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베를린 장벽이 철거된 자리에 세워져 있는 십자가들을 과거 독일 방문 당시 찍었다. 여기에는 베릴린 장벽을 넘다가 목숨을 잃은 동독 주민의 이름과 사진이 십자가마다 표시돼 있었다.
 베를린 장벽이 철거된 자리에 세워져 있는 십자가들을 과거 독일 방문 당시 찍었다. 여기에는 베릴린 장벽을 넘다가 목숨을 잃은 동독 주민의 이름과 사진이 십자가마다 표시돼 있었다.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독일 수도 베를린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서독 지역과 동독 지역으로 양분되었다. 그 이후 동독 주민들이 서베를린으로 탈출하는 일이 이어졌다. 동독은 1961년 8월 13일 '베를린 장벽'을 세웠다. 전날 자정부터 군대와 경찰을 동원해 국경을 폐쇄한 동독은 밤새 철조망으로 서베를린을 에워쌌다.

철조망 장벽은 서베를린과 동베를린 사이에 43km, 서베를린과 그 외 동독 지역 사이에 156km 길이로 설치되었다. 이 철조망 장벽은 1965년 다시 콘크리트 장벽으로 더욱 견고해졌다. 장벽에는 감시탑 116개소가 설치되어 접근하는 사람들을 철통같이 막았다. 국경을 통과할 수 있는 지점은 아홉 곳에 개설된 검문소뿐이었다.

주민들의 서독 탈출을 막으려고 장벽 설치한 동독의 정치세력 

서독으로 탈출하는 주민들을 막는 한편, 서베를린을 고립시키려는 동독 정치 권력의 조치는 성공한 듯 보였다. 하지만 동독 주민들은 월장(담 넘기)에 목숨을 거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독일 체크 포인트 찰리(Checkpoint Charlie) 박물관의 2010년 8월 11일 발표에 따르면, 1961년부터 장벽이 무너지는 1989년까지 1393명이나 되는 동독 주민이 탈출을 시도하다가 목숨을 잃었다. 매주 한 사람이 장벽을 넘으려다 총살된 것이다. 이는 탈출을 시도한 동독 주민이 얼마나 많았으며, 동독 주민들의 민심이 어떠했는지를 단적으로 증언해주는 숫자다.

그렇게 탈출 시도가 계속되던 중, 이윽고 1989년 9월 들어 1만 3천여 명이나 되는 대규모의 동독 주민들이 헝가리와 체코슬로바키아를 거쳐 서독으로 탈출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탈출에 성공하지 못한 동독 주민들은 현지의 서독 대사관을 점거했다. 결국 그해 11월 9일 밤 베를린 장벽은 장벽의 기능을 잃었다.
 
베를린 장벽이 철거된 자리에 게시돼 있던 당시의 풍경. 사진 하단에 '1989년 11월 10일' 사진이라는 붉은 글씨가 쓰여 있었다.
 베를린 장벽이 철거된 자리에 게시돼 있던 당시의 풍경. 사진 하단에 "1989년 11월 10일" 사진이라는 붉은 글씨가 쓰여 있었다.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11월 10일 아침 베를린 시민들은 장벽 위에 올라 목청껏 "만세!"를 불렀다. 시민들은 집에서 해머, 곡괭이 등을 들고 나와 벽을 부수기 시작했다. 마침내 12월 22일에는 '평화의 문'이라는 이름으로 독일을 상징해 온 브란덴부르크 문도 열렸다. 12월 23일 이래 서독 사람들은 누구나 비자 없이 자유롭게 동독 지역을 방문했다.

1990년 6월 13일 동독은 장벽 철거에 들어갔고, 마침내 1991년 10월 3일 독일은 통일을 이루었다. 통일 독일은 장벽 일부를 부수지 않고 역사의 흔적으로 남겨 두었다. 그곳들은 오늘날 세계적 관광지로 주목받고 있다. 장벽이 건재할 때 연합국 요원과 외국인만 통과할 수 있었던 아홉 곳 중 한 곳인 체크 포인트 찰리 또한 세계인의 발길을 사로잡는 명소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주당 1명씩 목숨 잃었던 베를린 장벽... 그들은 왜 목숨 걸고 탈출했나 

베를린 장벽과 독일 통일은 여러 가지 깨달음을 준다. 첫째, 사람의 마음이 오가는 것은 건축물로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 둘째, 사람이 '만물의 영장'인 것은 때로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 셋째, 고난과 핍박의 상징이었던 장소는 문제가 해소되고 나면 굉장한 관광 명소가 된다는 것.
 
동베를린과 서베를린 사이의 대표적 검문소였던 체크포인트 찰리는 현재 세계적 관광지가 되었다.
 동베를린과 서베를린 사이의 대표적 검문소였던 체크포인트 찰리는 현재 세계적 관광지가 되었다.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넷째, 여행과 거주 이전의 자유를 박탈하려는 조치는 신분 사회에서나 시도될 수 있는 무모한 통치 행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민중의 기본권을 오랫동안 제약하려는 독재정권은 언젠가 무너진다. 이는 대한민국에서도 이승만과 박정희 정권이 적나라하게 증거가 돼 주었다.

안타까운 것은, 자유당 정권과 공화당 정권의 시대가 흘러간 지 한참이나 된 지금도 한국 국민들에게는 여행과 거주 이전의 자유가 반 토막만 보장되고 있다는 점이다.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로 한다'가 몇 조인지는 기억하지 못해도 그런 내용이 헌법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국민은 없을 것이다. '모든 국민은 거주 이전의 자유를 가진다'는 제14조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우리는 현실과 헌법의 불일치 상태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데도 한반도 중반쯤 되는 땅에는 가지 못한다.

이렇게 된 것은 대한민국에도 6 · 25전쟁이 휴전 상태로 바뀐 1953년 7월 27일 이후 동해에서 서해까지 '베를린 장벽'이 설치된 탓이라고 본다. 휴전선이다. 독일의 베를린 장벽보다 훨씬 긴 역사를 자랑(?)하는 휴전선이 오늘도 한반도 허리를 잘라놓고 있기 때문이다.

휴전선은 세계 유일의 현존 '베를린 장벽'

독일의 베를린 장벽은 1961년부터 1989년까지 존재한 뒤 27세에 사라졌다. 그에 비해 우리의 휴전선은 2020년 현재 67세 고령 수준이다. 한국은 현존하는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인 만큼 인류 역사에 휴전선보다 더 오랜 역사를 뽐낼(?) 장벽이 다시 생겨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 희귀성에서 휴전선은 독보적인 세계 역사유산인 것이다.
 
일부 헐지 않고 남겨둔 장벽을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라는 이름의 미술관으로 만들어 두었다.
 일부 헐지 않고 남겨둔 장벽을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라는 이름의 미술관으로 만들어 두었다.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게다가 휴전선과 베를린 장벽은 규모에서도 비교가 안 된다. 베를린 장벽은 동독 쪽 100m만 일반인의 접근이 금지되었지만, 휴전선은 남북 양쪽으로 각각 2km씩 도합 4km나 되는 비무장지대를 거느리고 있다. 길이도 248km나 돼, 베를린 장벽보다 훨씬 길다.

위치의 차이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베를린 장벽은 도시에 설치되었지만, 휴전선은 산과 강에 놓여 있다. 비무장지대는 지구 어느 곳과도 견주어도 모자람이 없는 자연의 보물창고다. 근 70년 동안 인간의 출입이 거의 없었던 비무장지대의 산과 강은 천혜의 자연유산이면서 동시에 이데올로기가 낳은 현대판 역사유산이다. 이만한 관광 명소가 지구상 어디에 또 존재할 수 있을까. 대도시 한복판에 조금 남아 있는 베를린 장벽의 잔재들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본다.

모든 장벽은 없어져야 한다

관광 차원의 관점을 떠나 본질적으로도 모든 장벽은 없어져야 한다. 사람 사이를 가로막는 장벽은 많다. 그러나 이런 신분의 장벽, 종교의 장벽, 사상의 장벽 등 모든 장벽은 인간이 만든 것이다. 베를린 장벽이 없어지니 대부분이 환호했다. 비록 사진으로 보았지만, 1989년 11월 10일 아침 베를린 장벽에 올라 환호하는 독일 사람들의 밝은 얼굴은 30년 이상 세월이 흐른 지금도 눈에 선할 만큼 생생하다.

그 아름다운 풍경을 휴전선 위에 재현해야 한다. 겨레가 한데 어우러져 서로 어깨를 걸고 신명하게 출입금지구역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그 날을 만들어야 한다. 날마다 그 꿈을 꾸어야 한다. 문익환의 〈꿈을 비는 마음〉을 다들 마음속에 새겨야 한다.
 
벗들이여!
보름달이 뜨거든 정화수 한 대접 떠 놓고
진주 같은 꿈 한 자리 점지해 줍시사고
천지신명께 빌지 않으려나!

벗들이여!
이런 꿈은 어떻겠오?
155마일 휴전선을
해 뜨는 동해바다 쪽으로 거슬러 오르다가 오르다가
푸른 바다가 굽어보이는 산정에 다달아
국군의 피로 뒤범벅이 되었던 북녘땅 한 삽
공산군의 살이 썩은 남녘땅 한 삽씩 떠서
합장을 지내는 꿈,
그 무덤은 우리 5천만 겨레의 순례지가 되겠지
그 앞에서 눈물을 글썽이다 보면
사팔뜨기가 된 우리의 눈이 제대로 돌아
산이 산으로, 내가 내로, 하늘이 하늘로,
나무가 나무로, 새가 새로, 짐승이 짐승으로,
사람이 사람으로 제대로 보이는
어처구니없는 꿈 말이외다
(문익환 〈꿈을 비는 마음〉 일부)

 
 
1989년 12월 22일 브란덴부르크 문도 열렸고, 독일은 통일을 향해 나아갔다. 결국 독일은 1991년 10월 3일 통일을 이루었다.
 1989년 12월 22일 브란덴부르크 문도 열렸고, 독일은 통일을 향해 나아갔다. 결국 독일은 1991년 10월 3일 통일을 이루었다.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태그:#휴전선, #베를린 장벽, #8월 13일 오늘의 역사, #브란덴부르크 문, #체크포인트 찰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