을 덜어내려고 환경운동 서명 권유 메일이 오면 서명을 하고, 무료 환경강의를 찾아듣는다. 환경단체 행사가 있을 때 시간이 맞으면 참여한다.

환경운동가가 되는 것이 꿈 중 하나지만, 환경운동이 따로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어딘가 남사스럽고 요란해 보이는 '환경운동'이라는 말이 없어질 만큼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의 인식이 성장했으면 한다. 다 살자고, 살아남자고 하는 일이 아닌가 말이다.

이 무더기비가 지나간 자리에, 참 당연하고 익숙한 것부터 바꾸어 나가는 시도가 무더기로 솟아나면 좋겠다. 아주 작은 우리는 아주 작은 것부터 해 나가면 좋겠다. 베네치아가 사라져가듯 내가 사랑하는 이 도시가 사라지는 것을 눈앞에서 보고 싶지는 않다. 그 예쁜 우리말이 슬프고 아픈 어감이 아니라 낭만적인 어감으로 남을 수 있기를 바란다. 소설 <소나기> 속 오두막에 내리는 소낙비처럼.

덧붙이는 글 | # 한국판 그린뉴딜 정책에 대한 그린피스의 시각, 그린피스 서울사무소 포스트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28812329&memberNo=8412943&vType=VERTICAL

# 환경 강의를 무료로 제공하는 '사이버환경정책교육원' https://cyberedu.kei.re.kr/


태그:#기후위기, #지구가열, #재난, #폭우, #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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