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 일레븐엔터테인먼트


"갓 태어난 아기지만 몸은 죽음 앞둔 80대 노인과 다를 게 없어."

80세 노인의 모습으로 태어난 벤자민을 보면서 의사는 이렇게 말한다. 백내장, 관절염에 피부는 탄력이 없고 손발은 경직된 채, 얼마 살아보지도 못하고 죽을 것이란 선고를 받은 벤자민.

데이빗 핀처 감독의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남들과는 달리 노인으로 태어나 시간이 갈수록 점점 젊어지는 한 남자의 삶과 사랑을 다룬 영화다.

<위대한 개츠비>로 유명한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의 단편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데, 주인공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젊어진다는 설정만 가져왔을 뿐 영화는 원작 소설과 전혀 다른 내용을 그리고 있다. 원작 소설이 주인공의 남다른 삶을 보다 현실적으로 그렸다면 영화는 보다 희망적인 판타지로 그렸다고나 할까.

하지만 영화를 본 후혀끝에 남는 싸한 사랑의 맛은 여운이 길다. 엇갈릴 운명이기에 더욱 격렬하고, 짧은 인연이기에 더욱 강렬하게. 
"엇갈릴 운명이기에 더욱 격렬하고, 짧은 인연이기에 더욱 강렬하게 혀끝에 남는 싸한 사랑의 맛. 사랑과 죽음과 이별은 모두 같은 맛."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 다나베 세이코 지음, 양억관 옮김, 작가정신, 2017) 

'다름'을 '틀림'으로 강요한다면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 일레븐엔터테인먼트

 
벤자민은 죽음을 앞둔 80대 노인의 몸으로 태어난다. 그의 친부 토마스 버튼은 벤자민을 괴물로 생각해 양로원에 몰래 버리고 갔지만, 양로원 운영자인 퀴니는 그런 벤자민을 양아들로 삼아 지극 정성으로 돌봐준다. 시간이 지나면서 벤자민은 서서히 젊어지고 있음을 느끼기 시작한다. 

벤자민 버튼(브래드 피트) : 난 점차 변해갔다. 머리는 잡초처럼 무성하게 자랐고 후각과 청력은 더 예민해졌다. 걸음도 빨라지고 남들이 늙어가는 동안 난 더욱 젊어졌다. 오직 나만이.. 

벤자민 혼자 거꾸로 나이를 먹게 되는 설정은 이 영화의 가장 큰 특징인데, 보다 함축적인 의미들을 시사하고 있다.

우선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다름'을 '틀림'으로 강요하는 정체성에 대한 사회적 통념이다. 단지 '다르다'라는 이유만으로 혐오와 차별을 받고, 있는 그대로 보기보단 사회가 바라는 대로 봐야 하는 편견의 전제를 꼬집고 있는 것이다.

사실 원작 소설과 달리 영화에서는 벤자민 혼자 거꾸로 나이를 먹고 남들과 정반대의 삶을 살아가는 동안 받는 소외와 차별은 크게 부각되지 않는다. 벤자민이 죽음을 앞둔 80대 노인의 몸으로 태어났을 때 그의 친아버지가 비정하게 양로원에 버리는 장면이 잠깐 나올 뿐이다. 이 또한 나중에는 그의 친아버지가 벤자민에게 사실을 고백하고 그에게 많은 재산을 물려주게 된다.

오히려 불행 중 다행으로 양로원에서 살아가면서 소중한 사람들과 어울리게 된다. 사랑으로 키워준 양어머니 퀴니, 허물없이 대하며 사랑을 일깨워준 데이지, 인생과 피아노를 가르쳐준 할머니, 세상 밖의 자유로운 삶을 가르쳐준 마이크 선장 등. 

벤자민 버튼(브래드 피트) : 엄마, 내가 점점 변해가는 것 같아.
퀴니(타라지 P. 헨슨) : 딴 사람들도 다 변해. 넌 좀 다르지만. 삶의 종착역은 다 같아. 어떤 길로 가는지가 다를 뿐이지. 넌 네 길을 가는 거야.


친아버지에게 비정하게 버려지고 80대 노인의 형편없는 몸으로 태어난 벤자민.
단지 남과 '다르다'라는 이유만으로 혐오와 소외를 받을 수도 있었지만 그의 영혼마저 타락하지 않은 건 그의 두 손을 맞잡은 사람들의 온기 덕이었다. 
어딘가를 걸을 때 엄마가 내 손을 꽉 잡았던 걸 기억한다.
엄마는 절대로 내 손을 놓지 않았다. 가끔은 아파서 내가 슬며시 힘을 뺄 때면 엄마는 눈을 흘기며 얼른 꽉 잡으라고 했다.
우린 가족이니까 손을 잡고 걸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반대쪽 손은 할멈에게 쥐여 있었다. 나는 누구에게서도 버려진 적이 없다. 내 머리는 형편없었지만 내 영혼마저 타락하지 않은 건 양쪽에서 내 손을 맞잡은 두 손의 온기 덕이었다. (p.153) 

(<아몬드>, 손원평 지음, 창비, 2017) 

죽음에 대한 자각으로부터 단절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 일레븐엔터테인먼트

 
그리고 벤자민 혼자 거꾸로 나이를 먹게 되는 설정은 죽음의 본질에 대해 통찰하게 한다.

벤자민은 계속 나이를 거꾸로 먹다가 치매로 인해 정신이 오락가락하고자신의 이름조차 기억하지도 못하는 어린아이가 된다. 그리고 결국에는 아기의 모습으로 생을 마감한다. 

벤자민 버튼(브래드 피트) : 내가 기억 못 하는 게 많은 거 같아.
데이지(케이트 블란쳇) : 예를 들면?
벤자민 버튼(브래드 피트) : 뭐랄까.. 오래 산 거 같은데 하나도 기억 안 나.
데이지(케이트 블란쳇) : 괜찮아. 기억 못 해도 돼.


일반적으로 인간은 자신의 마지막이 언제일지 모른다. 하지만 벤자민처럼 거꾸로 나이를 먹어 결국 아기의 모습으로 생을 마감한다는 방향 설정은 자신의 마지막이 언제일지 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자신의 마지막을 안다면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이 영화는 묻고 있는 것이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 일레븐엔터테인먼트

 

벤자민 버튼(브래드 피트) : 사람들이 점점 늙어갈 때 난 점점 젊어진다면요?
할머니 : 그렇담..슬픈 일이지.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는 걸 봐야잖아. 끔찍한 책임이지.
벤자민 버튼(브래드 피트) : 삶과 죽음을 그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할머니 : 누구든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서야 그 사람의 소중함을 깨닫는 법이야.


시간이 지나면서 벤자민은 몸과 마음이 변하는 것을 느끼기 시작한다. 하지만 남들이 늙어가는 동안 오직 나만이 젊어진다는 것은 삶과 죽음에 대해 또 다른 책임이 무겁게 드리워짐을 받아들여야 했다. 

무의식적으로 죽음에 대한 자각으로부터 단절되면 우리가 느끼는 시간과의 관계가 다소 느슨하고 방만해진다. 우리는 늘 실제보다 더 많은 시간이 있다고 착각하게 된다. 마음은 온갖 희망과 바람으로 가득 찬 미래를 표류하게 된다. 계획이나 목표가 있어도 많은 에너지를 쏟아붓기가 힘들어진다. (p.896)

인생이 짧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으면 매일매일 해야 할 일이 더 분명해진다. 이뤄야 할 목표가 있고, 완수해야 할 프로젝트가 있고, 개선해야 할 인간관계가 있다. 이렇게 지속적으로 자각을 갖고 있으면 정말로 중요한 게 무엇인지 볼 수 있고, 사소한 싸움이나 곁가지 과제는 그냥 집중을 방해할 뿐임을 알게 된다. (p.898)

(<인간본성의 법칙>, 로버트 그린 지음, 이지연 옮김, 위즈덤하우스, 2019) 

같이 늙어갈 아빠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 일레븐엔터테인먼트

 

벤자민 버튼(브래드 피트) : 잘 키워줄 진짜 아빠를 찾아.
데이지(케이트 블란쳇) : 무슨 소리야?
벤자민 버튼(브래드 피트) : 같이 늙어갈 아빠.
데이지(케이트 블란쳇) : 당신이 어떻게 되든 사랑할 거야.
벤자민 버튼(브래드 피트) : 필요한 건 아빠지, 소꿉친구가 아냐. 


마지막으로 벤자민 혼자 거꾸로 나이를 먹게 되는 설정은 사랑과 이별에 대한 성찰이기도 하다.

남들과 달리 점점 젊어지는 벤자민(브래드 피트)과 남들처럼 점점 늙어가는 데이지(케이트 블란쳇).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다 결국 두 사람은 깊은 사랑에 빠지게 되고 사랑스러운 아이도 갖게 된다. 하지만 점차 커가는 아이을 보며 벤자민의 고민도 커져 간다. 결국 아이에겐 같이 늙어갈 아빠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벤자민은 데이지와 아이의 행복을 위해 그들 곁을 떠난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 일레븐엔터테인먼트

 
데이지(케이트 블란쳇) : 2003년 봄이었지. 그가 날 쳐다봤어. 알겠더구나. 내가 누군질 그가 안다는 걸. 그리곤 눈을 감았어. 마치 잠이 들듯이.. 

사랑하기에 어쩔 수 없이 이별을 해야만 했던 가슴 아픈 선택의 아이러니는 세월의 흐름을 돌고 돌아 데이지 앞에 운명적으로 다시 나타난다.

비록 벤자민은 치매로 인해 정신이 오락가락하고 자신의 이름조차 기억하지도 못하는 어린아이였지만, 데이지는 이런 벤자민을 죽을 때까지 보살피게 된다. 벤자민이 아기가 되어 데이지 품에서 숨을 거두는 장면은 데이지의 독백과 함께 가슴 아린 깊은 여운을 남긴다. 

신은 인간을 질투해 

남들과는 달리 노인으로 태어나 시간이 갈수록 점점 젊어지는 한 남자의 삶과 사랑. 그리고 그 남자의 마지막을 함께 한 여자.

데이빗 핀처 감독의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브래드 피트의 '역노화' 특수분장처럼 볼거리도 흥미롭지만, 거꾸로 나이를 먹는 설정을 통해 삶과 죽음을 통찰하게 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그리고 영화를 본 후 혀끝에 남는 싸한 사랑의 맛은 여운이 길다. 다나베 세이코가 말했듯이 사랑과 죽음과 이별은 모두 같은 맛일까.

엇갈릴 운명, 짧은 인연의 아이러니 같은 삶을 살다간 벤자민. 사랑하는 여인 품에서 편안히 마지막을 함께하는 장면은 아이러니하게 또 다른 장면을 연상시킨다.

영화 <트로이>에서 주인공 아킬레스 역을 맡은 브래드 피트가 포로로 잡은 트로이의 공주 브리세이스(로즈 번)에게 인간과 인생의 매력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바로 이 장면! 

아킬레스(브래드 피트) : 아무도 모르는 비밀 하나 가르쳐줄까? 신은 인간을 질투해. 인간은 다 죽거든. 늘 마지막 순간을 살지. 그래서 삶이 아름다운 거야. 이 순간 넌 가장 아름다워. 이 순간은 다신 안 와. 

죽음을 통해 삶이 아름다운 이유를 되짚어보게 하는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묻는다. 신이 인간을 질투할 만큼 이 순간을 과연 아름답게 살아가고 있는가.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 아몬드 인간본성의 법칙 트로이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