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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회장선거 공약에 '엄마 이용권'을 넣은 게 분명했다. 딸이 전교회장으로 뽑히고 이틀이 지난 후, 담임 선생님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어머님, 수학여행 건으로 학부모위원회 회의가 열리는데 참석 가능하시죠?"

선생님의 자연스러운 물음에 나는 순순히 대답해버리고 말았다.

"아 뭐, 그럼 가야죠…"

거절하고 싶었지만, 선생님이 알려준 시간에 학교로 갈 수밖에 없다는 걸 나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학부모씩이나 되어서도 선생님에게 "아니요"라고 말하지 못하는 나는 철저한 주입식 교육과 유교문화로 점철된 인간이었다. 하지만 막상 회의에서 나는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놓고 있었다.

"숙박 없이 삼 일간 현장체험학습으로 진행하면 어떨까요? 지역은 군산으로 제한하고요."

수학여행을 무작정 취소하는 것만이 답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지역 내 소비도 촉진하고, 아이들이 내가 사는 도시에 대해 아는 기회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선생님들 반응도 긍정적이었다.

교감선생님은 "숙박비에 들어가는 예산으로 버스를 몇 대 더 빌려서 학생들의 좌석배치를 여유 있게 하면 좋겠다"고 했고, 학년주임 선생님도 "지역 내 명소 여러 곳을 반별로 분산해서 가면 가능하겠다"고 말했다. 예상보다 회의 분위기가 경직된 게 아니라서 나는 꽤 만족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3주 후 2차 회의가 있었는데 허무하게도 수학여행은 취소되고 말았다. 교육청에서 구체적인 예산안을 내라는 긴급공문이 왔는데, 제출일까지 기한이 촉박했다. 결국 예산은 반납하기로 결정했다. 2차 회의에 참석하기 전까지 교육청에서 어떤 내용의 공문이 왔는지 몰랐던 나는 이날 회의에 책<군산>(한국의 땅과 사람의 이야기) 들고 갔다. 아이들이 먼저 책을 읽고, 장소를 정해서 가면 좋겠다고 생각해서다.

이야기를 알고, 그 장소를 가보면 다르게 보일 거니까. 코로나 때문에 해외여행이 중단되었고, 국내여행도 마음 놓고 다닐 수 없는 지금은 내 주변을 새롭게 보는 시각이 필요한 시기다. 아이들의 이야기는 가정으로 흘러 들어갈 테고, 내가 책을 읽고 받은 위안을 다른 이들도 받기를 바랐다.

역사책에는 나오지 않는 군산 이야기 '군산'
 
 한 개의 지역을 한 권의 책으로! 대한민국 도슨트 <군산>
 한 개의 지역을 한 권의 책으로! 대한민국 도슨트 <군산>
ⓒ 21세기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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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면서 전구에 불이 하나씩 켜지는 것 같았다. 군산 구불길 3길을 걸을 때 '최호 장군 유지'가 있었지만, 최호 장군이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과 연합해 북상하는 일본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공을 세운"지는 몰랐다. '이영춘 가옥'이 있는 줄은 알았지만, 이영춘 박사가 국내 의학 박사 1호로서 초등학교에 위생실을 처음으로 만들고, 농촌위생연구소를 세운지는 몰랐다. 역사책에서 알게 되는 것과는 달랐다.

내가 사는 지역의 자취를 안다는 것은 오래 알았던 사람을 그 사람이 겪은 지난 이야기를 듣고서야 비로소 알게 되는 것과 같았다. 아무리 익숙한 사람이라도 이런 과정을 통과하지 못한다면, 우린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멀리 있는 유명인보다 공부 잘하는 우리 집 큰 오빠를 통해 자긍심이 생기듯 내 주변에 있는 고난을 극복한 흔적이 그랬다. 그건 감히 희망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었다. 내가 가진 재능은 한없이 초라하고 남들은 대단한 걸 가지고 있다는 생각에 붙잡혀서 제자리걸음을 하는 요즘이었다.

각자의 자리에서 치열한 싸움을 해온 이들이 있었고, 그건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는 일이었다는 사실, 내가 밟고 있는 이 땅은 절망 속에서도 저버릴 수 없었던 삶의 의지들이 켜켜이 쌓여 만들어진 곳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생생한 증거들을 눈 앞에 두고 있으니 말이다.

"아픈 역사도 역사이니 보존해야 한다"라고 한 동국사 남곡 스님의 이야기는 건축물만을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나의 상처까지 안고 보듬는 데서부터 진정한 독립이 시작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수학 여행이 취소된 물론 2차 회의에서 이런 생각을 말하지는 않았다. 나는 눈치가 있는 학부모니까. 하지만 15분 만에 회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허탈했다. 1차 회의 때와 사뭇 다른 분위기에 당황했다. 나는 서로의 의견을 들어보는 기회가 되길 바랐다. 그러기에는 15분은 짧은 시간이었다. 그래서 짧게 한 마디만 했다. 

"학부모로서 아이디어를 하나 말씀 드리고 싶어요. <군산> 책을 학생들에게 구입해주고, 저자강연을 하는 것을 제안하고 싶어요."

모두들 좋은 의견이라고 했다. 첫 번째 회의 때처럼.

군산 - 한국의 땅과 사람에 관한 이야기

배지영 (지은이), 21세기북스(2020)


태그:#수학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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