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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에 의하면, 올해 1·2·3·6월은 이례적 고온 현상을 보였지만, 4월과 7월은 역대 5위의 저온을 기록했으며, 여름 강수량은 예년의 1.5~2배에 달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에게 기후 이변의 심각성과 대처의 시급성을 단기간에 일깨워준 계기가 됐습니다. 이에, 이상 현상과 그 과학적 대응을 다룬 조선시대의 사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누런 비의 정체
 
‘봄의 불청객’ 송홧가루, 즉 소나무 꽃가루가 날리는 모습
 ‘봄의 불청객’ 송홧가루, 즉 소나무 꽃가루가 날리는 모습
ⓒ 국립수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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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에 괴어 있는 빗물이 누런색이 나니 사람들이 황우(黃雨)로 여겼다...안평대군 이용이 서신으로 행궁(임금의 궁궐 밖 거처)에 보고하였다..."사람을 시켜 궁궐 마당의 물이 괴어 있는 곳을 두루 살펴보게 했더니, 모두 소나무 꽃가루가 섞여 있었습니다...밤에 내린 비가 그릇에 고인 것을 가져다 보니 소나무 꽃가루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황우가 하늘에서 내렸다면 하필 땅에만 내리고 그릇에는 내리지 않았을 리가 있겠습니까...맛을 보니 매운 맛이 바로 소나무 꽃가루와 같았으므로, 또한 사람을 시켜 소나무 꽃가루를 가져다 물 가운데 넣었더니, 그 형상도 비슷하여...하루 동안 날아간 소나무 꽃가루가 쌓였다가 비 때문에 떠오른 것이오라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황우라고 터무니없는 말을 하는 자가 있더라도, 현혹되지 마시옵소서." (세종실록 23년 4월 26일)
 

세종이 고질적인 눈병 치료를 위해 온양 온천에 머무르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이 행차에 따라가지 않고 서울에 남아 있던 셋째아들 안평대군으로부터 긴급 보고가 들어옵니다. 누런 비가 내려서 서울이 뒤숭숭하다는 것입니다.

이 누런 비는 실록에 황우(黃雨)·토우(土雨)·우토(雨土)·묵우(墨雨)·매우(霾雨)·예매(翳霾) 등으로 기록되어 있는데요. 흙·황사·먼지 등이 비에 섞여 내리는 자연현상을 가리키면서, 때때로는 하늘에서 보내는 경고로 여기기도 했습니다. 지난 회 기사(세종대왕이 이상기후에 대처하는 법 http://omn.kr/1omnn)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옛사람들은 하늘이 이상 현상이나 재해 등을 통해 위정자의 잘못을 꾸짖는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누런 비를 본 사람들은 불안했겠지요. 신하들은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임금이 반성하는 모습을 어떤 방식으로 보여야 하나 논의하고요. 이에 대해 안평대군은 침착하게 분석적 태도로 접근합니다. 직접 맛을 보고 눈으로도 양태를 관찰한 결과, 다량의 소나무 꽃가루가 땅에 쌓여 있다가 비가 오니 물 위에 뜬 것일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궁궐 안에 놓은 그릇에는 누런 비가 내리지 않고, 땅에만 내린 것도 증거로 제시됩니다. 마지막으로, 하늘의 계시라는 헛소리에 현혹되지 말라고 자신 있게 당부까지 덧붙입니다.

아들이 한 말이니 즉각 받아들일 법도 한데 세종은 판단을 유보합니다. 당시 최고의 행정기관인 의정부의 의견도 청취하고, 이어서 확인차 궁궐에 환관을 급파합니다. 그가 현장에서 가져온 누런 가루를 보니 역시나 소나무 꽃가루가 맞습니다. 논리적이며 비판적인 사고를 보니, 그 아버지에 그 아들입니다. 그런데 안평대군이 말한, 궁궐에 놓은 '그릇'이란 무엇일까요?
 
"최근 몇 년간 세자(나중의 문종)가 가뭄을 근심하여, 비가 올 때마다 젖어들어 간 높이를 땅을 파고 보았다. 그러나 비가 온 높이를 적확하게 알지 못해서, 구리를 부어 그릇을 만들고는 궁궐에 두어, 빗물이 그릇에 고인 높이를 실험하였다." (세종실록 23년 4월 29일)
 
 
누런 비에 대해 토론하는 자리에서, 세종에 의해 의도치 않게 그 그릇의 정체가 공개됩니다. 세자가 가뭄을 어떻게 타개할 수 있을까 고심하며, 궁궐에 구리로 만든 그릇을 놓아두고, 빗물이 고인 높이를 측정해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기기를 통한 강우량의 정량적 관측을 시도한 셈입니다.
 
청주목사(현 청주시장) 김자수가..."올해는 3월부터 이달까지 비가 오지 않고, 한 달 걸러 한 번씩 비가 왔으나 흙에 들어간 정도가 몇 치(1치=3.3cm) 안 되고, 조금 뒤에 날이 곧 개어 가뭄의 맹렬함이 날마다 더 심해집니다." (태조실록 7년 윤5월 6일)
 
호조(현 기획재정부·국세청·통계청)에서 아뢰었다. "전국의 감사(지금의 도지사)가 우택(강우량)을 알리도록 하는 법이 이미 제정되어 전해옵니다. 그러나 흙의 성질이 건조하고 습한 정도가 같지 아니하고, 흙속으로 스며 든 비가 얕고 깊은 정도도 역시 알기 어렵습니다." (세종실록 23년 8월 18일)

 
 
측우기의 탄생
 
1930년에 촬영한 측우기와 측우대
 1930년에 촬영한 측우기와 측우대
ⓒ 서울역사박물관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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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이 국가 경제의 중심인 조선에서 강우량 측정의 제도화는 어쩌면 당연합니다. 국가 차원에서 강우량을 재는 행위가 개국 초기인 태조 때부터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을 정도입니다. 비에 젖은 흙의 깊이를 재어 비의 양을 간접적으로 관측하는 '우택(雨澤)'이라는 방법을 사용하여, 비가 내릴 때마다 각 지방에서 중앙정부에 보고했습니다. 문제는 지역·계절 등에 따라 흙의 재질이나 상태 등이 제각각이므로, 측정 결과의 신뢰도가 낮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문종이 되는 세자에 의해, 완전한 발상의 전환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릇에 고인 빗물의 깊이를 재는 도구, 다시 말해 정량적 측정 장비를 제작하여, 변수를 최대한 통제한 상태에서 강우량을 관측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조정의 논의는 비과학의 영역인 하늘의 경고성 누런 비가 아니라, 과학의 영역인 강우량을 측정하는 도구의 제작으로 옮겨 갑니다.
 
호조에서 건의하였다..."서울에서는 쇠를 주조해 기구를 만들어 명칭을 측우기라 하니, 길이가 1척 5치(약 47cm)이고 직경이 7치(약 23cm)입니다. 주척(고대 주나라 때의 도량형)을 사용해, 서운관(현 기상청)에 대를 만들어 측우기를 대 위에 두고 매번 비가 온 뒤에는 서운관의 관리가 직접 비가 내린 상황을 보고는, 주척으로 물의 깊고 얕은 것을 측량해 비가 내린 것과 비오고 갠 날짜·시간과 빗물 깊이의 척·치·푼 수치를 상세히 쓴 후에 즉시 보고하고 기록해 두어야 합니다...지방에서는...추후에 참고하기 위한 근거로 삼게 하소서." 그대로 따랐다. (세종실록 24년 5월 8일)
 
 
이것이 바로 세계 최초의 우량계(雨量計)인 측우기의 탄생을 알리는 기록입니다. 동일한 크기로 측우기를 제작하여 전국에 설치합니다. 표준 도량형에 근거해 측정한 강우량을 세밀하게 기록하고 이를 축적하여 국정 운영의 기본 자료로 삼습니다.

조선 초·중기까지 이어지던, 전국에서 측우기로 강우량을 측정해 중앙정부에 보고하고 집계하던 제도는 아쉽게도 전란 등을 겪으며 명맥이 끊깁니다. 그 후 영조의 명령에 의해 유실된 측우기를 복원 제작하며 관련 제도가 복구되었고, 이러한 기조는 고종 때까지 지속됐습니다.
 
세종시대의 옛 제도를 모방해서 측우기를 만들어 창덕궁과 경희궁에 설치하라고 명하였다. (영조실록 46년 5월 1일)
 
측우기의 수심이 2치 7푼(약 8.7cm)이었다. (고종실록 13년 윤5월 21일)

 

미래를 대비하는 마음

코로나19의 팬데믹과 더불어, 세계 곳곳에서 관찰되는 이상기후 현상은 인류문명의 근간을 강하게 뒤흔들고 있습니다. 지구를 병들게 하는 경제·사회 구조와 개개인의 생활방식 등에 대한 하늘의 준엄한 꾸짖음으로 느껴질 정도입니다. 소수의 전문가 집단에 환경문제에 대한 고민과 대책을 맡겨놓고, 책임과 행동을 유예해온 우리의 과거를 성찰할 기회임은 분명합니다.
 
코로나19로 인간 활동이 급속히 위축되자 자연 생태계가 회복 조짐을 드러낸 현상을 보면, 지구의 미래를 당겨쓰는 고성장의 망령과 탄소 중독에서 벗어나야 함은 명백합니다. 아울러 우리의 노력에 따라 '인류 멸망'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비껴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도 갖게 합니다. 실제로 전 세계는 고탄소 경제 구조에서 저탄소 경제 구조로 이행할 준비를 하거나 이행 중입니다.

600년 전 우리 선조들은 언제일지 모르지만 반드시 찾아올 가뭄을 대비하기 위해 측우기를 제작했으며, 이를 통해 종합적으로 분석한 자료를 축적해나갔습니다. 이처럼 미래를 걱정하고 대비하는 마음, 이제 우리도 품어야 하지 않을까요?

태그:#실록읽어주는여자, #세종이야기꾼, #측우기, #이상기후, #환경오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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