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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해'는 용서로부터 출발하며, 용서의 시작은 진실을 밝히는 노력과 과정이다. 그리고 진실의 공유를 통해 서로에 대한 믿음이 형성되면 비로소 용서와 화해의 기반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용서와 화해를 위한 우선 조건은 바로 '정의의 실현'이다. 정의의 실현이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다면 불화는 곧 해소될 것이다. 그러나 혹 가해와 피해의 주체가 국가인 경우, 그리고 양자 사이에 역사의 상처뿐만 아니라 영토문제를 비롯한 현실적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면 정의의 실현이 곧바로 화해로 이어지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피해자에게는 피해를 당함으로써 생긴 수치심이나 원한, 그리고 이를 극복하려는 분노의 감정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으며, 이러한 심리상태는 이성적 사고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가해자는 이러한 피해자의 심리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베버는 정의의 실현 방식을 '형식적 정의(formal justice)'와 '실질적 정의(substantive justice)'로 구분하였다. 형식적 정의는 법에 따라 처벌과 보상이 실현되는 방식이다. 여기에 전통적 관습이나 개인의 주관적 정서는 고려되지 않는다. 서구 사회의 불화 해소방식은 보통 형식적 정의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에 반해 실질적 정의의 실현은 개인에 대한 고려가 우선하고, 정의를 실현하는 주체의 주관성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즉 법보다는 도덕성이나 윤리적 판단이 우선시되는 것이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국제적 분쟁의 경우 조약 체결이나 국제법을 통한 처벌 등, 주로 형식적 정의의 실현을 통해 국가 간의 화해가 시도되어 왔다.

특히 국가 간의 불화가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나면 종전 이후 진행되는 국제법에 따른 재판이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객관적 기준에 의해 책임을 물음으로써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수단이 된다.

반대로 실질적 정의의 실현은 법보다는 도덕성과 윤리성에 따라 국제관계를 규정하는 방식이라고 했다. 국가 간의 전쟁이나 갈등이 생기면 법이나 조약에 의존하기보다는 깨어진 신뢰를 회복하려는 시도가 우선하는데 법에 의한 가해자의 처벌에 앞서 가해에 대한 사과와 반성을 먼저 요구한다.

그리고 그 사과가 독일과 폴란드와 같이 '공적 의례(public ceremony)의 형태로 표현되는 경우 그 효과는 더욱 크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실질적 정의의 실현은 단순하지도 쉽지도 않다.

한일 양국은 서로 다른 정의의 개념으로 역사를 기억하고 있다. 일본은 도쿄재판,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 한일협정 등과 같은 형식적 정의의 실현을 통해 가해의 책임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형식적 정의보다는 실질적 정의, 즉 개인에 대한 국가 차원의 사과와 배상을 우선한다.

이 차이가 오늘날 한일 양국의 갈등과 불화의 근인이다. 이를 해소하기 위한 노력 또한 계속되어왔다. 한일관계의 과거와 현재는 식민지배의 역사 위에 구축되었다는 전제하에 사죄와 용서, 배상과 보상, 기억과 역사, 진실 추구(truth telling) 과정을 통한 과거사와의 올바른 화해를 시도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계개선에 진전이 없고 오히려 더 악화되었다면 이 시점에서 우리는 지금까지의 노력과 방법을 되돌아보며 화해에 대한 새로운 이론과 실천적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지금까지 한일 두 나라는 역사 인식을 둘러싸고 대립해왔다. 그런 한편에서 이 간격을 좁혀 공통된 역사 인식을 공유하려 노력해 왔다. 그러나 서로 다른 문화와 사유체계에 의해 만들어진 고유의 역사와 그 인식을 공유한다는 것이 애초에 가능한 일이겠는가?

나는 한일 양국이 공동의 역사를 공유하고 인식하는 것 못지않게 다르고 차이 나는 역사와 그 인식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같지 않은데 같음을 찾기 위해 노력하기보다 다른 것을 인정하고 다름을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화해의 전제 조건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한 국가 내에서 의견을 하나로 모을 필요도 없다. 무슨 유신 시절의 '국민 총의'도 아니고 말이다. 여럿 있는 역사 인식 중 하나가 이해와 공감대를 형성하게 된다면 이것이야말로 자연스러운 역사 인식의 공유가 아니겠는가.

이를 위한 전제 조건은 한일 양국이 극단적 민족주의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역사를 선악의 구도로 보면서 특정 기억만을 강요하며, 사실에 대한 과장과 왜곡을 통해 화해보다는 불화를 조장하고 그럼으로써 이익을 챙기는 특정 단체에 '정의'의 독점을 허락해서는 안 된다. 정의의 독점은 때론 폭력으로 이어지고, 폭력은 자유로운 사고의 가능성을 원칙적으로 차단해 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혹 화해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진다면 한일 양국은 그 합의의 중요성을 확인하고 이를 존중하며 유지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런 부단한 노력 자체가 '화해'이기 때문이다. 화해는 달성해야 할 목표가 아니라 그것으로 나아가는 일종의 과정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태그:#화해, #한일관계, #정의, #정의의 독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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